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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유비의 대약진

간천(澗泉) naganchun 2020. 6. 20. 10:36

제5화 유비의 대약진

 

1, 적벽대전

 

서기 208년 북방을 완전히 평정한 조조의 대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자 유비는 서둘러서 남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조조의 쾌속 기마군단에 당양(當陽)에서 대타격을 받았다. 유비는 처자를 잃고 서서도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장비나 조운(趙雲)의 활약이 없었다면 유비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했다. 조조의 천하통일은 마치 목전에 와 있었다.

조조에 패퇴하는 유비는 장강에 면한 강하군(江夏郡)까지 도망쳤는데, 이미 그의 명운은 풍전등화였다. 그 동방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손권의 정권에서는 조조에 항복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런 무렵 정세를 바꾼 것은 노숙(魯肅)과 공명(孔明)이다.

먼저 노숙은 유비진영을 방문하여 제휴를 모색하였다. 노숙은 손권 정권 내의 소수인 주전파였다. 유비는 그에게 고무되어서 용기를 되찾고 공명을 사절로 손권에게 보냈다.

노숙과 공명은 역시 주전파인 주유(周瑜)와 마음을 합쳐서 손권을 설득하였다. 당시 손권(孫權)26세였다. 젊고 패기 넘치는 그는 무혈항복을 바랐으나 승산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공명은 <싸워서도 이길 수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빨리 항복하는 것이 현명합니다.>하고 손권에게 제안하였다. 의외의 말에 놀란 손권은 <어째서 선생은 유비에게 그것을 권하지 않은가?>하고 반론하였다. 그러나 공명은 <유장군은 한나라의 피를 받아서 그 영명함이 천하에 울려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어찌 조조 밑으로 들겠습니까?> 하고 답하였다.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한 손권은 <나는 싸우고 싶다. 그러나 승산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유비도 당양에서 패한 것이 아닌가?> 그에 공명은 설득력 있는 변설로 상황을 분석하였다.

<유비는 패했다고 하지만 아직 1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조조군은 스스로 100만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다 모아서 12만 정도입니다. 그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형주(荊州) 병은 항복한 병졸로 사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북방의 병사는 피곤한데다가 익숙하지 않은 환경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자가 많을 것이니 승산이 있습니다.>.

이 말에 격려되어서 손권은 개전을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주유(周瑜)가 이끄는 손권의 수군 3만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유비와 합류하고 다시 서진하여 조조군의 수군기지 강릉(江陵)을 목표로 나갔다.

조조는 손권이 무혈 항복할 것으로 믿어 그에 대한 대응은 뒤로 미루고 있었다. 서둘러서 수군이 장강을 내려갔는데 병의 다수가 풍토병에 걸려서 사기가 현저히 떨어졌다. 게다가 원래 수상전에는 서툴렀다.

양 수군은 강하(江夏)와 강릉(江陵)의 중간 지점에서 조우하였다. 서전에서 손권군이 승리하여 패한 조조군은 장강 북안의 오림(烏林)으로 도망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손권군은 남안의 적벽(赤壁)에 포진하여 전국은 장기전이 되었다.

이윽고 주유(周瑜)는 부장의 헌책을 수용하여 적 수군에게 화공(火攻)을 감행하였다. 황개(黃蓋)가 이끄는 거짓 항복 선단은 조조군의 품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일제히 불을 질러서 돌격하였다. 마침 남풍이 불어서 불꽃은 점점 격해지고 주력함대를 소실당한 조조는 전의를 잃고 북방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이 싸움의 주역은 손권의 주유(周瑜) 제독이다. 유비와 공명은 뒤에서 관망하다가 조조를 추격하기는 하였으나 조조군이 도망이 빨랐기 때문에 따라잡지 못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장면을 멋지게 보이기 위하여 공명은 천재적인 지모로 조조나 주유를 희롱하고 화공에서는 마법을 써서 풍향을 바꾸게 하였다. 또 유비와 관우는 도망치는 조조군을 크게 괴롭힌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이다.

 

2. 형주(荊州) 영유

 

조조를 북방으로 쫓아낸 주유(周瑜)의 군세는 그 세에 편승하여 형주를 공략했다. 그러나 강릉(江陵)을 지키는 조인(曺仁=조조의 종형제)이 저지로 1년간이나 공방전으로 보냈다. 그 사이에 형주 남부(호남성)에 건너간 유비는 상대적으로 방비가 약한 이 지역을 전격적으로 정복하고 말았다.

<천하 2분의 계>를 목표한 주유는 유비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걱정하여 간신히 점령한 강릉에 주저앉아서 유비를 견제하였다. 그러면서 주유는 서방 익주(益州)(사천성)를 침공할 것을 모색하였다.

이대로는 <천하 3분의 계>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마음이 초초해진 유비와 공명은 노숙(魯肅)을 통하여 손권을 움직여서 정치력 강화에 힘썼다. 우선은 손권의 누이를 유비의 정처로 맞아들여 동맹관계를 보강하였다. 다시 유비 자신이 손권의 본거지에 들어가서 형주 전토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이때 유비가 손권의 영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중신들이 다수가 반대하였다.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도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은 공명이었다. 그는 관리에 밝은 사람이니까 위험성을 경감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손권의 영에 들어갔다. 그는 물론 노숙의 조력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회견은 성공하여 손권은 주유가 점령한 남부(강릉 주변)를 유비에게 대여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 무렵 손권은 조조의 설욕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적벽전>의 성과는 모두 유비의 손에 넘어갔다. 형주북부는 아직도 조조의 휘하에 있었다고 해도 이제 유비는 장강유역에서 호남성 전토에 걸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내정을 총괄한 것은 공명이었다. 그는 그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유비군의 재정력과 군사력 강화에 크게 공헌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 인맥을 이용하여 재야의 유능한 인재를 유비진영으로 초청했다. 마량(馬良), 장완(蔣琬), 요립(寥立) 등이 산하에 들어온 것은 이 때이다. 공명은 초능력을 가진 관리본부장이었던 것이다.

이에 격노한 것이 주유(周瑜)이다. 그는 유비의 세력이 굳어지기 전에 익주(益州)를 침공하려고 생각했었는데 그 기획이 절반 상태에서 병몰하였다. 향년 38세였다. 이것은 마치 유비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주유가 죽은 후 손권(孫權)의 영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친유비파의 노숙(魯肅)이었다. 이리하여 유비는 <천하삼분의 계>의 실현에 완전히 실권을 잡았다.

<연의>에서는 저간의 정세를 <공명과 주유의 지모전(智謀戰)>이라는 주제로 설명하고 있다. 주유는 몇 번이나 유비를 덫에 걸어 죽이려 하였다. 예를 들면 손권의 누이를 유비에게 시집가게 하는 것은 주유가 유비를 오나라에 유치하여 말살하려고 하는 모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략을 번번이 알아차린 공명에 의하여 계략이 좌절당한 주유는 <어찌하여 하늘은 이 세상에 나와 동시에 공명을 낳게 하였는가?>하고 비통한 절규와 피를 토하여 죽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창작이다. 주유와 공명 사이에 다툼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3, 촉(蜀)을 점령하다

 

이윽고 북방의 조조는 대군을 연마시켜 합비(合肥) 방면(安徽省)에서 손권에 대한 설욕전에 도전하였다. 다시 유비는 어부의 이를 취할 수 있는 정세에 직면하였다.

그는 익주(益州) (장관) 유장(劉璋)의 초청을 받아 사천(四川) 분지에 들어갔다. 유장은 북방의 한중(漢中)에 위치하는 장로(張魯)의 세력과 적대 관계에 있었으므로 유비로 하여금 이곳을 공략해주기 바랐다. 그는 유비에 대하여 옛날처럼 용병대장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이빨을 드러낸 유비는 갑자기 유장(劉璋)을 공격하였다. 형주(荊州)에서는 장비(張飛) 조운(趙雲) 공명의 원군이 달려온다. 다시 북방 양주(凉州)에서는 금장군(錦將軍)이라고 일컬어지는 군웅 마초(馬超)가 조조에게 쫓기어 도망치던 차에 유비군에 합류하였다.

그래서 3년에 걸친 공방전에서 마침내 성도(成都)는 항복 개성하였다. 이리하여 유비는 형주에 더해서 익주(益州)를 영유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천하삼분의 계>의 제1단계는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열한 행동은 주위의 의혹과 분노와 질투를 부르는 것이다.

손권은 원래 유비와 합력하여 익주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주유(周瑜)가 죽은 후 유비 쪽에서 그 안을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권이 조조에 구속되어 있는 사이에 유비는 처남에게 아무런 의논도 없이 제 마음 대로 익주를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손권은 격노하여 형주에 남아있던 누이(유비의 부인)에게 밀사를 보내어 그녀를 고국으로 데리고 와버렸다. 이로써 손권과 유비의 밀월은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유비는 손권의 분노를 달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윽고 치명적인 파국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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