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맹자와 '맹자' 이야기
3-1, 위(魏)나라에서
1), 양혜왕(梁惠王)을 알현하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대양의 궁전의 널은 대전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상위인 옥좌에는 혜왕이 천천히 좌정하였다. 그리고 좌우에는 백관이 도열하여 이제 등장할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기대를 가지고 열좌하고 있었다. 이윽고 안내인의 안내를 받으며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 중앙 자리에 앉았다. 맹자이다. 이 자리에서는 종종 이러한 정경이 전개되었다. 야심가이며 중원 제후들 중에 가장 먼저 왕을 참칭한 양혜왕(梁惠王)은 유세가를 좋아하고 이 자리에서 인견한 사람 수는 꽤나 많았다.
양혜왕이 말하였다.
“선생은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않고 잘 와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많은 현인, 지자가 내방하여 각각 우리나라에 유리한 정책을 말해주었습니다. 선생도 우리나라에 이익을 꾀해 주시겠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맹자는 정열적으로 대답했다.
“임금님, 이익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의(仁義)입니다. 임금님은 임금님으로서 어떻게 하면 국가의 이익을 올릴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대부는 대부대로 일가의 이익을 생각하고, 신분이 낮은 관리나 서민은 그들 나름대로 일신의 이익에 집착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처럼 위로는 임금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노라면 반드시 하극상의 풍조가 생겨서 탈취하고 시해하는 화가 생겨 국가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반드시 천승의 봉록을 받고 있는 공경이고,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백승의 봉록을 받고 있는 대부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천승의 봉록을 받고, 천승의 나라에서 백승의 봉록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좋은 대우를 받는 것으로 부족함을 말할 형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의(仁義)를 이차로 하여 이익만을 존중하고 있다면 무엇이거나 빼앗지 않으면 만족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인의를 존중하는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유사 이래 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어버이를 내버린 일은 없습니다.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군주를 가볍게 보는 일은 없습니다. 임금님 인의만이 분제입니다. 이익 등은 지엽적인 일입니다.”(양혜왕장구상1)
2) 설욕과 패자의 꿈
말을 마치고 난 맹자의 얼굴에는 정성스러운 빛이 넘친다. 단 인의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다. 그 신조를 먼저 첫째로 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혜왕의 마음에 드는 해답은 아니었다. 양혜왕이 바라는 것은 영토를 확장하고 인구를 늘릴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이었다.
야심가이기도 한 양혜왕은 지금까지 이웃하는 나라와의 사이에 세력 확장을 위한 다툼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실패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통탄스러운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 마릉(馬陵)의 패전
이것은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양혜왕은 BC339년 조(趙)나라와 잘 외교를 하여 한(韓)나라를 침공했다. 곧 태자 신(申)을 상장군으로 하고 위(魏)나라 제일의 병법가인 방연(龐涓)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대군을 조직하여 한꺼번에 한나라를 섬멸하려 했다. 한나라는 그 위기를 제(齊)나라에 알렸다. 제나라는 용장 전기(田忌)를 장군으로 하여 <손오(孫吳)의 병법(兵法)>으로 유명한 손빈(孫臏)을 참모로 하여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전기(田忌)는 손빈의 술책을 바탕으로 하여 직접 위나라로 진군했다. 나라가 위태로워진 위나라의 태자 신(申)과 방연(龐涓)은 한나라의 포위를 풀고 급히 군대의 진로를 바꾸어 제나라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손빈의 책략에 의하여 배치된 복병 때문에 마릉(馬陵)에서 대패를 당하였다. 방연은 전사하고 태자 신(申)은 포로가 되었다. 위나라의 국운은 기울어졌다.
* 진(秦)나라 상앙(商鞅)에 패하다.
마릉의 대패가 있었던 이듬해(BC340)의 일이다. 그 때는 진나라 효공(孝公)의 시대로 일세의 영웅인 상앙(商鞅)이 진나라의 재상이었는데,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천자각박(天資刻薄)한 사람>이라고 칭한 바 있는 상앙의 냉철한 눈은 마릉에서 패한 위나라의 피폐상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위나라를 칠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위나라를 치면 위나라는 우리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여 반드시 동쪽으로 천도를 할 것입니다. 위나라가 동쪽으로 천도를 하면 우리 진나라는 산하의 요새를 우리의 것으로 하여 다시 동방을 향하여 제후를 제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효공에게 진언한 상앙은 스스로 군을 지휘하여 전지에 나섰다.
위나라 혜왕은 공자 공(邛)을 장군으로 하고 진나라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백면 귀공자가 산전수전을 거친 상앙을 대적할 수는 없었다. 공자 공(邛)은 포로가 되고 위나라 군대는 참패를 당하였다. 그리고 국도인 안읍(安邑=산서성하현, 안읍현/山西省夏縣, 安邑縣)이 진나라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므로 혜왕은 하는 수 없이 도읍을 멀리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천도했다.
상앙(商鞅)은 젊은 시절에는 위(魏)나라의 녹을 먹던 사람이다. 혜왕이 측근이었던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병이 들어 죽어가면서
“나의 후임에는 상앙을 등용해 주십시오. 아직은 젊지만 대단한 영재입니다. 만일 그를 등용하실 생각이 없다면 죽여 버리십시오. 실수로라도 그를 타국으로 도망치지는 못하게 하십시오.”하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혜왕은 그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아 그때 공숙좌의 유언을 들었어야 했는데.”하고 혜왕은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생각해보면 그 일은 양혜왕이 젊었을 때 일이지만 잊으려야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후 양혜왕은 어떻게든지 해서 실지를 회복하고 인구를 늘릴 수는 없을까 하고, 또 보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인가 하고 노리고 있었다. 이제 현인이 온다고 하므로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이 맹자라는 사람은 <문제는 인의(仁義)뿐이다.>라고 묘한 소리만 하는 것이다.
이 격변하는 정세 하에서 그의 말에서 은근히 밀려드는 압력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이분이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가. 더 분명하게 이쪽의 희망을 말해보자.
“우리 위나라가 춘추시대의 패자였던 진(晉)나라의 정통성을 승계한 나라라는 것은 선생도 알고 있을 것이오. 곧 우리나라는 빛나는 역사를 가진 나라요. 그런데 과인이 대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제(齊)나라에 패하여 장자가 죽었고 서쪽으로는 진(秦)나라의 침공을 받아 7백리에 달하는 영토를 잃어버렸소. 또 남쪽으로는 초(楚)나라에 패전 당할 우려를 안고 있소. 이미 우리나라에는 옛날의 광영은 없소. 과인은 항상 이 일들을 부끄럽게 여겨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 나라에 보복하려고 생각하고 있소. 보복하는 것이 영광을 도로 찾고 또 그 전쟁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어떻게 하면 이 소원을 실현할 수가 있을까요?”(양혜왕장구상5)
3) 인자무적
맹자가 말하였다.
“임금님 군비나 영토 확장에 부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백리 사방의 좁은 땅밖에 영유하고 있지 않아도 또 군비가 부족하여도 천하의 왕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임금님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형벌을 되도록 줄이고, 과세를 가볍게 하여 백성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에게는 농사를 짓는 틈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를 가르쳐 가정에서는 부형을 잘 섬기고, 사회에서는 어른들을 공경하도록 지도한다면 백성은 모두 임금님의 덕에 순화되어서 자연 나라를 사랑하게 되어 충실한 심신을 가지고 외적에 대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로 군비를 단단히 하지 않아도 진(秦)나라나 초(楚)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와도 그들의 굳은 갑옷과 예리한 무기를 두들겨 쫓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나 초나라는 백성을 군대에만 내몰아대는 바람에 농번기가 되어도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게 될 것이므로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가 없어서 어버이마저 충분히 부양할 수 없고 끝내는 어버이는 굶주리고 얼고, 형제는 이산하는 비참한 상태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러고서는 백성은 임금을 원망할 뿐 마음으로 복종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들 나라가 백성을 괴롭히고 있을 때에 임금님이 이들 나라를 공격하면 적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무적(仁者無敵)=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임금님! 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고 어진 정치를 베푸시는 데에 힘을 쓰십시오. 나라의 번영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양혜왕장구상5)
그래도 흔쾌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혜왕은 차차 맹자의 열변에 끌리어 들어갔다.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맹자는 이러한 형편을 감안하여 얼마 동안 위나라에 머물면서 양헤왕에게 왕도(王道)를 설명할 결심을 하였다.
4)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
화창한 날이다. 양광이 푸른 잔디 위를 비추고 들판에는 방목하는 동물들이 뛰놀고 있다. 한낮이 지나서 양혜왕은 맹자를 대동하여 널따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연못에 다다르자 멈추어선 양혜왕은 주변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놀고 있는 기러기, 오리, 사슴, 노루 등을 돌아보며 자랑스러운 듯이 물었다.
“현자에게도 이런 즐거움이 있습니까?”
분명히 일국의 군주로서 그 부유함을 과시하려는 모습이었다.--네가 아무리 인의를 주장한다 하여도 이처럼 훌륭한 뜰을 가지고 호사스러운 즐거움은 꿈에도 꾸지 못할 것이다. 보라! 저 멋진 기러기를 유유하게 활보하는 사슴을 물고기가 뛰노는 연못을 그리고 이 드넓은 정원을--
이러한 양혜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책하면서 하는 질문에 맹자는 자신의 주장을 말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정원입니다. 그런데 현자가 된 뒤에라야 즐길 수 있을 줄 압니다. 현자가 아닌 사람은 비록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해도 즐길 줄을 모릅니다.”
“시경의 대아(大雅) 영대편(靈臺篇)에
<왕은 영대를 지으려고 시작하였네.
한편으로는 측량하고 그 땅에 줄을 치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짓기를
며칠 못 가서 다 이루었네.
측량하고 줄을 칠 때 급할 것 없다고 해도
백성들은 자식 같이 모여들었네.
왕께서 영대의 동산에 나오시니
암수 사슴들은 엎드린 채 그냥 있고,
사슴들은 탁탁하게 윤기 흐르고
백조는 학학 깨끗하도다.
왕께서 영대의 못가에 서계시니
아아, 물고기들 가득히 뛰놂이여.>
하는 노래가 있는데, 이것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그 정원을 이룩할 때의 광경을 노래한 것입니다. 문왕은 백성을 부려서 정원과 연못을 만들었는데 백성들은 그 작업을 즐거워하고 그 정원을 이름 하여 영대(靈臺=자랑스러운 누각)라 하고 또 그 연못을 영소(靈沼=자랑스러운 연못)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고라니(糜), 사슴(鹿), 고기(魚), 자라(鼈) 등이 가득한 것을 즐긴 것입니다. 요컨대 옛날의 현자는 백성과 함께 즐긴 것입니다. 백성을 희생시켜 혼자만이 쾌락을 즐긴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부터 즐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서경(書經)의 탕서편(湯誓篇)에는
<이 무정한 태양은 의연히 빛나고 있구나.
도대체 언제 망하려느냐.
네가 망할 때는 함께 망하리라.>
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폭군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하(夏)나라의 걸(桀)왕에 대한 백성의 말입니다. 포악한 걸왕을 무정하게 빛나는 태양에 비유하고 하루라도 빨리 망하기를 빈 것입니다. 백성들이 함께 망하기를 바란다면 아무리 훌륭한 누각과 연못이 있더라도 혼자서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백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인덕을 지닌 현자가 아니면 참으로 즐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양혜왕장구상2)
묵묵히 듣고만 있던 양혜왕의 어깨가 움츠려든 것 같고, 자랑스러워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발걸음은 무거워보였다. 태양은 중천에 높이 떠있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비정하게 그리고 있었다.
5) 오십보백보
중원의 겨울은 달음박질하여 온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산야가 단풍이 드는가하면 조석으로는 한기가 스며들어 풀 속에 있던 벌레들도 소리를 그치고 사라지고 황량한 겨울 풍경이 전개된다. 그 무렵이 되면 해마다 유민이 출현한다. 흉작 때문에 굶주리기 시작한 농민이 먹을 것을 구하여 방랑한다.
올해에도 어느 나라의 유민이 어떠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 날 양혜왕은 맹자를 불렀다.
“국정에 대해서는 과인이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내지방(河內地方=하남성 심양현, 제원현/河南省沁陽縣, 齊源縣 등)이 흉년일 경우에는 그 지방의 백성을 하동지방(河東地方 山西省 安邑縣 등)으로 이동시켜 그 지방의 식량을 주고, 또 쌀을 하내지방으로 보내어 노인과 어린이를 구제하고 있소. 하동지방이 흉작일 경우에도 같은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웃나라의 정치를 관찰하고 있노라면 과인처럼 마음을 쓰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나라의 인구는 감소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인구가 증가하지 않는 것은 어떤 때문일까요.”
노동력의 확충, 병사의 충실이라는 점에서 인구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편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그대로 부국강병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 이주민이 온다면 출생에 의한 자연증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어진 정치를 베풀면 천하의 백성이 그리워하여 모여든다고 한다.
“나는 이웃나라와 비교해서 확실히 인정을 베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인정을 그리워하여 우리나라로 이주해 오는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때문입니까.”
라고 말하는 양혜왕의 항의 속에는 부국강병을 성취하고 싶다는 야심이 숨겨져 있다. 그 야심을 눈치 채고 맹자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임금님은 전쟁을 좋아하니까 한 가지 전쟁을 비유하여 말하지요. 진지를 펴고 대치하고 있던 양쪽 군대가 각각 세 좋게 북을 치고 진군을 개시하여 마침내 백병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병사들 중에 겁에 질리어서 갑옷을 벗고 도검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가 나옵니다. 어떤 자는 백보를 도망하여 멈추고 또 어떤 자는 오십보를 도망하여 멈춥니다. 오십보를 도망한 자가 백보를 도망한 자를 겁쟁이라고 조롱하여 웃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안 되지요. 단 백보를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만이지 도망쳤다는 것은 같습니다.”
“임금님 만일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임금님의 나라가 이웃나라보다 인구가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이웃나라와의 국정의 차는 오십보백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든 백성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양혜왕장구상3)
6) 경제 안정은 왕도정치의 시작
전쟁을 비유한 이야기로 양혜왕의 흥미를 끈 맹자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왕도정치를 설명한다.
“정치의 제일보는 백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성을 부릴 때에는 농번기를 피하여 농경의 편이를 생각하여 백성을 부린다면 곡식은 먹을 만큼 수확할 수가 있습니다. 못에서 고기를 잡을 때에는 잔 그물을 못에 넣지 못하게 한다면 어린 물고기는 스스로 자라서 물고기는 잡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때를 맞추어 도끼로 나무를 베어 남벌을 금한다면 수목은 무성하고 목재가 바닥날 이는 없습니다. 식량과 물고기를 먹고도 남을 만큼 식량이 확보되고 주거를 짓기 위한 목재도 풍부해지면 백성들은 마음껏 삶을 영위하고 사자를 장사지내는 것에도 유감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왕도정치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정전법(井田法)에 따른 농민 1호의 택지 면적은 5무인데 그 좁은 집터이지만 뽕나무를 심도록 하고 누에를 치게 하면 신체가 쇠하기 시작하는 쉰 살 노인에게는 비단 옷을 입게 하여 추위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길러 번식시키면 일흔이 넘는 노인에게는 소화하기 좋은 고기반찬으로 노쇠한 신체를 지탱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매호마다 100무의 밭을 충분히 경작시키면 여러 명의 가족이라도 굶주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학교교육에 충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도록 가르치면 젊은이들에게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반백의 노인이 짐을 지거나 이고서 거리를 다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노인은 비단 옷을 입고 고기반찬을 먹으며 백성들이 배고프거나 추운 일이 없게 되고서도 왕자 노릇을 하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임금님의 정도(政道)를 뒤집어보면 정원에 사육하고 있는 가축이 백성의 식량을 먹는 것을 보고도 이를 금지시키려 하지 않고, 길가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창고를 열어 구제하려고 아니 합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내 책임이 아니다. 흉년 때문이다.’라고 하신다면 사람을 찔러 죽이고도‘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칼이 죽인 것이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임금님이 흉년 진 탓으로 죄를 돌리는 일이 없으면 반드시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흉작을 당하여 서둘러 하내지방의 백성을 하동지방으로 옮긴다든지 하동지방의 쌀을 하내지방으로 옮긴다든지 그러한 표면적인 호도책을 펼치고서 어진 정치를 베풀고 있노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일입니다.” (양혜왕장구상3)
처음 몇 번인가 반문하고 싶은 모습을 보인 양혜왕은 점차 열을 올리는 맹자의 어세에 눌린 것인지 가만히 끝까지 듣고 있었다.
<왕도정치인가? 이것은 반드시 우원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 우원하다고만 느낀 것은 지레짐작함이었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양혜왕의 마음에 떠올랐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아무런 뜻이나 야심도 없이 순수하게 이 남자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하는 겸허한 마음이 솟아났다.
7) 생명 존중의 정치
“과연 선생의 의견은 잘 알았소. 그런데 과인의 시정에 대하여 더 비판해주기 바라오. 나쁜 점을 고치고 싶으니까요.”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러면 체면 하지 않고 말하지요. 사람을 죽일 경우 몽둥이로 두드려 죽이는 것과 칼로 베어 죽이는 것과 살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름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같은 것이오.”
“그러면 칼로 베어 죽이는 것과 악정의 결과로 죽이는 것과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같은 것이오. 살인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지요.”
“임금님! 인간의 생명은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귀중한 인명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임금님의 정치를 보면 과연 인명을 존중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왕궁의 부엌에는 살찌고 맛이 있는 고기가 많이 있고. 마구간에는 풍부한 사료를 먹여 쑥쑥 잘 자란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魏)나라 국민에게는 굶어서 안색이 누런 사람이 보입니다. 교외에는 굶주려 죽은 시체가 구르고 있습니다. 이러고서는 안 되었지만 임금님의 정치는 짐승을 끌어들여서 백성을 물어 죽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들끼리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것마저도 사람들은 이것을 보기 싫어합니다. 하물며 백성의 어버이라는 왕으로서 일국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짐승을 끌어들여 당연히 가엽게 여겨야 할 백성을 잡아먹게 하는 상태로서야 어찌 백성의 어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용(俑=시체와 함께 묻히는 나무 인형)을 처음에 만든 사람은 그 자손이 끊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용이 너무나 인간의 모습과 같기 때문에 참으로 인간을 생매장하는 것처럼 무참하게 생각되어 제작자의 불인한 마음을 미워한 것입니다. 사람을 본 딴 인형인 용을 매장하는 것만으로도 연민의 정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 자식 같은 백성을 굶어 죽게 하는 것이야 말로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임금님 어떻게 인명을 존중하는 일부터 정치를 시작해주십시오.”(양혜왕장구상4)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잡아먹게 한다. 이것은 양혜왕에게만 한한 정치가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인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영원히 꺼지지 않은 슬픈 현실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맹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한 것이다. 그 의기는 참으로 장하고 그 비판 정신은 통렬하다. 그리고 그 언설은 순수한 것만이 내뿜는 향기를 뿜고 있었다. 그런데 그 향기를 양혜왕이 어느 정도 빨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양혜왕은 그로부터 얼마 없어 죽었다는 것이다.
8) 위나라를 떠나다
주(周)나라 신정왕(愼靚王) 3년(BC 318) 위나라에서는 양혜왕의 아들 양왕(襄王)이 즉위하였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 맹자는 새 왕을 알현했는데, 조정에서 나오는 그의 낯빛이 어두웠다.
“선생님, 불쾌한 듯이 보입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요즘 맹자를 존경하고 있던 사람이 지나다가 만나 이렇게 말하였다. 맹자도 그런 듯이 긍정하였다.
“조금 불유쾌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내 집에서 이야기나 합시다.”
그 사람은 걱정스러운 듯이 따라나섰다. 이윽고 두 사람이 실내에 좌정하자 맹자는 한숨을 쉬고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양왕을 알현하였는데, 실은 매우 놀랐습니다.”
“--”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양혜왕에게는 일견하여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왕에게는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조정에 들어가서 멀리서 본 바, 사람에게서 군주다운 용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차 가까이 하여 본 바 위엄스러운 점을 새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정해진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돌연“천하는 어떻게 정해지겠소.”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중후함이란 것이 없었습니다.“하나로 정해지겠지요.”하고 말하자“누가 하나로 할 것인가요.”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나는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천하를 안정시켜 평화를 수립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은 군주의 사명입니다. 일국의 군주인 자가 천하는 어떻게 안정되겠는지. 누가 통일할 것인지, 마치 남의 일처럼 말을 해도 좋은 것입니까? 그런 무책인한 태도로 국정에 임한다면 백성이 견디지 못합니다. 아아 이 위나라도 이것으로 끝인가 하고 낙담했습니다만, 어떻든 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히 말하리라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인명을 존중할 줄 아는 군주만이 천하를 하나로 안정시킬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그런 군주에게 누가 한 편이 되겠소.”하고 묻는 것입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한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임금님은 저 모판의 모종을 아시겠지요. 7. 8월에 가물면 묘는 시들어버립니다. 마침 그 때에 하늘에 구름이 퍼지고 비가 내리면 묘는 생생하게 생기를 되찾습니다. 이처럼 묘가 생기를 찾았을 때에 누가 그 성장을 가로 막겠습니까? 인간 세계도 그와 같습니다. 이제 천하의 군주라는 군주 중에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군주가 출현한다면 천하의 백성은 모두 목을 길게 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군주 밑으로 백성이 몸을 던지는 것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것과 비길 수 있는 것으로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양혜왕장구상6)
“--과연.”
“그런데 자기 자신의 사명을 다른 사람의 일처럼 생각하는 이상 무엇을 말하여도 헛일이겠지요. 내가 대답하는 동안 양왕은 침착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섭섭하게도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눈치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둥지를 걸고 싶은데 알맞은 가지를 찾지 못하였을 때 새는 그 나무를 버리고 다른 나무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양혜왕에게는 일루의 희망을 걸고 있었던 맹자는 그 아들인 양왕에게는 실망하고 말았다. 이윽고 그의 모습은 대량(大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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