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추(鄒)나라에서
1) 자신의 비행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주나라 난왕(赧王) 6년(BC 309)인가 7년 쯤, 맹자는 설(薛=山東省 滕縣 東南)에 들러서 고향인 추(鄒)로 돌아갔다. 송나라를 떠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추나라 군주는 목공(穆公)이었는데, 그다지 대단한 군주가 아닌 것 같아서 맹자는 목공에게 벼슬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제자들과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하면서 천하의 형세를 보고 다시 유세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우연히 그 무렵 추나라는 노나라와 싸워서 패배를 당한 일이 있어서 그에 대한 대책을 위하여 목공은 맹자에게 상담을 청했다.
“이 번 전쟁은 바람직하지 않았소. 제일 유사(有司=각부서의 장관) 중에서 전사한 자가 33명이나 있었는데, 종군한 백성으로 그들 유사를 따라서 전사한 자는 한 사람도 없었소. 군율에 따라 처벌하려 하여도 수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모든 백성을 처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처벌하지 않고 방관하면 백성은 상관의 전사를 고소한 일 정도로 생각하여 상관이 고전하고 있어도 구조해주지 않게 될 것이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전쟁을 당하여 왜 백성은 유사의 죽음을 태연하게 죽도록 내버릴 수가 있을까. 그것은 요즘 유사가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날카롭게 이 점을 추구했다.
“역병이나 기근에 말려들던 해에는 영내의 노인이나 유아와 병약자가 구렁에 빠지거나 하여 객사하는 수가 매우 많았습니다. 또 장년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수 천 명이 사방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갑니다. 백성이 그런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에 군공(君公)의 창고나 금고는 어느 것이나 꽉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는 백성의 참상을 군공에게 상주하여 그 창고나 금고를 열고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위에 있는 관리가 그 직무를 태만하여 백성을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증자는 <경계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거듭하여 항상 자신의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 모든 자신의 비행의 결과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니까.>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음미해야 할 말입니다. 군공의 백성은 날마다 받는 악정의 고통을 이 번 전쟁에서 겨우 유사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백성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군공이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면 백성은 위에 있는 관리에게 친해지고 전쟁을 당하여도 유사를 위하여 기쁘게 죽으려 할 것입니다.”(양혜왕장구하12)
당면 현실 문제를 물어서 그 구체적인 해결책은 얻을 수 없이 오히려 스스로의 악정을 비판 받은 목공은 침울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맹자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매우 낮아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도 들을 수 없는 한숨이었다. 도저히 그 목공은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패전의 부담이 백성들 위에 무겁게 실리게 될 것이다. 아아. 고국의 백성은 언제면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생활하게 될 것인가. 그런 슬픔과 분노의 감개가 맹자의 흉중을 오가고 있었던 것일까.
2) 문공의 삼년거상을 권하다
맹자가 추나라에 귀국하여 1년도 되지 않은 때에 등(滕)나라 정공(定公=문공의 아버지)이 사망했다. 일찍이 먼 길을 돌아 송나라에까지 와서 맹자를 만나 그 가르침을 들어서 깊이 감복한 문공은 부왕의 죽음을 당하여 그 장례 일체에 대하여 맹자의 지도를 받고자 하여 부(傅)인 연우(然友)에게 말했다.
“전년 나는 송나라에서 맹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 때 받은 감명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제 불행히 부왕의 죽음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장례를 맹 선생에게 정식으로 예법을 들어서 집행하고 싶은 것이다. 먼 길을 수고가 많겠지만, 선생을 방문하여 듣고 와주었으면 한다.”
연우는 서둘러 추나라로 맹자를 방문했다. 맹자는
“역시 잘하는 일입니다. 친상이란 본래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증자(曾子)께서는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를 지내면 효도라고 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나는 제후의 예는 아직까지 배운 바 없지만 전에 들은 일은 있습니다. 부모의 삼년상에는 제소(齊疏=검소한 옷)의 상복(喪服)을 입고 전죽(飦粥=죽)을 먹으며 지내는 것은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이래로 공통되게 지켜왔던 것입니다.”고 말하고 문공의 효심을 칭찬하고 삼년의 상을 권했다. 문공은 충실히 그것을 실행하려 하였다. 삼년상이란 인간은 태어나서 삼년간은 부모의 품속에서 자라는 것이므로 부모의 죽음을 당하면 삼년간은 상을 입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규정된 것인데 실제로는 25개월의 상이 된다. 그렇다 해도 군주로서 25개월간 공사의 직무를 폐하고 항상 복을 입는다는 것은 정무에도 지장이 있을 것이다. 공족이나 백관이 반대할 것은 당연하다.
“군공(君公)에게는 삼년상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무리입니다. 종국(宗國)인 노나라 선군에도 그것을 행한 분은 없습니다. 우리 선군에게도 물론 없습니다. 군공 대에 와서 조법(祖法)을 어기는 것은 안 됩니다. 일찍이 오랜 기록에도 <상례와 제례는 선조 대대로의 법에 따라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림도 없다는 반대의 소리는 날로 점점 높아갔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는 충분히 학문을 한 일이 없고 승마나 검술만을 좋아하여 왔다. 그러니 일족이나 백관이 나에 대한 신뢰는 엷고 삼년상이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좋을 것인지 수고스럽지만 다시 한 번 더 맹 선생에게 물어 봐 주시지 않겠는가?”
과연 문공에게는 주위의 모든 반대를 눌러서 삼년상을 결행할만한 자신은 없었다. 마음이 약해진 문공은 다시 연우(然友)를 맹자에게 보냈다.
“이 일은 남의 원조를 받아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군공 자신이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슬픔의 정을 다할 것인지에 따라 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만일 군공이 성심성의 상을 입을 것이라면 주위는 자연히 감화되어 반대는 없어지겠지요. 요컨대 군공 자신의 문제입니다.”
연우가 돌아와서 복명하자 문공은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내가 하기에 달려있습니다.”(등문공장구상2)
이 회답에 격려되고 결심한 문공은 끝내 삼년 거상을 치렀는데 그것은 역사상 드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