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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항공우주국 아폴로 11호 달착륙 50주년 회고록

간천(澗泉) naganchun 2019. 7. 12. 18:58

 

 

 

인류로서 위대한 비약

미항공우주국 아폴로 11호 달착륙 50주년 회고록

 

아폴로 11호 탑승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 마이켈 코린스,에드윈 올드린   

 

우리 시간으로 721일은 인류사상 위대한 비약을 성취한 미국 항공우주국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달착륙선 착륙하기까지

 

(AFP) 미우주선 아포로 11호의 달 여행은 최초 4일간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는데, 달 표면 착륙까지는 겨우 20분 시점에서 문제가 차례차례로 발생하여 상황은 일시에 긴박해졌다.

1969720일 세계가 아포로 11호의 여행의 진전을 보고 있는 가운데 미국 휴스턴의 지상 관제센터와의 무선연락이 단시간 끊기었다. 그래서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선장이 탑승하고 에드윈 올드린(Edwin Aldrin) 우주비행사의 조종으로 하강 중이었던 달착륙선 <이글> 내에 경보 벨이 울렸다.

2시간 전에 <이글>을 떨어놓은 아포로 11호 우주선의 주요부분인 사령선 <골롬비아>에는 세 번째의 우주비행사 마이켈 콜린스(Michael Collins)씨가 남아서 달 주회궤도상에 멈추어있었다.

암스트롱 선장은 관제센터에 <프로그램 경보 “1202”에 대해서 가르쳐다오>하고 무선 연락했다. 그러자 관제센터에서는 착륙을 속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관제측은 <이글>의 탑재 컴퓨터가 오버프로(Overflow) 를 일으키고 있지만 시스템은 모두 정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글>의 아래로 보이는 달의 크레터(crater)가 고속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빠르다. 하고 암스트롱 선장은 눈치 챘다. 이 속도로는 착륙 예정지를 몇 킬로나 지나쳐버리고 만다.

암스트롱 선장은 수동제어로 바꾸어 선창으로 새로운 착륙지를 찾았다. 그러나 완벽한 장소를 찾기는 어려워서 착륙 공간이 좁아지는 것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위투성이인 지역이다.> 하고 올드린 비행사에게 알린다. 올드린 비행사는 속도와 고도의 수치를 컴퓨터에서 읽어내어 암스트롱 선장에게 전한다.

그 사이 연료는 급속히 잔량이 적어졌다. 관제센터는 연료가 귀환할 분량뿐이라는 것을 알리는 <빙고콜>이 우릴 때까지의 나머지 초수를 알려주었다. <빙고콜>이 울려서 20초 이내에 <이글>은 착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미션은 중지가 된다. <빙고콜>까지 나머지 30초였다.

암스트롱 선장은 조용히 집중하면서 스스로의 전 경험을 불러 일으켜 세웠다.

<이글>이 달 표면에 정지한다. <접지 램프, 점등>이라고 올드윈 비행사이다. 착륙선의 다리 부분에 있는 센서의 하나가 달 표면에 접촉한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엔진이 끊겼다.

<휴스톤, 여기는 고요한 바다기지이다. 이글은 착륙하였다.>하고 암스트롱 선장은 알렸다.

 

나치스 로켓 전문가

 

기록에 의하면 아포로 계획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4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공헌도의 크기로는 두 사람의 인물이 빼어났다.

1961년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린든 존슨 부통령에게 우주개발에서 소련에 앞서야 한다고 요청했다. 존슨 부통령은 미항공우주국(NASA)의 우주계획의 창시자 베르나 폰 브라운(Wernher Magnus Maximilian Freiherr von Braun, 19123231977616)씨에게 도움을 구했다.

일찍이 나치스 독일 시대에 나치스 당원이었던 브라운씨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런던 폭격에 사용되었던 V2로켓을 개발하였다.

전쟁 말기 미군에 투항한 브라운씨는 자신이 이끄는 최고수준의 기술자 100명의 팀과 함께 비밀 <패퍼클리프 작전(Operation Paperclip)>의 일환으로 미국 앨러버마주에 이송되었다.

브라운씨는 존슨부통령에 대하여 미국은 크게 늦어졌지만 대형 발사로켓의 개발에 이제 곧 달려든다면 소련에 앞서서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케네디대통령은 그 해안으로 의회연설에서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켜 안전하게 지구에 귀환시킨다.>고 하는 유명한 선언을 하게 되었다.

8년 후 리차드 닉슨 대통령시대에 그 목표는 달성되었다. 국가적 노력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폴로계획(Apollo program insignia)에 대하여 미국 의회가 거의 무제한이라고 할 수 있는 예산을 인정한 덕분에 만사가 신속히 진행되었다. 196810월부터 19695월까지에 걸쳐서 4회의 시험 임무가 실시되었다. 암스트롱 선장은 19681211번째의 임무(mission=임무)를 지휘하기 위하여 선임되었다.

아토로 11호의 발사까지 나머지 수개월의 시점에서 암스트롱 선장은 올드린 비행사에게 선장의 특권으로 자신이 최초로 달 표면에 내리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올드린 비행사는 후에 그의 자전 중에서 <나는 그로부터 수일간 침묵을 지켰다. 그 동안 줄곧 니르 (암스트롱 선장)에 대하여 화를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결국 그는 선장이고 곧 직장의 상사였다.>

 

달 표면에로의 일보

 

 

달표면에 꽂힌 성조기    

 

1969716일 수요일, 브라운씨가 설계한 초거대로켓이 최상부에 우주선 아포로11호를 탑재하여 쏘아 올려졌다. 케이프 케나베럴 공군기지의 대안에 있는 비치에는 100만 명의 사람이 구경하기 위하여 모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첫 시험으로 달 표면 착륙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암스트롱 선장 자신도 <자신의 직감으로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이 90%인가 그 이상인가. 착륙 성공 확률은 50%라고 믿고 있었다.>1999년에 밝혔다.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 선장은 달착륙선 <이글>의 사다리를 타고 달 표면에 내릴 때 <이글>의 다리 부분의 밑의 평평한 부분이 지면에 수 센티쯤 밖에 빠지지 않아서 달 표면이 가는 입자로 덮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하였다. <마치 가루와 같다.>고 암 스트롱씨는 후에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좋아. 그러면 지금부터 착륙선에서 내린다.>하고 무선으로 연락했다. 한 숨 쉬고서 저 불후의 명언을 말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로서는 위대한 비약이다.>

암 스트롱씨에 따르면 이것은 대본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고 한다. 미항공우주국이 2001년에 녹음한 구술사 중에서 <착륙 후에 생각났다.>고 말하고 있다.

가까이에서 본 달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달의 빛깔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차색에서 회색, 그리고 칠흑으로 변화한다. 또 지구보다 중력이 작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 에드윈 올드린 씨는 <조금 조깅을 해보았는데 느릿느릿한 달리기로 스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두 다리가 공중에 뜬 상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2009년의 저작에 적고 있다.

2시간 반에 걸친 선외활동으로 암 스트롱 선장은 대량의 달의 돌을 주워 모아 사진촬영을 했다. 올드린 비행사는 지진계와 기타 과학측정기기 2대를 설치하였다. 남겨진 흑백사진 857, 컬러사진 550장 속에 암 스트롱 선장이 찍은 것은 4장뿐이다. 태반은 올드린 비행사의 사진이다.

두 사람은 달 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취한 소련(당시) 유리 가가린 비행사의 기념메달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달에 남겼다.

 

지구에로의 귀환

 

달을 출발하기 직전 우주비행사들은 먼지투성이였다. 암 스트롱씨는 <나의 감각으로는 난로의 습한 재와 같은 냄새가 났다.>고 조종석에서의 인상을 설명하고 있다.

세 사람 째인 우주비행사 마이켈 콜린스 씨는 22시간 궤도상에 대기하고 있었다. 콜린스씨는 후에 <내가 살그머니 무서워한 것은 두 사람을 달에 남긴 채로 혼자서 지구로 귀환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고 미션 개시의 반년 정도 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다.

다행히도 달 표면 착륙선의 엔진은 정상으로 작동하였다. 사령선 콜롬비아와 재 도킹해서 세 사람은 긴 귀도에 올랐다.

미션이 끝나기 가까워지자 콜롬비아는 여분의 착륙선이나 기계선, 연료를 떨어내고 총중량 겨우 5550 킬로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풀 장치의 사탄 로켓의 쏘아올린 중량의 0.2%에 상당한다. 

724일 콜롬비아는 대기권에 돌입하였다. 얼마간 공중에서 불덩이가 된 후 세 개의 낙하산이 열리고 무사히 태평양에 착수하였다. 미국은 콜롬비아와 우주비행사를 회수하기 위하여 항공모함을 파견하였다. 이 배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당시)도 승선하고 있었다.

달 여행을 끝낸 세 사람을 항공모함에 옮기기 위해서 정예의 다이버 팀이 콜롬비아로 향하였다. 우주비행사들은 전원 무사했으나 주위에는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고 한다.

당시 우주비행사 등이 지구 외의 미생물로 오염되었을 것으로 걱정한 때문에 세 사람은 곧 격리시설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3주 후에 귀환 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미 세계적인 영웅이 된 세 사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달에 가고 싶으냐고 하는 질문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누구 한 사람도 우주로 다시 가지는 않았다.

11호 이후 다시 6회의 미션이 행해졌다. 그래서 1972년 아폴로계획은 종료하였다. 미국이 다시 달을 목표로 한 결정을 내린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발족해서이다. 아르테미스계획(Artemis)이라는 새로운 유인 월면 착륙계획이란 명칭은 그리스 신화의 신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와 관계가 있다.

출처=https://www.afpbb.com/articles (2019. 7. 12 마이니치신문)

 * 사진은 위키페디아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