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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고전/맹자와 맹자 이야기

3-3 송나라에서

간천(澗泉) naganchun 2009. 2. 11. 14:20

 3, 송(宋)나라에서



1)  인의로 이룬 평화라야


  맹자가 송나라에 있었던 시기는 주(周)나라 난왕(赧王) 4년(BC311)부터 2, 3년이라고 추정된다. 송경(宋牼)과 석구(石丘=송나라 지명)에서 만난 것은 아마도 송나라로 가서 얼마 되지 않은 때일 것이다. 묵가에 속하여 일종의 평화주의를 주창한 송경은 꽤 나이가 들었었다. 그때 초(楚)나라로 가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맹자는 질문했다.

  “매우 먼 곳으로 여행을 가시는 모양이신데, 선생님은 어디를 가십니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전쟁을 하려는 모양인데, 이제부터 초나라 왕을 알현하여 의견을 말하고 전쟁을 말리려 생각합니다. 초나라 왕이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진(秦)나라까지 가서 진나라 왕을 설복시킬 생각입니다. 그 두 사람의 왕 중 어느 한 사람은 반드시 공명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이제 바랄 수는 없습니다만, 대강의 요지만이라도 들려주시겠습니까. 초왕이나 진왕에게 어떻게 말하려 하십니까?”

  “전쟁을 하여도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서로 불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할 작정입니다.” 

  “하, 그렇습니까. 전쟁을 말리고자 하는 선생님의 뜻은 참으로 좋습니다만, 그 뜻을 설명하는 방법은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관계를 주로 하여 진나라나 초나라 왕에게 설명해서 그 왕들이 이익을 존중하여 출병을 멈출 경우는 장병들도 전쟁의 중지를 즐거워하여 이익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남의 신하된 사람이 이익을 생각해서 그 군주를 섬기고, 남의 자식 된 사람도 이익을 생각하여 그 부모를 섬기고, 남의 아우들도 이익을 생각하여 형을 섬긴다고 하면 군신, 부자, 형제의 관계는 각각 인의를 떠나서 단지 이익관계만으로 맺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서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아직 없습니다.”

  “--”

  “혹시 선생님이 인의를 주안으로 하여 진나라와 초나라 왕에게 설명하되 그 왕들이 인의를 존중하여 출병을 중지한다면, 장병들도 전쟁의 중지를 즐거워하여 인의를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남의 신하된 사람이 인의를 생각하여 그 군주를 섬기고, 남의 자식 된 사람이 인의를 생각하여 아버지를 섬기고, 남의 아우 된 사람이 인의를 생각해서 그 형을 섬기게 되면 군신, 부자, 형제의 관계는 각각 이해관계를 떠나서 단지 인의만으로 성립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서 크게 번영하여 천하의 왕자가 되지 않은 나라는 아직 없습니다. 이익을 주안으로 하여 설명을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고자장구하4)

--어찌 이익만을 말합니까. 인의뿐입니다.

  이것은 맹자가 유세 당초에 먼저 위(魏)나라의 혜왕에 대하여 도도하게 말한 말이었다. 또 그 후의 그의 유세의 기치였다. 목적은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수단은 어찌 해도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맹자는 힘써 배제하였다. 평화는 존귀하다. 평화를 존귀하게 생각하는 한 평화주의는 바르다. 그러나 만일 평화를 달성하는 수단이 잘못되었다면 모처럼의 평화는 멸망에 이르는 상징일 뿐이다. 어떻든 평화는 인의를 관철함으로써 달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어디까지나 바른 수단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자는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실행한 것이다.


2)  왕 언(偃)을 알현하지 아니 하다


  현존하고 있는 <맹자칠편> 속에는 맹자가 송나라에 있던 동안에 그 군주를 알현하고 설명했다는 기사는 하나도 없다. 당시 송나라 군주는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왕>을 칭한 언(偃)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원래 그 언왕은 형인 척성(剔成)을 습격하여 국외로 추방하고 자립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 난폭자인 만큼 매우 용감하고 전쟁은 잘 했던 것 같다. 동방에서는 제나라를 쳐서 5성을 취하고, 남방에서는 초나라를 쳐서 3백리에 걸친 영토를 탈취하였다. 다시 서방에서는 위나라 군사를 패하게 한 일도 있다. 춘추시대의 한 시기에 송나라는 꽤나 융성을 기한 바도 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방의 강국에 압박당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의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왕 언의 열강에 대한 승리의 기록은 어느 의미에서는 빛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은 물론 어진 정치에 마음을 쓴 임금은 아니다. 가죽 부대에 인간의 피를 담고, 이것을 나무에 걸어서 화살로 명중시켜 <하늘을 쏜다.>고 떠들었다고 한다. 주색을 좋아하고 날마다 밤마다 음란한 광태를 펼쳤다. 만일 많은 신하들 중에 난행을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김없이 사살하고 말았다. 대강 이러한 비도의 군주였기 때문에 제후는 그를 <걸송(桀宋)>이라 별명을 붙였다. 폭군의 견본이라고 해야 할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그 소행이 매우 비슷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난행의 결과 왕언은 그 만년에는 제후의 증오의 표적이 되어서 마침내 제나라의 민왕(泯王=선왕의아들)에게 살해당하고 송나라는 망하여 그 영토는 제나라, 초나라, 위나라에 삼분되고 말았다. 어떻든 맹자가 살아있을 무렵은 송나라에는 일찍이 제나라, 위나라, 초나라를 패하게 했던 위세는 전혀 없었고, 거꾸로 그들 나라로부터 침공의 위협을 받는 소국이었다.

  이러한 비도의 군주를 모시고 게다가 멸망 직전에 있는 송나라에 어찌하여 맹자는 가게 된 것일까. 송나라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너무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고, 또 그런 폭정으로 괴로워하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이는 지나친 강변이다. 따라서 그 이유는 상상할 수 없으나 어떻든 무슨 사정이 있어서 간 것일 것이다. 그런데 가서 나라의 사정이 판명됨에 따라 맹자는 완 언을 알현할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 천하 만민의 편안한 생활을 염두에 두고 왕도를 실현하려고 매진하고, 그러기 위하여 제후들에게 유세하는 맹자이기는 하지만 그 만큼 바른 목적을 바른 수단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나를 굽히면서까지 어리석은 제후들을 알현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3) 자신을 굽혀 왕을 알현할 수는 없다


  왕도의 실현을 목표로 모처럼 송나라에서 유세를 하면서 조금도 그 왕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은 맹자의 태도에 제자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어느 날 진대(陳代)라는 제자가 이 점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제후를 알현하지 않는 것은 조금 생각이 좁은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처럼 재주와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이라도 알현한다면 잘하면 왕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잘 되지 않아도 패자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요. 옛날부터 책에도 <한 자를 굽혀도 여덟 자를 곧게 해야 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다소 선생님의 마음을 굽히더라도 제후를 알현하시는 것이 결국은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옛날 제나라 경공(景公)이 사냥을 할 때 대부를 부르는데 쓰는 깃발을 써서 우인(虞人=사냥터의 관리)을 불렀는데, 우인은 어전에 찾아와서 시중을 들지 않았다. 경공은 화를 내고 이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것을 들은 공자는 <뜻을 가지고 그것을 관철시키려 하는 사람은 항상 고난에 빠지더라도 좋다고 결의하고, 용사는 언제 목이 달아나 죽더라도 좋다고 각오하고 있다.> 고 평하여 그 우인을 칭찬하였다. 도대체 공자는 그 우인의 어떤 점을 칭찬한 것일까. 자신은 대부가 아니다. 그러니 대부를 부르는 깃발로 움직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예에 맞는 초빙 방법이 아니라면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응하지 않은 그 태도를 칭찬한 것이다. 이제 제후가 예를 다하여 정당하게 초빙할 이도 없는데 자신을 굽혀서까지 출사를 한다면 이 우인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대가 말한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이익본위로 하는 말이다. 이익을 제일로 한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곧게 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익이 된다면 실행해야 할 것이고, 결국 어떤 일이라도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하고 만다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

  “옛날 진(晉)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가 어자(馭者=말부리는 사람)인 왕량(王良)을 총신인 폐해(嬖奚)에게 동승시켜 사냥을 나간 일이 있다. 하루 종일 사냥터를 달려도 한 마리의 새도 잡지 못하였다. 폐해는 돌아와서 조간자에게 <왕량은 천하제일의 서투른 어자입니다.> 라고 복명했다. 어떤 사람이 그 일을 왕량에게 말하자, 왕량은 <다시 한 번 폐해와 동승시켜주십시오> 하고 강경하게 요청해서 허가를 받고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새를 잡았다. 그러자 폐해는 <왕량은 천하제일의 어자입니다.> 하고 복명했다. 그에 조간자는 <그러면 왕량을 너의 전속 어자로 해주자,> 라고 말하고 그 뜻을 왕량에게 전했는데 왕량은 <나는 저 폐해 때문에 법칙에 맞는 방법으로 수레를 몰았는데 하루 종일 해도 한 마리의 새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법칙을 깨고 제멋대로 말을 몰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새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시경의 소아(小雅) 차공편(車攻篇)에 <법칙대로 몰아서 틀리지 않으면 활을 쏘면 반드시 맞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법칙대로 수레를 몰아도 수확을 얻지 못하는 그런 소인과는 도저히 동업을 할 수가 없으니까 제발 사퇴시켜주십시오,”하고 말했다고 한다. 어자마저도 활 쏘는 사람의 기분대로 하는 것을 부끄럽다 하여 비록 산만큼 수확물이 있어도 아첨하여 법칙을 벗어나서는 말을 몰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도를 추구하는 자가 도를 벗어나면서까지 제후에게 추종하는 것은 단연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그대는 틀렸다. 자기 자신을 굽힌다는 것으로 남을 바른 길로 이끈 자는 자금까지는 없었다.”(등문공장구하1)

  바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바른 수단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른 수단에 의하려면 자기 자신을 굽히는 것은 금물이다. 맹자가 송나라 왕 언에게 알현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혼자서는 왕을 선도할 수 없다


  송왕에게는 일부러 알현하지 않은 맹자도 송왕의 측근을 만나서 왕을 선정으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던 사람들과는 좋은 마음으로 면회하여 대화를 하였다.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으로 대불승(戴不勝)이라는 중신이 있었다. 그는 항상 왕언의 덕을 높이는 일에 부심하고, 설거주(薛居州)라는 인물을 천거하여 측근에 두고 있었다. 설거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상당한 인격자였다고 이해해서 좋을 것이다.

  어느 날 맹자는 대불승과 대화를 하였다.

  “당신은 당신이 모시고 있는 임금이 덕을 쌓아서 선정을 베풀기를 마음으로부터 바라고 있습니까. 혹시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면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남방의 초나라의 대부가 있다고 하고 그 아들이 북방의 제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고 가정교사를 쓸 경우에 제나라 사람을 가정교사로 쓸 것입니까 초나라 사람을 쓸 것입니까?”

  “그야 당연히 제나라 사람을 가정교사로 쓰겠지요.”

  “그러데 단 한 사람인 제나라 사람이 가정교사로서 열심히 제나라 말을 가르쳐보아도, 많은 초나라 사람이 그 아이를 둘러싸고 사방팔방으로 시끄럽게 초나라 말을 떠들어댄다면 그 아이를 날마다 편달하여 제나라 말을 습득시키려 해도 안 되겠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제나라 서울의 번화가인 어느 장(莊)이나 악(嶽) 가운데 데리고 가서 수년 간 생활하면 이번에는 거꾸로 날마다 편달하여 초나라 말을 말하라고 해도 그것도 안 되겠지요.”(등분공장구하6)

대불승은 긍정하면서 열심히 듣고 있다.

  “당신은 저 설거주를 훌륭한 인격자라고 보고 그를 임금의 측근에 둔 모양인데, 그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임금님을 둘러싼 장유비존(長幼卑尊)의 가지가지의 무리들이 모두 설거주처럼 인격자라면 임금님은 함께 불선을 행할 자가 없을 것이므로 문제가 없습니다만, 둘러싼 무리가 모두 그런 인격자가 아니라면 임금님은 누구와 함께 선을 행할까요. 단 한 사람인 설거주로서는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임금님을 어떻게도 못하겠지요.”(등분공장구하6)

  씩씩하게 예를 들어서 말하여 맹자는 송왕의 측근을 정비하여 왕이 선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다 한 층의 노력을 대불승에게 기대하였다. 맹자 자신이 제나라에서 실패한 쓴 경험이 있는 만큼 그 말은 절실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설거주만으로는 결국 어떻게도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대불승은 명심하였다.


5) 왕도정치


  송(宋)나라는 제나라, 초나라 사이에 끼인 소국이다. 일찍이 왕 언(偃)은 이 두 나라를 위협한 일도 있으나 그것은 참으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항상 두 나라로부터 압박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런 소국이 가야 할 운명은 슬프다. 항상 제나라와 초나라에 위협을 당하고 있는 나라에 왕도를 설득시켜보아도 과연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 스승은 어떤 심산으로 이 나라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제자인 만장(萬章)은 문득 이런 의문에서 맹자를 행하여 그 의문을 솔직히 말하였다.

  “송나라는 소국인데다가 주위의 대국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왕도를 행하고자 하여도 제나라와 초나라가 건방진 일이라고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맹자는 미소를 지으며 달래듯이 만장을 보고 고전을 좋아하는 이 제자에게 역사서로서의 고전인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옛날 은나라 탕왕은 아직 소국의 군주였던 시절에 박(亳=河南省 商丘縣)에 거주하여 대국인 갈(葛)과 이웃하고 있었다. 당시 갈나라 군주는 방종무도하여 선조의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 탕왕은 사람을 시켜 <어찌하여 선조의 제사를 모시지 않은 것입니까?> 하고 물은 바 <희생할 동물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회답했다. 그래서 탕왕은 소와 양을 보내었는데 갈나라 군주는 그것을 먹어버리고 제사를 모시려 하지 않았다. 탕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전과 같이 <어찌하여 선조의 제사를 모시지 않은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이번에는 <바칠 곡물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탕왕은 박나라 청장년들을 갈나라에 보내어서 그 땅을 경작시키고 다시 노인과 어린이를 동원하여 경작하는 사람들의 식료를 날라두고 있었는데, 갈나라 군주는 그 백성들을 이끌어 통로를 막아 박나라에서 운반해오는 술과 고기 그리고 곡식을 빼앗았고 순순히 넘기지 않은 사람은 죽여 버렸다. 아직 어린 동자도 곡식이나 고기를 나르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죽이고 빼앗아 버렸다. 서경에 <갈나라 군주가 향(餉=점심)을 빼앗았다.> 라고 적혀있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

  내로라하는 탕왕도 어린 아이들마저 죽였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여 마침내 갈나라를 친 것이다. 사해의 백성은 모두 <탕왕의 싸움은 천하를 모두 자기의 부(富)로 하자는 사욕에서 한 일은 아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살해당한 필부필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이다.> 하고 성원을 보냈다.

  탕왕은 이리하여 갈나라부터 정벌을 시작하여 각지의 무도한 군주를 열 한 곳이나 정벌하여 천하에 적이 없다고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동쪽을 향하여 정벌하면 서쪽의 야만인마저도 또 남쪽을 향하여 정벌하면 북쪽의 야만인까지 <어찌하여 우리들 쪽은 뒤로 미루는 것일까? 빨리 정벌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원망했다. 이처럼 천하의 백성이 탕왕의 정벌군을 기다린 것은 가문 날에 비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탕왕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둔 백성은 그 정벌군이 쳐들어와도 일상생활이 흐트러짐이 없이 상인은 장사에 열심이고 농부는 농사일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무도한 군주를 쳐서 백성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계절에 맞게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정경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탕왕이 정벌을 기다리고 있다. 탕왕이 도착하면 무도한 군주의 비도한 벌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백성은 매우 기뻐하여 탕왕의 인의에 바탕을 둔 천하의 정벌은 쉽게 성공을 거두었다.”

  “--”

  “다시 주(周)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칠 때의 일을 서경 일편(逸篇)에는 <천하에는 아직 주나라에 신복하지 않은 나라가 있다. 그래서 무왕은 동정하여 그 땅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백성들은 모두 그 현황(玄黃=폐물, 적흑색과 주색의 옷감, 왕자에게 알현할 때의 예물)을 상자에 넣고 무왕의 정벌군을 마중하였다. 무왕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대국인 주나라 신하로서 소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땅의 높은 지위에 있는 군자는 현황을 상자에 채워서 주나라의 지위가 높은 군자를 맞고, 또 그 땅의 서민은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주나라 서민을 맞았다. 이것도 한 마디로 무왕이 백성을 물불 같은 고통 속에서 구출하고 그 잔적인 폭군(주왕)만을 쳤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고, 또 같은 서경 태서편(泰瑞篇)에도 <우리 주나라의 무위는 높이 오르고 은나라 국경을 넘어 진군하여 그 잔적인 폭군을 쳐서 사기는 점점 고양되었다. 무왕이 받은 백성의 환영은 그 옛날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친 은나라 탕왕의 그에 비하여 더 광영이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등문공장구하5)

  “--”

  꽤 길어졌는데, 요컨대 탕왕이나 무왕의 천하통일은 어디까지나 인덕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결과이다. 그 나라의 대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나라나 초나라가 미워하여 쳐들어오면 어떨까 하고 우려하는 것은 왕도정치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도정치를 행하면 사해의 백성은 모두 고개를 들고 이를 바라고 군주로서 우러르려고 희망할 것이다. 제나라나 초나라가 아무리 대국이라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미소를 지으며 맹자는 알뜰하게 설득하고서 떠났다. 왕도정치를 행하는데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그대도 나의 제자가 아닌가. 이제 이 문제도 졸업하는 것이 좋다. 맹자의 눈에는 그렇게 만장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6) 등나라 태자를 만나다


  모처럼 송나라에서 유세를 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굽히는 것이 떳떳하지 않다고 해서 송나라 왕을 알현하지 않은 맹자에게 어느 날 진객이 찾아왔다. 그 무렵 아직 태자였는데 후에 등(滕)나라 문공이다. 문공은 공무로 초나라로 가는 도중 송나라를 지나다가 맹자를 방문한 것이다.

  등(滕=山東省 滕縣)나라에서 출발하여 초(楚)나라로 가는 길에 송(宋)나라를 통하는 것은 분명히 돌아가는 길이다. 길을 돌아서 가면서 송나라를 지나는 것은 문공이 맹자를 만나고 싶다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미 맹자의 이름은 왕도정치를 들고 나온 유세가로서 유명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보다도 일찍이 맹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제나라 정사로서 등나라 장례식에 참가한 바가 있어서 그때 문공은 맹자를 만나서 그 인물에 존경과 동경심을 품고 다시 만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쩌다 초나라에 공용으로 등나라를 출발하게 되니 자연히 송나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맹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 진객을 기쁘게 맞이했다. 그래서 묻는 대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받은 성(性)은 선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요임금이나 순임금을 인용하여 선한 성을 한 없이 확충하여 성인이 된 것을 칭찬했다. 문공은 공용으로 일단 초나라에 돌아갔으나 맹자의 매력에 끌리어 돌아오는 길에 다시 송나라에 들른 것이다. 그런 문공을 맹자는 힘차게 격려했다.

  “태자님 무엇인가 내가 하는 말에 의문을 가지고계십니까. 나는 틀린 것은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인간인 이상 성인이거나 범인이거나 본질적으로는 다름이 없습니다. 성인인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도도 우리들 범인의 도와 같습니다. 우리 범인도 태어나면서 받은 착한 성(性)을 한없이 신장시키면 언젠가는 성인의 경지에 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제나라의 용사로 알려진 성간(成覵)은 주군인 경공(景公)에게 <그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입니다. 나는 어찌하여 그를 두려워할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또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 같이 인간이 아닌가. 순임금은 할 수 있고 나는 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고 했습니다. 되지 않는다는 인물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또 증자의 제자로 내가 존경하는 공명의(公明儀)는 <성인이라고 일컬어진 주공(周公), 문왕이야말로 자기의 스승이라고 하고 있으나 주공과 함께 있는 사람이 나를 속일 이가 없다. 나도 문왕을 스승으로 우러르고 정진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등나라는 분명 소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경계의 장단을 서로 보충하여 평균한다면 그 영토는 5십리 사방은 됩니다. 그만 한 나라라면 성현의 도를 따라서 통치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경에도 <먹어서 어지럽지 않은 약은 병도 낫지 않는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지극히 높은 도를 실천해주십시오.”(등문공장구상1)

  이리하여 태자시대의 문공이 모처럼 맹자를 송나라에 찾아온 것이 이윽고 맹자를 등나라로 모시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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