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촉한의 암운(1)
1, 형주(荊州) 함락
한중전에서 패한 조조는 역경에 잠기었다. 유비한테 주력을 격파당하여 그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또 형주의 관우의 맹공으로 조인(曺仁)의 형주수비대는 쫓겨서 번성(樊城/襄樊市)으로 몰렸다.
초조해진 조조는 손에 남은 최후의 예비군을 내었지만 우금(于禁) 장군 휘하의 구원군은 번성 교외에서 철포수(鐵砲水)의 습격을 당하고 게다가 거기에 급습을 가한 관우군에 의하여 전멸 당하였다. 이 철포수는 관우의 물 공격이었는지 모른다.
번성 자체도 홍수로 성내의 사기는 떨어졌다. 수군을 조종하는 관우의 공격의 고리가 그것을 엄하게 조였다.
이 정세 앞에서 형주 북부에서 차례차례로 호족이나 협객의 반란이 일어나 약해진 조조는 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조조 정권 최대의 위기였다. 번성(樊城)이 함락되면 관우의 저지는 없어진다. 그것을 아는 조인(曺仁)은 필사적으로 이 성을 수호하였다.
혹시 촉나라 유비가 정예부대를 출격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당시 최후의 예비대를 써버린 조조의 저항력은 매우 빈약했다. 사람이 없는 들판을 가듯이 쾌속으로 진격한 후 유비에 의한 천하통일이 이루어졌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유비도 승리하였다고 해도 한중(漢中) 전에서 국력을 초월한 무리한 동원으로 물자를 다 써버렸다. 성도(成都)에 돌아온 그는 공명과 함께 내정 정비에 진력하여 국력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저히 관우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이에 결정권을 잡은 것은 손권(孫權)이었다.
손권은 그 2년 전 싸움에서 조조와 대결하여 열세가 되었기 때문에 명목상 조조에게 항복해버렸다. 그런 때문에 관우에게 협력하기 어려운 심리적 상태에 놓인 것이다.
물론 조정 회의에서는 관우에게 호응하여 북방 서주(徐州)를 탈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윽고 <조조와 동맹하여 형주(荊州)를 쳐야 한다.>고 하는 전혀 역으로의 전략이 떠오른 것이다. 이 논의의 중심이 된 것은 부장인 여몽(呂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년 전 노숙(魯肅)이 병사했다는 것이다. 만일 친유파인 노숙이 살아있다면 여몽(呂蒙)의 전략은 즉시 부정되었을 것이다. 여몽은 오래 전부터 <형주는 손권이 영유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조조와 손권의 비밀 동맹이 맺어졌다.
관우는 손권의 동향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충분한 수비대를 거점에 남겨두었고 봉화대를 구축하여 손권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조직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권이 걸어온 <대유강경파인 여몽을 병으로 정양시키고 온건파인 육손(陸遜)과 교대시킨다.>는 모략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리하여 손권의 기운을 빼앗은 그는 번성(樊城)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으므로 조금씩 수비대를 전선으로 내보냈다.
병으로 정양하고 있을 여몽은 형주가 매우 방비가 허술함을 알고 초병을 암살하고 봉화대를 무효화시키고 3만의 대군으로 강릉(江陵)으로 습격하였다. 이것은 완전한 기습으로 본래의 수비대는 어이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형주의 유비의 거점은 거의 무혈로 손권의 손안에 들었다.
순간에 후방의 보급거점을 잃은 관우에게는 이미 교전 능력이 없었다. 서둘러서 남으로 돌아가려 한 그는 손권이 배신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강릉의 여몽(呂蒙)에게 <어떤 일인지>하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손권은 출병하여 관우를 치려하였다. 가족을 인질처럼 잡히고 보급도 끊기어 사기가 떨어진 관우군 장병에게는 전의가 없었다. 겨우 남은 병사들과 함께 촉나라로 도망치려한 관우는 대기하고 있던 손권군에 잡혀 참수 당하였다. 그래서 천하삼분의 계는 붕괴되고 말았다.
형주의 함락에 대해서는 종종 관우의 오만한 성격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관우는 <연의>에서는 <덕성이 넘치는 의인>이라고 그려져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사>를 보면 오만하고 자의식 과잉의 인격임을 엿볼 수가 있다. 곧 여몽의 기습을 앞두고 강릉이 어이없이 열어버린 배경에는 관우의 인망이 없음을 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결과론으로서 관우가 처한 입장에서는 그는 매우 잘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2만 정도의 원정군밖에 움직이지 않았으나 조조를 끝까지 쫓고 있으니까 말이다.
2. 한제국(漢帝國)의 멸망
관우가 횡사한 후 오나라의 여몽(呂蒙)과 그 부장 손문(孫紋)이 이어서 병사하였다. 다시 위나라의 조조마저 병사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관우의 원령이 한 짓이다.>라 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조조의 사후 후계자가 된 조비(曺丕)는 조조가 허수아비로 취급했던 한제국 황제를 협박하여 서기 220년 10월에 제위를 선양받았다. 소위 <선양혁명(禪讓革命)>이다. 이리하여 한제국은 400년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조씨 일족으로 된 위(魏) 제국이 발족되었다.
이는 유비 정권으로서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원래 유비는 한실(漢室)의 연줄을 걸어서 <한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하였었는데 한제국이 멸망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마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유비가 채용한 수단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곧 <한제국은 멸망한 것이 아니다. 황실의 피를 받은 내가 계승한 것이다.> 라는 것으로 하여 당초의 슬로건을 계속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중국에 두 사람의 황제가 서는 이상한 상태가 출현한 것이다.(221년 4월) 사천성만을 영유한 이 신 국가의 국호는 물론 한(漢)이다. 동시대 사람은 <계한(季漢=말자의 한나라)>이라고 부른 듯하나 앞으로는 촉한(蜀漢)이라 하기로 한다.
이 때 공명은 군수장군에서 승상(국무총리)으로 승진하였다. 이 나라의 목적은 역적인 위(魏) 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한나라로 재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새 황제인 유비의 최초의 계획은 <오나라와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관우의 원수 갚기>를 높이 부르짖었다.
부장인 조운(趙雲) 등은 <역적은 오나라가 아니고 제위를 찬탈한 위(魏)나라이니까 먼저 위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유비가 직접 지휘하는 4만의 군사가 장강을 내려갔다.(221년 7월) 이는 곧 <이릉(夷陵)의 싸움>의 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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