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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고전/맹자와 맹자 이야기

3-5 등나라에서

간천(澗泉) naganchun 2009. 2. 11. 14:24

5,  등(滕)나라에서


1), 경제 안정과 세제


  문공은 부왕 정공의 상례를 납관(納棺)에서 토장(土葬)까지 5개월간(천자 7개월, 제후 5개월, 대부 3개월이 예법임)을 충실히 지낸 후 처음으로 조정에 나가서 맹자를 정치고문으로서 초빙하였다. 그래서 맹자는 다시 추나라를 떠나 등나라로 옮겨 살았는데, 이처럼 자기를 신복하는 문공의 열의에 답하여 서둘러서 왕도정치의 실체를 피력하였다.

  일찍이 맹자는 제나라 선왕(宣王)에게 정치의 제일보는 백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설득한 바가 있다.

 --백성이란 항산이 있으면 항심도 있지만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가령 항심이 없으면 어떤 악사(惡事)라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항심이 없기 때문에 악사를 일으킨 백성을 차례차례로 형벌에 처하는 것은 백성이 전락하는 것을 그물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인덕의 선비가 군주의 위에 있으면서 그런 일을 해서 좋을 이가 없다.--

  이것이 그 개요인데 군주는 무엇보다 먼저 백성이 항산을 가지고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소위 맹자의 정치이론의 원칙인데, 문공에 대해서도 맹자는 이 원칙을 설명하여서 구체적인 대책으로서 세제에 대해서 말한다. 말할 것도 없이 세제의 양부가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의 관건이 된다는 관점에서이다.

  “지금 말씀한 바와 같이 정치의 제일보는 백성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으므로 현자는 반드시 몸을 공검(恭儉)하게 가지고 대신 이하를 예우하고,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때에도 일정 한도를 지켜서 그 이상은 결코 걷지 않는 것입니다. 노(魯)나라 양호(陽虎=논어에서는 陽貨)는 <부(富)를 축적하려 하면 인정을 베풀 수는 없고, 인정을 베풀려 하면 부를 축적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제인데 하(夏)왕조에서는 성년 남자 1명에 대하여 경지 50무를 하사하고 그 수확 중에서 상납하는 공법(貢法)을 행하였고, 은(殷)왕조에서는 8명이 1조가 되어서 70무의 공전을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을 상납하는 조법(助法)을 행하고, 주(周)왕조에서는 1명에 대하여 100무의 경지를 사전으로 하사하고 각각 생활하게 하고, 따로 8명으로 공전 100무를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을 상납시키는 철법(徹法)을 행하였습니다. 실제로는 모두가 10분의 1의 세율입니다. 철(徹)이라고 하는 것은 공(貢)과 조(助)를 병용한 것으로 합쳐서 10분의 1의 세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조(助)라고 하는 것은 백성의 힘을 빌어서 공전을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옛날 현인으로 알려진 용자(龍子)는 이들 세제를 비평하여 <지조(地租)로서는 조법(助法)이 가장 좋고, 공법(貢法)이 가장 나쁘다.>고 했습니다. 공법은 수년간의 수확의 평균을 취하여 상납할 금액을 정한 것입니다. 이 세제는 풍년일 경우에는 곡물이 풍부하니까 조금 많이 상납시켜도 백성의 부담이 되지 않는데, 적게 상납하게 되어서 흉년의 경우에는 곡물이 없어서 이듬해도 이어서 경작에 종사할 수 있을는지 어떤지 걱정될 정도로 백성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일정액만은 반드시 상납시키게 됩니다. 곧 분명히 커다란 모순이 있는 것인데 이 세제를 억지로 밀고 나가면 조법과 같이 10분의 1의 세율이라고는 하면서 이윽고는 백성은 원망을 하면서 1년 중 일을 하여도 부모마저 봉양할 수 없게 됩니다. 이리하여 백성이 괴로워지면 때로는 금품을 대출하여 백성이 융통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반제에는 반드시 이자를 물게 되었으므로 백성은 점점 괴로워지고 노인이나 유아 병약자는 구렁에 떨어져 객사하게 됩니다. 백성의 부모인 군주가 백성이 그토록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한다면 어떻게 백성의 부모로서의 실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법은 채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경의 소아 대전편(大田篇) 주나라에 관 한 시에

<우리 공전에 비를 내려부으십시오. 그리고 사전에도 미치게 하여 주십시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전은 조법에서만 있는 것이니까 이 구절로 생각하면 주나라도 조법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군주도 조법을 채용해 주십시오.”(등문공장구상3)


2), 학교교육


  조법과 10분의 1의 세율, 이리하여 세제가 합리적으로 정해져서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면 다음에는 백성의 교육 문제가 된다.

  “이리하여 민생이 안정되면 상(庠), 서(序), 학교(學校)를 세워서 백성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상(庠)이란 기른다는 것입니다. 교(校)란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서(序)란 사(射)를 말합니다. 하(夏)왕조에서는 교(校)라 하고, 은(殷)왕조에서는 상(庠)이라 하고 대학은 하, 은, 주 다 같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수단입니다. 이처럼 교육기관이 정비되어서 교육이 보급되고 있으면 일국의 상층부에서는 인륜이 밝아지고 그에 따라서 아래로 백성에게도 화친하여 왕도낙토가 출현됩니다. 장래에는 왕자가 일어난다고 하면 반드시 이 법을 채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은 말하자면 왕자의 전범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나는 지정된 왕자의 스승이기도 할 것입니다.”

  “--”

  “우리 임금님, 이제 말씀드린 방책을 부디 전력을 다하여 실시해 주십시오.

  시경 대아, 문왕편(文王篇)에는

<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라고 있습니다. <주나라는 후직(后稷=주왕조의 개조)이 연 오랜 나라이지만 문왕이 일으킴에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새롭게 예의를 닦았다.>라는 의미로서 문왕을 칭찬한 글입니다. 우리 임금님 이제 우리 임금님이 내가 말해온 왕도정치에 힘을 쓰신다면 나라의 천명을 새롭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등문공장구상3)


3) 정전법


   다년간 사고를 거듭해 온 치국안민(治國安民)의 정책을 맹자는 당당히 설명했다. 이 열변에 움직인 문왕은 그 실시에 마음이 끌린 것인지 수일 후에 가신인 필전(畢戰)을 시켜 조법에 수반하는 정전법(井田法)을 질문하였다.

  “당신의 주군은 인정을 베풀 것을 희망하고 있어서 많은 신하들 중에 당신을 선택하여 나에게 보내어 주었습니다. 아무쪼록 잘 들어주십시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합니다. 인정의 기초는 경지를 공평하게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지구획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지구획이 바르지 않으면 예를 들면 같은 100무라 해도 대소가 생기고, 농민에게 주는 경지도 관리의 봉록도 불공평해 집니다. 그러므로 폭군과 오리는 언제나 경지구획을 적당히 하는 것입니다. 경지구획이 바르면 숫자가 그대로 통용되니까 농민에게 경지를 주는 데에도 관리의 봉록을 정하는 데에도 앉아서 쉽게 할 수 있습니다.”

  “--”

  “등나라는 소국으로 영토도 좁으니까 지배계급인 관리와 피지배계급인 농민과는 분명히 따로 존재합니다. 관리가 없으면 농민을 다스리는 자가 없고 농민이 없으면 관리를 봉양할 자가 없습니다. 곧 국가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려지는 자와의 공존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는 이미 등나라에서는 갖추어지고 있습니다.”(등문공장구상3)

  등나라는 좁은 작은 나라이지만 다스리는 자와 다스려지는 자가 있어서 어진 정치를 행할 소재는 갖추어졌다. 다음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경지를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문제는 경지입니다. 먼저 재향과 서울을 나눕시다. 재향에서는 1리 사방(9백무)의 경지를 일정(一井)으로 하여 그것을 8가족의 농민에게 줍니다. 1정을 9등분하면 우물 정(井)자 형의 100무씩의 경지가 9개 생깁니다. 그 가운데 100무를 공전으로 하고 주위의 8백무를 8가족이 100무씩 사전(私田)으로 분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전(公田)을 그 8가족이 경작하여 그 수확을 상납시키면 9분의 1의 세율의 조법(助法)이 성립되게 됩니다. 서울(都)은 들락 나락하므로 우물 정자(井)자로 가르지 않고 1가족에게 100무를 주어 그 수확의 10분의 1을 자주적으로 상납시킵니다. 그러는 것은 전시가 되면 서울의 주민은 거마(車馬)를 상납할 의무가 있으니까, 평시에는 세율을 낮추어 줍니다. 그리고 경(卿=대신)이하에게는 규전(圭田=제사를 위한 밭)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50무씩입니다. 또 농가의 자제가 16세가 되면 1명에 대하여 25무를 줍니다. 그것은 정지(井地)와는 별도로 구획합니다. 이렇게 하면 재향은 정지에 의하여 통일되고, 농민은 안정되어 향촌에 정착합니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데에도 이주하는 데에도 그 향촌에서 떠나는 일이 없고 8가족이 같은 정지에 다니는 것이니까 오가면서 친해지고 도둑을 막을 때에도 서로 돕고 질병일 때에도 서로 간호하고 친목을 중시하는 평화로운 향촌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서 먼저 공전을 경작하고 다음으로 사전을 경작하도록 지도해가면 공사의 구별이 스스로 밝혀져서 자신의 분수를 알고 군주나 관리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잘 알았습니다.”

  “내가 말한 것은 대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실제로 어떻게 전개하여 어떻게 성과를 올려나갈 것인가는 군공과 당신의 책임입니다. 잘 해보십시오.”(등문공장구상3)


4) 이단의 설을 논파하다


  문공이 맹자를 초빙하여 그 지도하에 정치를 개혁하려고 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져서 일가를 이룬 유세가들이 그렇다면 나도 한 번 해보자 하고서 등나라에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농가자(農家子) 유의 허행(許行)이나 유가(儒家)의 진상(陳相)과 그 아우 진신(陳辛) 등도 섞여 있었다.

  허행은 70명 정도의 제자들과 함께 초나라에서 왔는데 문공으로부터 집을 얻자 서둘러 경작에 종사하여 그 유의(流儀) 대로 갈(褐=천한 사람이 입는 조잡한 옷, 갈옷)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멍석을 짜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 진상 형제는 초나라의 유가로서 유명한 진량(陳良)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쩌다 송나라에 있었는데 쟁기와 보습(뢰사/耒耜)를 짊어지고 찾아왔다.

  “군공은 왕도에 따르는 성인의 정치를 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왕도정치를 행한다면 군공도 성인입니다. 아무쪼록 성인의 백성에 끼게 하여 주십시오.”

  진상(陳相)은 처음에는 유가답게 이렇게 말하고 왔는데, 어느새 허행(許行)과 교제하는 사이에 허행에 심취하여 그때까지 배워온 유학을 버리고 허행의 제자가 되고 말았다.

  맹자는 동학으로서 종종 진상과 대화를 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진상은 갑자기 허행 편에 붙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허행이라는 인물이 이 나라에 와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는 대단한 인물이라서 <등나라 군주는 성군이다. 그러나 아직 참 도를 모르는 모양이다. 참으로 현자란 것은 백성과 함께 경작하고 자급하면서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등나라에는 창고도 금고도 있는 것을 보면, 백성들만 경작시켜 군공은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참으로 현군이라고는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로 훌륭한 의견은 아닙니다.”

  맹자는 진상이 허행과 교제를 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 제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군주라 하더라도 백성과 함께 경작하라. 이것은 농가의 근본적인 주장일 것이나 치자와 피치자를 확연이 나누어 그 공존을 주장하는 맹자로서는 경솔하게 들어 넘길 일이 아니었다.

  “흠, 그것은 조금 중대한 일이다. 그러면 허행은 자신의 식량을 반드시 스스로 경작하여 생산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스스로 옷감을 짜서 옷을 짓고 있는가?”

  “아닙니다. 옷감은 안 짭니다, 갈옷을 입습니다.”

  “관은 쓰고 있는가?”

  “쓰고 있습니다.”
  “그 관은 스스로 옷감을 짜서 만드는가?”

  “아닙니다. 수확한 곡물과 교환합니다.”

  “왜 스스로 만들지 않는가?”

  “농사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솥이나 시루(甑)를 써서 취사를 하고, 철제 농구를 써서 경작을 하는가?”

  “그렇습니다.”

  “그 도구들은 스스로 만드는가?”

  “아닙니다. 곡물과 교환합니다.”

  “곡물을 가지고 도구와 교환하는 것이 도공이나 야공(冶工)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거꾸로 도공이나 야공(冶工)이 도구를 가지고 곡물을 교환해도 농민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허행은 어찌하여 스스로 도기나 철물을 만들지 않는 것인가. 어찌하여 그것들을 일가 내에서 자급하려고 하지 않고 일일이 번거롭게 공인들과 교환하는 것인가. 허행이란 사나이는 대단히 번거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일 것이다.”

  “아닙니다. 번거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드는 것은 도저히 농사를 지으면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다른 것은 할 수 없다.-이 말을 맹자는 진상에게 말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이것저것을 허행에게 가서 질문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야 진상은 맹자의 술수에 들어갔다. 모양을 바꾼 맹자는 훌륭하게 자기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럴 것이다. 농사를 하면서는 도구를 만들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만은 어떻게 하여 농사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일까.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여 공존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교화한다는 치자의 일도 있고, 농, 공, 상에 종사하는 피치자의 일도 있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몸으로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반드시 스스로 만들어서 자신이 쓰도록 무엇이든지 지급자족하게 하려면 천하의 만민을 한 결 같이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자는 마음을 써서 정신노동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힘을 써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다.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사람을 다스리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다스려진다. 사람에게 다스려지는 사람은 사람을 봉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은 사람에게 봉양을 받는다. 이리하여 치자와 피치자의 분수가 확립한다는 것은 천하의 통칙이다.”(등문공장구상4)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자신을 수양하고 그 결과로 집안을 정돈하고 그 결과로 나라를 다스리고, 그 결과로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말이 있다. 유학의 원리의 하나로 치국, 평천하 곧 정치는 수신, 제가 곧 나 자신을 충실히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이다. 곧 유학에서는 정치인은 인간 완성의 최종의 것--문화의 최고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농이나 공을 겸할 수 없고, 공이나 상을 겸할 수 없다면 하물며 농사를 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유가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치자로서 천하의 정치에 당하는 노고는 보통 정도의 일이 아니다. 요임금 시대에는 아직 천하가 평안하지 않았다. 홍수는 천하에 범람하여 위협하고 초목은 자랄 대로 자라서 짐승이 번식하고 아무리 경작에 힘을 써도 오곡은 여물지 않고 중국은 마치 짐승의 집이었다. 요임금은 혼자서 이런 상태를 우려하여 순임금을 천거하여 천하를 다스리게 하였다. 순임금은 익(益)을 기용하여 불을 관리하게 하였다. 익은 산과 늪에 불을 질러 짐승이 도망하고 숨은 것이다. 또 우임금을 기용하여 치수를 하게 하였다. 우는 9개의 대하를 잘 처리하여 사람들은 겨우 이 중국에서 경작하고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우는 치수를 위하여 8년간이나 집밖에서 살았는데 세 번은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한 걸음도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일을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경작하려고 생각해도 도저히 그런 틈이 없었던 것이다. 순은 새로 후직(后稷)을 기용하여 백성에게 농경을 가르쳤다. 후직은 처음으로 법에 맞는 농경으로 오곡을 재배할 것을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오곡은 잘 여물고 따라서 민생은 안정되어 사람들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런데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면 치자의 임무는 다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인간이란 의식이 만족해지면 안일에 흐르기 쉽고, 안일에 흐르게 되어 교육을 베풀지 않으면 금수와 다르지 않게 된다. 순임금은 이런 점을 우려하여 설(契)을 사도(司徒=문부대신)로 삼아 인륜을 가르치게 했다. 그 결과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 간에는 의리가 있고, 부부 간에는 다름이 있고, 장유 간에는 순서가 있고, 붕우 간에는 믿음이 있게 되어 사회질서가 확립되었다.”(등문공장구상4).

  “--”

  “순임금이 익(益)을 써서 이렇게 수고를 하는 동안에 요임금은 순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히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매일 같이 백성을 위로하고 항상 정도로 인도하고 사람다움의 본분을 자득시키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부족함을 위로하고 궁핍함을 구제하고 있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치자로서 이렇게 백성을 위하여 마음을 썼다, 어찌하여 스스로 경작할 여유가 생긴단 말인가.”(등문공장구상4).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충분히 알았을 것이나, 요임금과 순임금은 항상 백성의 행복을 바라고서 늘 백성 위에 마음을 두었는데 그런 만큼 인재를 찾는 일에는 가장 마음을 썼던 것이다. 한 번 인재를 찾을 수 있으면 천하를 들어서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인데, 잘못하여 이상한 인물을 등용한 경우에는 백성의 행복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만다. 요임금이 순임금을 찾을 때까지의 수고는 대단한 것이었고, 순임금이 우임금이나 고요(皐陶)를 찾을 때까지의 수고도 대단한 것이었다. 100무의 경지가 잘 경영되지 않는다는 농민의 걱정은 발밑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요, 순은 스스로 경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뿐이다.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는 군주는 백성에게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이니까 현군이 아니라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다.”(등문공장구상4).

  이 요, 순의 심로함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이러고서는 경작하고 있을 여유가 어디 있을까.--하고 허행의 주장을 논파했다.


5) 사제의 도


  허행의 주장을 논파한 맹자는 이번에는 진상(陳相)에게로 창끝을 돌린다.

  “중원의 문화에서 야만의 이민족을 감화시킨 이야기는 들은 일이 있는데, 다시 거꾸로 야만인에게서 감화된 이야기는 들은 일이 없다. 그대의 스승인 진상은 형만(荊蠻)의 땅이라고 말하는 남방의 초나라 출신인데 주공이나 공자의 도(유학)을 좋아하여 북방인 중원 땅에서 배워 유학의 본판이라고 해야 할 그 땅의 사람들도 그 이상의 인물이 없다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들 형제는 그 뛰어난 진량(陳良)에게 수십 년이나 사사하였는데, 선생이 죽자 그 가르침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제자로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옛날 공자가 죽었을 때 제자들은 선생을 위하여 삼년상을 입고 삼년이 끝나서 짐을 챙기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남아 있는 자공(子貢)에게 인사하고 마주 앉아 큰 소리로 울고 슬픔을 다하여 돌아갔다. 자공은 공자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혼자서 다시 삼년 동안 상을 입었다. 훗날 자하(子夏), 자장(子張), 자유(子游)가 조자(曹子)를 방문하여 동료인 유약(有若)의 풍모가 공자와 닮았으니 공자님을 생각하여 공자를 섬긴 것처럼 유약을 섬기자 하고 주장한 일이 있다. 그때 증자는 <그것은 안 된다. 백포를 양자강이나 한수에서 씻고 가을볕에 빛바래어서 보다 희게 해 보아도 선생님과 같은 청정 결백함은 얻지 못할 것이다. 유약을 선생님의 대용품으로 해보아도 쓸모가 없다.> 하고 언하에 거절했다. 

  증자가 가장 경모의 정으로 모셨다고 하지만 어떻든 이들 제자들이 공자를 경모한 정은 마치 경복에 상당하다. 그에 비하여 그대들의 행동은 무엇인가. 대단히 불쾌하다. 허행은 때까치 같은 소리를 내는 남방의 야만인으로 고래의 성왕의 도를 그릇되다 비난하는 인물인데 이제 그대는 진량이라는 훌륭한 선생을 배반하여 그 허행에게 배우고 있다. 증자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내가 듣기로는 새는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옮긴다는 말은 들은 바가 있으나,  모처럼 높은 나무에서 내려 깊은 골짜기로 내려앉는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


  시경의 노송(魯頌) 비궁편(悶宮篇)에는

<우리 존경하는 주공은 북방의 야만인을 내몰고,

남방의 야만인을 쳐서 징계한다.>


라고 있다. 곧 남방의 야만인은 주공도 쳤던 것이다. 그대가 허행에게서 배우는 것은 분명히 도리에 벗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등문공장구상4)

  가혹하게 고통을 받은 진상(陳相)은 그래도 허행을 변론하고 농가의 중심 주장의 하나인 평등제동의 논(만물의 정조, 미추, 선악을 무시하고 그 가치를 양으로 정하려는 주의)을 꺼냈다.

  “그러나 허행의 방법에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의 가치에 관한 것인데, 포(布)나 백(帛)은 장단,  마(麻), 누(縷), 사(糸), 서(絮)는 경중, 오곡은 과다, 산발(履) 등은 대소가 같으면 모두 같은 가치로 간주하여 가격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에 같은 물품이면 가격은 모두 한 가지라서 나라 안에 거짓이 없어지고 어린 아이를 물건을 사러 보내어도 속이는 일이 없어집니다.”

  “흠, 그것도 좋지 않다. 물건에는 저절로 품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품질의 차에 따라 가격도 혹은 2배가 되고 5배가 되고, 10 배가 되고. 100배가 되고, 천 배, 만 배가 되는 것이 자연이다. 그런데 그 자연을 무시하여 모두를 한 가지로 하자는 것은 천하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품질이 나쁜 신발과 품질이 좋은 신발을 크기가 같다고 해서 같은 가격으로 하면 아무도 품질이 좋은 신발을 만들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행의 방법은 모두가 허위를 행하는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질 이유가 없다.”(등문공장구상4).

   군주도 백성도 같이 경작해야 한다는 개농설(皆農說), 다시 평등제동(平等齊同)의 논-곧 허행한테서 배운 모두를 논파당한 진상은 맥없이 터덜터덜 걸어 돌아갔다.


6) 어머니 장례의 추억


  감기가 원인이 되어서 병을 앓는지 1개월이 지났다. 노령이기도 하여 한때는 매우 쇠약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매우 걱정했다. 끊임없이 제자들이 베갯머리에 와서 간병에 힘썼다. 그런 보람이 있어서 날로 원기를 되찾은 맹자는 요즘 2, 3일은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늦은 봄날의 부드러운 햇살이 드는 방에서 맹자는 마루에서 일어나 앉아 수명이 제자들을 앞에 두고 담소를 하고 있었다.

  “대단히 수고들 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빨리 회복되셔서 다행입니다.”

  “음, 괜찮다. 얼마 없어 회복되겠지.”

  비록 한 때의 일이기는 하였어도 매우 걱정을 한 후인 만큼 이렇게 기분 좋게 말하는 스승을 앞에서 보고 제자들은 기뻤다. 그런 제자들 중에 충우(充虞)가 섞여 있는 것을 보자 맹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였다.

  “오, 충우야, 닷새 전이었던지 너의 꿈을 꾸었다. 제나라에 있을 때 나의 모친이 돌아가셔서 그대를 데리고 노나라에 돌아갔었을 때의 꿈을 꾸었다.”

  “그야말로 죄송합니다. 그 때는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충우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맹자에게 질문했다.

  “아 얼굴이 붉어지고 충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선생님 그 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충우는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맹자는 <말해도 좋지>하는 눈치를 보였다.

  “아니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참고가 될는지 모르니까 말하지.”

  “--”

  “노(魯)나라에서 어머니의 유해를 장사지낼 때에 그 관(棺)과 곽(槨)의 제조를 충우에게 부탁하였다. 덕분에 장례식을 무사히 치러서 제나라에 돌아왔는데 도중에 충우가 관이나 곽이 목재가 비용이 많이 들어서 너무 호사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하고 질문 했다. 결국 충우는 규정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걱정해 주었는데, 그것은 거꾸로 충우가 규정을 몰랐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태고에는 별로 관곽의 규정은 없었으나 주공 이래는 관 뚜께는 7촌으로, 곽은 그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위로 천자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단지 외관을 장식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잘 매장함으로써 비로소 효심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정상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마음에 남을 일이며, 재목이 없어서 그리 할 수 없었다면 그것도 마음에 남을 일이다. 규정상 허용되고 재목도 있는 경우는 옛사람도 모두 7촌 목재를 썼으므로 나만이 사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설명한 것이다.”

  “그때는 전적으로 식은땀을 빼었습니다. 관곽의 규정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면적인 효심에 마음을 쓰지 않고, 외관에만 마음을 썼으니까요.”

  당시를 회상하는 듯이 충우가 천장 한 곳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자 맹자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외관을 훌륭하게 하는 것은 효심의 발로이다. 곧 부모의 유해가 형태를 다해서 아무 것도 없어질 때까지 흙을 그 살갗에 붙이지 않게 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만족하니까. 그런 때문에 훌륭한 관재를 쓰는 것이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서라 하고서 부모에게 쓸 비용을 검약하지는 아니한다.>고 듣고 있는데 부모에 대해서는 밑바닥까지 다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근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공손추장구하7)

  “오늘은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말입니다. 이것도 선생님이 충우의 꿈을 꾸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피곤해지시면 안 되니까. 편히 쉬십시오.”

  맹자가 말을 끝내자 제자들은 제각기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쉬기로 하련다.”

  침상으로 들어간 맹자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잠이 들었다. 그 규칙 바른 숨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안심한 듯이 휴게실로 한 사람 두 사람 떠났다.


7) 묵가를 논파하다


  이런 날이 며칠 이어진 어느 날 맹자가 침상에서 일어나 느긋이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니까, 제자인 서벽(徐辟)이 조용히 들어왔다.

  “기분은 어떻습니까?”

  “아아. 고맙다. 거의 좋아진 것 같은데, 나이 때문인지 아직은 만사가 귀찮구나.”

  “천천히 요양해 주십시오. 그러데 아직 기분이 시원하지 않으신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저합니다만 실은 전날부터 저 묵가(墨家)인 이지(夷之)가 선생님을 뵙고 싶으니 사정을 알아봐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만.”

  묵가인 이지(夷之)가 등나라로 옮아 온 것은 맹자도 듣고 있다. 묵가라 하면 그 당시에는 천하에 유행하던 학파로서 맹자는 사설로서의 경향이 두드러진 것으로서 그 박멸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지인가. 이지라면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다. 좋은 기회이기는 한데 내가 아직 몸이 시원치 않아서 더 회복되면 내가 찾아간다고 그리 전해주게.”

  “예, 잘 알았습니다. 몸조리 잘 하십시오.”

  서벽은 이윽고 스승의 병실에서 떠낫다.

  그로부터 수일이 지나서 서벽이 다시 모습을 보이자 맹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서벽인가. 이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무엇이라 말하던가?”

  “예. 선생님의 말씀대로 전했습니다만 될수록 빠른 시일 안에 만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찾아가 뵙고 왔습니다만.”

  “그런가. 내가 가기에는 아직 무리가 될 것 같으나 그 쪽에서 와주신다면 만나도 좋을 것 같구나. 나도 가능하다면 빨리 만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묵가의 설은 분명한 사설로서 이것을 논파하지 않으면 우리 유학의 바른 도가 천하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특히 묵가의 사설을 바로잡는 것은 나의 염원이다. 묵가의 주장의 중심은 겸애(兼愛)와 절검(節儉)인데, 겸애이기 때문에 육친에 대한 특별한 친근함을 제거하고, 절검하기 때문에 예악을 간소하게 하여 이 둘을 합치면 박장(薄葬) 곧 장례를 간단하게 한다는 것이다. 묵가는 장례에 대하여 항상 이 박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주장과 반대된다. 우리들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효심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장례를 훌륭하게 치러서 예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지(夷之)는 묵가이니까 당연히 박장을 존중하고 그것을 천하에 보급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듣는 바에 의하면 이지는 부모의 장례를 후하게 지낸 모양이다. 그렇다면 항상 스스로 경멸하던 방법으로 부모를 섬긴 것이 되어 커다란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데, 대강 그 주장에 자신을 가지지 못한 것일 것이다.”

  병후의 노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전도로 맹자의 이야기에는 열기가 있었다. 듣고 있노라니 서벽은 어느새 끌리어 이 스승의 말씀을 이지에게 알리면, 이지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하고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는 스승의 앞에서 떠나자 바로 그 발로 이지(夷之)를 방문하였다. 서벽한테서 일부 시종을 듣고서 이지는 말하였다.


  “유가의 교전(敎典)인 서경의 강고편(康誥篇)에

<옛날의 성왕은 우리 집의 아기(赤子)를 편안히 하는 것처럼 천하의 백성을 편안히 한다.>


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나는 사랑에는 어떤 차별이 없고 단지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육친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라는 순서를 말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마치 무차별 평등의 겸애를 나타내고 있는 셈입니다.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겸애에 따라서 언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극히 조금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것이지만 순서로서 육친으로부터 사랑을 실행한 것일 뿐 무슨 주장과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벽은 다시 맹자에게 돌아와서 그 경위를 알렸다. 맹자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지는 서경의 말씀이 형의 아기도 이웃의 아기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첫째 그것부터 틀렸다. 그 말씀은 그런 겸애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기어가서 우물에 떨어지는 것은 우물에 떨어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서 아기의 죄는 아니다. 그와 같이 백성이 죄악을 범하는 것은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 옛날의 성왕은 아기를 우물로부터 지키듯이 백성을 죄악으로부터 지켜서 편안하게 생활하게 했다.>라는 비유이다. 원래 하늘이 사물을 생기게 할 때에 그 본을 하나로 하고 있다. 인간도 그대로여서 양친에게서 태어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따라서 사랑도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근본적인 것이라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는 차별이 있는 것이 자연이다. 그것을 이지는 다른 사람의 양친도 자신의 양친도 무차별로 보고 평등하게 사랑하고 단지 순서만 자신의 양친으로부터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무리가 있는 것이므로 그런 때문에 서경을 이상하게 해석하거나 겸애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부모를 위해서는 훌륭하게 장례를 치른다고 하는 것이다.”

  “--”

  “생각하면 오랜 옛날에는 그 부모를 장례를 치르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죽었을 때에는 몰래 골짜기에 버린 것이다. 후에 그 곁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너구리가 뜯어 먹고 파리와 모기가 그것을 빨고 있었다. 너무나 비참한 관경이라서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도저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식은땀을 흘린 것은 남에게 보이면 부끄럽다는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워서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정이 자연히 이마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도로 집에 돌아가 삽과 괭이를 가지고 와서 부모의 시체를 덮은 것이다. 그런데 그 덮는 마음이 인정에 맞는 것이라면, 효자와 인인이 부모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것은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닌가. 묵가는 박장을 주장하는데 박장을 극단으로 권장한다면 부모의 시체를 골짜기에 버리게까지 될 것인데, 후하게 부모의 장례를 치른 이지는 그래도 좋다는 것일까.”

  서벽이 다시 이지에게 말하자 이지는 다 듣고서 망연히 있었으나, 조금 있다가.

 “고마운 일이다. 맹 선생은 나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하고 속삭였다.

(문공장구상5)


8) 공로가 있어 봉록을 준다


  산과 들이 신록 일색으로 물들 무렵, 맹자는 원기를 되찾았다. 문공을 알현하고서 어진 정치를 설명하고 제자들과 함께 도를 강의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는 어느 날 조정에서 퇴청한 맹자를 붙잡고 제자인 팽갱(彭更)이 질문을 한다.

  “수십 대의 수례와 수 백 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제후에 제후로 차례차례로 봉록을 받으며 건너는 것은 분에 넘친다. 너무 호사스러운 것은 아닙니까?”

  등나라에 초빙되었을 때 맹자에 따라 온 제자는 수 백인에 이른다. 위나라로부터 시작하여 제나라, 송나라와 유세를 하는 동안에 각각의 나라에서 입문하여 그대로 따르는 자가 누가된 때문이다. 가장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제국을 도는 것은 별로 맹자에 한하는 일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허행도 초나라에서 등나라로 옮길 때에는 70명 남짓한 문인을 거느리고 왔다. 곧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일반적인 풍조였던 것이다. 그것은 문화가 보급됨에 따라 지식인이 증가하고 그들이 지식이나 기술을 직능으로 하는 지식계급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느 면에서는 비판되어야 할 현상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팽갱의 질문 속에는 이러한 사정이 숨겨져 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선택한 지식인을 목표로 하는 삶의 방식에 의문을 느낀 것이었을까.

  “혹시 도의에 벗어나서 부당한 인자가 개재되어 있다면, 단지 하나의 광주리에 담은 식물이라도 남에게서 받으면 안 된다. 정당하고 도의에 맞는다면 순임금이 요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은 것마저도 분에 넘치는 호사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대는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등문공장구하4)

  “아닙니다. 그것은 나도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높은 뜻을 가진 선비가 일다운 일도 아니하고서 봉록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맹자는 일찍이 공손추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언제였던가.


공손추는 시경의 위풍(魏風). 벌단편(伐檀篇)의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마라.(素餐兮)>


라는 구절을 찾아서 군자가 경작하지 않고 먹는 것은 이 시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들었다. 그 때 맹자는

  “군자가 한 나라에 살고 있어서 그 임금이 그를 채용하면 나라는 편안하고 부유해지며, 존귀하고 번영해진다. 그 나라의 자제가 그의 뒤를 따르면 효제충신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일하지 않고 먹지 않는다.>라는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다시없을 것이다.”(진심장구상32)

  라고 대답하고 일국을 안부존영(安富尊榮)시켜 또 일국의 자제를 효제충신으로 이끌고 군자의 임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득시켰는데 이것은 맹자의 생애를 통하여서의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은 확실히 지식인으로서 힘을 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을 팔아서 녹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부의 성을 충실히 하고 끝없이 확충된 선을 가지고 어진 정치를 천하에 실현하여 만민을 구제하는 것이다. 일이라고 하면 이보다 위대한 일은 없지 않은가.

  이런 의미를 품고 힘차게 말한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만일 사람이 일로 서로 돕고 그 성과를 융통하고 유무가 통하지 않는다면 농민은 곡물은 남지만 의복이 없고, 직조공은 옷감은 많으나 곡물은 없다는 상황이 될 것이다. 또 만일 융통하게 되면 목수라도 수레를 만드는 사람도 각각 그 일에 힘씀으로써 의식을 손에 넣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통칙이다.

  이제 어떤 사람이 있어서 집에서는 효도하고 사회에서는 웃어른을 공경(悌)하며, 성현의 도를 지켜서 학문을 후세에 전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훌륭한 일이 아닌가. 의식주 등은 단연 융통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만 융통하지 않는다면 목수나 수레 만드는 사람만을 존중하여 인의를 닦는 도덕가를 경멸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그런 어리석은 일이 있어서 좋을 이가 없다.“

  “목수와 수레 만드는 사람은 그들의 목적이 기술을 가지고 의식을 구하자는 데에 있다. 그런데 군자가 인도를 실천하는 것도 역시 그 목적이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을 구하자는 데에 있는 것인가.”

  “목수 등은 의식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군자가 도를 닦는 것도 목적은 의식을 구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까?”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만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의식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거나 아니거나 그것을 줄 만큼의 공로가 있으면 의식은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 대체 의식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을 주는가. 아니면 공로가 있으면 주는가?”

  “의식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줍니다.”

  “그러면 듣겠는데, 일솜씨가 서투른 사람이 기와를 깨거나, 벽에 칠을 잘못하여도 의식을 얻을 목적으로 그러고 있는 것이라면 의식을 주는가?”

  “아닙니다. 안줍니다.”

  “그러면 목적하고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고, 공로가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닌가. 인의를 닦아서 제후에게 설명하는 우리들의 공로는 위대하니까 상당한 대우를 받아도 당연하다. 분에 넘쳐서 호사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등문공장구하4)

  일찍이 공손추에게 대답했을 때와 같이 팽갱(彭更)에 대해서도 맹자는 자신을 가지고 회답했다.

  그런데 맹자가 등나라에 초빙되어서 약 1년이 지났다. 약 1년 사이에 그는 허행의 제자가 되어버린 진상을 공격하기도 하고, 묵가의 이지(夷之)를 논파하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의 생활의 중요한 일면이었는데 문공의 왕도정치를 설득하여 어진 정치를 실시하게 하는 데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9) 독립을 유지하는 방법 두 가지


  등나라도 송나라와 같이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있는 소국이다. 곧 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서 끊임없이 그 압박을 받는 소국이라는 점에서 송나라와 같은 조건에 있었다. 일찍이 송나라에 있었을 때 맹자는 제자인 만장(萬章)으로부터 소국이 대국 사이에 있어서 왕도정치를 행해보아도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했던 일이 있었는데, 같은 위구심은 문공에게도 있었다. 과연 문공은 맹자의 인격을 경모하고 그 가르침에 경도하여 모처럼 그를 초빙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열심히 어진 정치를 목표로 하고 있어도 그 성과는 오르는 성질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제나라와 초나라의 압박이 점차 도를 더한다면 가지가지의 곤혹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도저히 독립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제나라나 초나라 중 어느 나라에 속국이 되어서 그 비호를 받을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제나라를 섬길 것인가, 초나라를 섬길 것인가.”

  때로는 이런 질문이 신음 소리처럼 문공의 입에서 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맹자는

  “제나라를 섬기는 것이 좋은지, 초나라를 섬기는 것이 좋은지는 나로서는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혜자를 둘러 파고 성을 쌓아서 백성과 함께 농성하여 제나라나 초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와도 백성이 군공의 덕을 사모하여 죽음을 바치더라도 용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한 결 같이 어진 정치를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부질없이 초대국의 동향에 위협당하여 그 어느 쪽을 섬길 것인가 하고 방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국이라 하여도 긍지를 높이 가지고 감연히 독립의 길을 걸어야 한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는 십이분 민심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한 어진 정치이다. 어진 정치에 힘쓰는 것은 변전하는 국제간에서 현실에 맞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실은 소국이지만 그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변하지 않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등나라의 이웃에 설(薛=山東省 滕縣 東南)이라는 소국이 있었는데, 그 소국이 갑자기 제나라 대군에 습격당하여 영토를 잃어버린 것이다. 제나라가 초나라와의 국교가 의심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그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이웃 소국을 침략하였기 때문이다. 설 땅에는 날마다 제나라 군대가 와서 여기저기에 축성공사가 시작되었다. 설 다음에는 아마도 제나라의 마수는 등나라로 미칠 것이다. 마침내 대국의 침략이 막 다가온 것이다.

문공은 재빨리 맹자를 초청하여 상담했다.

 “선생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제나라는 설을 빼앗아 성을 쌓고 있소. 다음에는 등나라를 노리게 될 것이오. 노리고 있음을 알고도 우리 등나라는 소국이고 손쓸 방법이 없소. 아무리 성의를 다하여 대국을 섬겨 보아도 멸망의 운명은 면할 수 없을 것이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날 주(周)나라 대왕이 빈(邠=豳, 陝西省枸邑縣)에서 기산(岐山=陝西省岐山縣) 기슭으로 옮긴 것처럼 평화로운 신천지를 찾아 옮기는 것입니다.”(양혜왕장구하14)

  대왕은 문왕의 조부로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으로부터 11대이다. 빈(邠)으로 옮겨 그 땅을 개척한 공류(公劉)로부터 9대로 이 대왕 무렵부터는 주나라는 차차 나라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대왕은 흔히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유업을 거두어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이런 어진 정치의 결과 백성은 대왕에게 따르고 빈은 평화롭게 다스려졌는데, 돌연 서북방의 야만인인 융적(戎狄)의 공격을 받았다. 대왕은 여러 가지의 재물을 제공하여 한 번은 그 침략을 막았는데, 맛을 본 융적들은 다시 내습하여 빈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지나친 요구에 백성들은 싸워서 이를 물리치려 했는데 대왕은

--영주는 백성을 행복하게 생활하게 하는 것이 임무이다. 융적의 요구는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곧 영주인 나를 나가라는 것일 뿐으로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있으나 전쟁은 어떻게든 백성을 불행하게 할 뿐이다. 그런 것은 백성의 행복을 바라는 영주로서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여 기산 기슭으로 옮겼다 한다.

  이제 맹자는 그것을 예로 든 것이다.

  “대왕이 빈에 있을 때 융적 등이 침략해 왔습니다. 피폐(皮幣=동물의 가죽과 옷감), 개와 말, 주옥(珠玉) 같은 재물을 제공하였지만 침략이나 압박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장로를 모아서 <융적 등이 바라는 것은 이 빈(邠)이라는 땅이다. 나는 군자란 백성을 봉양하는 토지를 둘러싸고 거꾸로 백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듣고 있다. 그대들은 영주가 없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백성들의 행복을 위하여 이 땅을 떠나려 한다.>고 알렸습니다. 빈을 떠나 양산(梁山)을 넘어서 기산(岐山) 기슭에 닿아 그곳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빈의 백성은 <인덕이 높은 영주이다. 헤어져 견딜 수 없다.>고 하여 대왕의 뒤를 사모하여 기산 기슭으로 옮기는 사람이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처럼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쟁란의 땅을 떠나서 신천지를 여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은 국토는 선조대대로 이어온 것이므로 제멋대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방법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어느 방법을 골라도 항상 어진 정치를 베푸는 것이 근저가 됩니다. 어진 정치에 힘쓰는 것, 이것이 군주의 분수이고 성공 여부는 천명입니다.”(양혜왕장구하15)

  대왕이 빈에서 기산 기슭으로 옮긴 것은 기산 기슭 쪽이 좋은 곳이라고 해서 옮긴 것은 아니다. 융적의 침략을 받아서 하는 수 없이 옮긴 것이다. 융적과 한 번 전쟁을 하려 한다면 못할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 가운데는 그것을 희망하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하면 비록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반드시 백성을 상처 내게 된다. 그것이 대왕으로서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주로서 백성의 자식을 죽이고 혹은 백성의 부모를 부상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왕은 백성의 행복을 바라고 빈을 떠난 것이다. 그러자 그 인덕을 느낀 빈의 백성들은 서로 협력하여 대왕을 좇아서 기산 기슭으로 옮긴 것이다.

  군자는 그 사람을 먹이기 위하여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그러한 어진 정치를 행함으로써 대왕은 빈을 잃었지만 동시에 기산 기슭에 신천지를 열었다. 곧 그 신천지야말로 어진 정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대왕은 그 후에도 백성과 함께 걱정하고, 백성과 함께 즐겨서 어진 정치에 힘써, 마침내 그 자손들 중에서 왕자를 낳은 것이다. 주(周)왕조는 그렇게 하여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대왕은 쟁란의 땅을 떠나서 신천지를 여는 데에 성공하였는데 그 근저에는 항상 어진 정치가 있었다.

  온 힘을 다하여 조상 전래의 땅을 사수한다는 방법도 평상시에 어진 정치가 있어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요즘의 어진 정치의 결과 백성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인륜을 몸에 익히고, 군주를 사모하고, 영토를 사랑해서야 비록 대군의 침략을 받더라도 군주에게 결집하여 한 걸음도 물러서는 일 없이 그 땅을 지키려고 하는 기개가 생기기 때문이다. 만일 날마다의 어진 정치가 없었다면 민심은 군주로부터 떠나고 군주와 함께 국토를 지키려고 하는 기개는 없고, 군주가 아무리 조상 전래의 땅을 사수하기를 바라고 있어도 혼자만으로는 하는 수가 없을 것이다.

  대국을 섬겨보아도 멸망은 분명하다. 그래서 대국의 침략은 반드시 있다고 하여 소국으로서 취해야 할 방법은 국토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기든지, 사수하든지의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이 두 방법의 어느 것이거나 어진 정치를 근저로 한다. 제나라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맹자가 문공에게 어진 정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10) 독립의 성공 여부는 천명

 

  그런데 이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느 것을 따른다 해도 그 결과는 좋아지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어진 정치가 완전하게 행해지고 백성은 한 없이 군주를 사모한다고 하자 게다가 대국의 침략을 받는다. 군민 일체가 되어서 국토를 사수하려고 한다. 그러나 힘의 차가 너무 두드러져서 아무리 용전분투하더라도 전멸할 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쟁란의 땅을 떠나서 신천지를 구한다고 해도 대왕처럼 잘 되면 좋으련만 만족하게 신천지를 찾을 수 없을 수도 있고, 찾았다 하더라도 그 후 생각지 못한 고난이 생겨서 끝내는 멸망하는 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을 맹자로부터 들은 때에 아마도 문공의 흉중에도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데 맹자는 그것은 천명이라고 한다. 사람의 힘 이상의 인력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해서 하고, 인사를 다스리고 다음은 천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성공해야 할 방책을 강구하여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천명이다. 그 경우는 성공, 실패는 문제가 아니고 자신의 과실이 없는지, 마음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모든 것을 반성해보고 자신에게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면 천명이라고 해서 체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빈을 떠난 대왕의 자손들이 왕자가 된 것처럼 선(善)이 쌓여서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장래의 희망으로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항상 선을 쌓고 후세에 자손들이 이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문공에게 제나라의 침공을 걱정하기 전에 한 결 같이 어진 정치에 힘쓰라고 말하는 것이다. (양혜왕장구하15)

  문공이 맹자가 말한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쪽을 따랐는지 혹은 그 어느 쪽에도 따르지 않았는지 그것은 모른다. 어떻든 등나라는 맹자가 거기를 떠난 후 멸망한 것은 사실인데, 맹자는 아마도 문공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을 간직하면서 천명을 따라 떠난 것일 것이다. 일찍이 송나라에서 만장(萬章)이 질문을 하였을 때 소국이라 하더라도 어진 정치에 힘쓰면 천하의 왕자답게 될 수 있다고 단정한 맹자는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음에 따라 차차 천명을 이해하고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한도를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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