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유비(劉備)의 죽음과 남만정벌(南蠻征伐)
1, 유비의 죽음
백제성(白帝城)으로 도망친 유비는 오(吳) 나라의 추격을 각오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찾아온 것은 화평을 바라는 사자였다. 너덜너덜해진 유비는 이에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와 화목을 성공시킨 손권(孫權)은 공연히 위(魏) 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형주(荊州)에 파견되어 있었던 육손(陸遜)의 대군을 전속력으로 전진시키자 이것을 남하하는 위군(魏軍)과 충돌한 것이다. 실로 교묘한 외교전이다. 조비(曹丕)는 격노하여 20만이라는 대군을 오나라로 향하게 하였으나 사기가 오르는 오나라 군 앞에서 큰 고전에 빠지고, 이윽고 군중에 역병이 만연한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총퇴각하였다. 삼국정립의 정치정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유비는 백제성에서 위독해졌다. 패전의 실의에 빠진 것일까 부재중이던 국내에는 황제의 대패를 안 촉(蜀) 나라 호족들이 차례차례로 반기를 들어 성도(成都)의 태자 유선(劉禪)과 공명은 그 대응에 쫓기어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나 공명은 주군의 용태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서둘러 백제성으로 향했다.
병상의 유비는 공명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자네의 재능은 조비(曹丕)의 10배나 한다. 그 수완이 있다면 촉(蜀)나라를 평정할 뿐 아니라 반드시 중원 회복에 성공할 것이다. 내가 죽은 후 태자인 유선(劉禪)에게 군주의 자격이 있다면 이를 보좌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도저히 그 자격이 없다면 염려하지 말고 자네가 그 지위에 취임하기 바란다.>
내가 아는 한 역사상 신하에게 공공연한 찬탈을 권한 군주는 유비 이외에는 없다. 유비란 인물은 황제라는 지위에 오르면서도 사업이라는 것은 재능이 있는 자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명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주군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여 이렇게 답하였다.
<신은 매우 미력이지만 죽을힘으로 충절을 다하기에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실한 공명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분골쇄신한다.
유비라는 인물은 그의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분명히 조조(曹操)나 손권(孫權)보다 아래다. 그러나 사람을 심복시키는 불가사의한 덕을 가진 자였다. 그러기에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같은 호걸들이나 공명이나 법정(法正) 같은 지혜로운 자들이 목숨을 다하였다.
그런 유비의 사람됨 됨을 알게 하는 문장이 있다. 태자 유선(劉禪)에게 준 유언장이다.
<최초에는 가장 낮은 설사였는데, 다른 병이 병발하여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는 듯하다. 인간 50이 되면 젊어서 죽었다 하지 않고 이제 60이 남으니 한스러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단지 너희들 형제의 일이 걱정이다.
승상(공명)에 따르면 너의 지력은 매우 크고 진보는 기대 이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참이라면 내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 노력하라. 노력하라. 나쁜 일(惡事)는 작은 일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 좋은 일(善事)은 소선이라도 행하라. 단지 현명함과 덕만이 사람을 심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덕이 엷어서 본 봐서는 안 된다. 한서(漢書)와 예기(禮記)를 읽고 여가가 생기면 제자(諸子)와 육도(六韜) 상군서(商君書)를 읽어서 지혜를 키우도록 하라.>
신황제 유선(劉禪)은 약관 17세였다. 국가의 중책은 이제는 승상 공명의 두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2, 정의론(正議論)
유비가 죽은 후의 천하를 개관해본다.
유비란 사람은 존재 자체가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참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싶어서 대공세를 계속하여 조조, 조비(曹操, 曹丕)와 손권(孫權)과 부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유비가 죽었으니 적수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특히 魏(위)는 蜀漢(촉한)에서 유능한 인재는 유비와 關羽(관우) 뿐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미칠 듯이 기뻐하였다. 위나라의 군신들은 촉한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올 것으로 생각했는지 연명으로 공명에게로 항복을 권고하였다. 실제 촉한에는 유군 유선(劉禪)과 관리본부장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공명은 단호히 이를 물리쳤다. 거꾸로 <정의론(正議論)>이라는 문장을 써서 위나라에 보냈다. 그는 그 문장 중에서 <한왕조(漢王朝) 부흥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결의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뇌리에는 유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위(魏)는 이 정세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 아무튼 촉한(蜀漢)은 산간의 작은 나라이니까 방치해 두어도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조비(曹丕)는 그 주력을 오(吳) 나라 토벌에 향했다.
한편 오(吳) 나라도 촉한을 무시하고 있었다. 손권(孫權)도 유비(劉備)가 죽은 시점에서 촉한은 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전군을 위(魏) 나라와의 싸움에 주입하였다. 장강을 천연의 방벽으로 하여 위나라의 침공을 계속하여 막은 것이다.
조비(曹丕)는 대 선단으로 침공하는데 그 때마다 지리(地利)를 얻은 오군에 격퇴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장강은 대지를 둘로 나누는 구나.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윽고 삼국정립(三國鼎立)은 소강상태를 맞는다.
위(魏) 나라는 조조(曹操) 이래의 구조 개혁이 완전히 성공하여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기에 들었다. 그렇다면 위험성이 많은 원정은 필요하지 않다. 조비(曹丕)군이 오(吳) 나라를 패하게 하지 못한 것은 장군이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인구도 증가한 모양인데 당초에는 5백만 밖에 안 되었는데 최성기에는 2천 만을 넘었다고 생각된다. 원래 위(魏) 나라는 생산력이 높은 중원(황하유역)을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경제가 안정되면 인구의 증가도 빨라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오(吳) 나라와 촉(蜀) 나라의 인구는 각각 2백만과 90만인 채로 안정기로 옮아간 듯하다. 안정적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아도 위나라와의 국력의 차는 가속도적으로 벌어져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인구= 국력이다.
오(吳)와 촉(蜀)은 이 정세에 크게 애를 태웠다. 그들이 취한 방책은 ①동맹관계를 강화한다. ②남방의 이민족을 식민화하여 착취한다. 는 등이 2 가지이다.
손권(孫權)이 타이완이나 일본에 대 선단을 보내어 주민을 오나라에 강제 이주 시키려 한 것도 이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는 어떻든 인구를 늘리고 싶었던 것이다. 단지 그 장거는 선단 내부에 역병이 유행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지만. 손권은 최종적으로는 베트남 북부까지 병력을 보내어 이 땅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시작하였다. 촉한(蜀漢)에서도 공명의 남만정벌로 그 영토는 미얀마 동북부까지 미쳤다.
오나라와 촉한은 어떻든 연합하여 위나라와 싸울 태세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시작한 것이 소위 <북벌(北伐)>이었다.
3, 남만정벌(南蠻征伐)
<연의(演義)>에서의 칠금칠방(七擒七放)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이 촉(蜀)을 정복하려고 거병하자 그에 호응해서 익주(益州) 남부의 호족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공명은 스스로 조운(趙雲)이나 위연(魏延)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원정하여 먼저 반란 호족들을 교묘한 책략으로 이간시킨 뒤에 타도하였다. 그대로 군대를 남만으로 진공하여 맹획에게 결전으로 도전하였다.
맹획은 부족을 이끌고 공명을 맞아 싸우지만 패하여 포로가 된다. 공명이 <어떤가? 우리 군대는 강하지?>라고 말하자 맹획은 <이번은 졌다. 다시 한 번 한다면 내가 이긴다!>하고 답하므로 공명은 그를 석방해주었다. 맹획은 몇 번이나 부족을 이끌고 역습을 꾀하였으나 족족 공명(孔明)의 군략에 희롱당하여 포로가 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남만왕 맹획을 놓아주었다.
원정군은 도망치는 맹획을 쫓아 오지로 진군한다. 독이 충만한 늪을 넘어 맹수를 스스로 다루는 만족을 로봇 맹수군단으로 무너뜨리고 칡넝쿨로 만든 갑옷을 입은 만족을 화공으로 불태운다. 맹획은 마침내 일곱 번째 포로가 되었을 때 완전히 굴복하여 마음으로부터 공명에게 신하로 복종할 것을 맹세하였다. 소위 <칠금칠방(七擒七放)>이다.
남만정벌에 관한 기술은 <정사(正史)>에서는 <제갈량(諸葛亮) 전>에 한 줄밖에 없다.
<남중(南中)에 군을 이끌고 반년으로 평정하였다.>고 하는 기록밖에 없다.
공명의 남정을 개관하면 그것은 요컨대 <반란의 평정> 사업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릉(吏陵) 대패와 유비의 죽음을 당하여 촉(蜀) 각지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촉한(蜀漢)을 버리려 한 것이었다. 유선(劉禪)과 공명(孔明)은 대책에 진력하여 이 중에서 성도(成都) 근교의 황원(黃元)의 반란만은 신속히 평정하였는데 남중이라 하는 익주(益州) 남부의 반란은 대규모라서 손을 쓰지 못하고 그런 대로 3년간이나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공명이 3년간이나 반란을 방치한 이유는 이릉(吏陵)의 싸움에서 촉한(蜀漢)의 군사력이 괴멸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나라와의 외교 관계에도 있다. 실은 남중(南中)의 반란호족들은 손권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수인 반란군을 공격하면 손권이 개입할 구실을 주게 되므로 외교상 서투른 일이 된다.
그래서 공명은 자주 오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여러 가지의 수단으로 외교관계의 강화에 노력한다. 이윽고 손권은 겨우 공명을 신뢰하여 남중정세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준 것이다.
그 사이에 새로 모집한 병사의 훈련도 끝났다. 공명은 이 신병들의 실지 훈련을 겸해서 남중 원정을 개시한 것이다. 아니 이것은 공명 자신의 훈련이기도 하였다. <정사>의 공명은 이 싸움이 초진(初陣)이었으니까.
고립한 호족들(옹개(雍闓), 주포(朱褒), 고정원(高定元)은 금방 평정되어 참수 당하였다. 또 이 호족들과 관계를 가졌던 남만부족들도 진무(鎭撫) 평정되었다.
남만이라고 하면 무섭지만 실제로는 산지에 사는 소수민족이었던 것이다.
맹획(孟獲)이라 함은 이런 소수민족의 족장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칠금칠방>이라는 것은 공명의 공적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촉한(蜀漢) 정부가 임의로 한 선전이었다.
재미가 있는 것은 남만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어서 이에 따르면 <맹획(孟獲)이 <공명을 7번 붙잡아서 7번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촉한 정부가 마음대로 선전함에 분노한 소수민족들이 대항하여 이런 이야기를 만든 것일 것이다.
이처럼 소수민족을 식민지화한 촉한은 여기서 착취한 자원을 가지고 북벌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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