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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월요단상

아 우면산! 그때가 그립다

간천(澗泉) naganchun 2011. 8. 1. 04:48

 

아 우면산! 그때가 그립다

 

 

20년이나 이전의 이야기이다. 나는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4년을 우면산 북서쪽인 남부순환도로에서 200 미터쯤 떨어진 방배 2동에서 살았다. 우면산이 집에서 가까워서 80년대 후반부터 휴일이면 거의 우면산을 찾았다.

내가 다니던 길은 두 코스였는데 하나는 남부순환도로 입구로 입산하는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산 남서쪽 보덕사 앞으로 입산하는 것이다.

때로는 남부순환도로 입구에서 올라 산을 넘어서 보덕사 앞으로 내리기도 하였다.

 

새벽 남부순환도로 입구에서 입산하여 어두컴컴한 나무 아래 좁은 길을 올라가노라면 앞에 가는 사람도 있고 벌써 내려오는 사람도 보인다. 산에서는 누구든지 먼저 본 사람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있다. 어두워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른 봄이면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어서 봄을 알려주기도 하고 숲 속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곱게 피어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올라가다가 나무 사이로 하늘을 처다 보면 마치 내가 하늘로 붕 떠오르는 듯한 쾌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영롱한 새소리도 들을 수 있어서 잠시 속세를 떠난 기분을 느끼곤 하였다.

 

여유가 있는 휴일에는 다른 코스로 우면산을 오른다. 그 때 우면산 남서쪽에는 논과 밭이 펼쳐진 들판이 있고 채소를 재배하는 농원도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초라한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사는 작은 동네가 있었다. 우리 내외는 들판 길을 따라서 보덕사 앞을 지나 남서쪽 능선으로 오른다. 한 20분 정도 오르면 매우 가파른 길을 기듯이 다시 올라가서 약수터에 이른다, 내려오는 길에는 농원에 들러서 채소와 과일을 싸게 사고 오곤 하였었다.

 

그때는 약수터에 간단한 운동시설이 있을 뿐 그야말로 산이었다. 약간 계곡 가로 난간이라도 설치했으면 좋을 것 같으나 그런 일까지 손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산이 산다워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배낭에 물통을 지고 간다. 수돗물보다 좋다는 약수를 뜨기 위해서이다. 이 약수로 동치미도 만들고 물김치도 만들어 먹었다. 한 참 올라가 약수터에 이르면 이미 줄지어진 물통을 차례로 놓고 운동을 하며 사람들과 담화도 나누곤 하였다.

 

이곳에는 유명 인사들이 많이 오는 곳이기도 하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두운 나무 아래를 자그만 몸매에 중얼거리며 가는 노인이 있었다. 그 뒤를 천천히 따르며 들으니 옛날 서당 훈장님이 한시를 읊던 그 소리와 닮은 한시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란 시를 읊으며 올라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젊었으니 그 옆을 지나며 인사를 하고 먼저 약수터에 올랐다. 미리 와있던 H씨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그 노인이 올라왔다. H씨는 “안호상 박사 오셨군!” 하시더니 다가가 인사를 한다. 그제야 아 저분이 안호상 박사로구나 하고 나도 다시 인사를 했다. 그는 그때 90세인데도 종종 이 산을 오른다고 하셨다. 그는 건국 초대 문교부장관으로서 일민주의를 제창하기도 하여 사진으로는 봐왔지만 실 인물은 본 일이 없으니 알아볼 수가 없었으며 게다가 연세가 90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종종 이 산을 오르며 97세의 천수를 누리셨다.

70년대 중반부터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교육계의 원로이시며 교육감도 역임하시고 현역 국회의원이시기도 한 H씨도 자주 오시며, 한나라당 극우 의원이라는 평을 받던 K씨도 거기서 선거운동을 하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다니지 않은 20년 가까운 세월에 산은 인간의 탐욕의 갈고리로 헐리고 찢기어서 이번 놀랍고 처참한 산사태를 빚어내게 된 것이 아닌가.

이 산은 서울 남부의 허파구실을 하고 시민이 쉽게 찾아가서 휴식과 운동을 하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나 또한 깊은 산으로 산행은 하지 못해도 이 우면산은 적어도 5, 6년 동안 백 수십 번은 오른 곳이다. 그래서 그렇게 좋은 산이 재앙을 일으키는 산으로 돌변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리다니 재난이 없이 산 그대로였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

 

<장자>에 이런 우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남해에 사는 숙(儵)이라는 신과 북해에 사는 홀(忽)이라는 신이 중앙에 사는 혼돈(渾沌)이라는 신을 방문하였다. 중앙의 신인 혼돈은 이들의 방문이 하도 반가워서 후히 대접하였다. 그러자 이 후한 대접을 받은 숙과 홀이라는 신들은 그 후한 대접에 사례를 하기로 하였다.

“원래 혼돈은 눈도 코도 입도 없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하고,

보통의 인간처럼 눈과 코와 입 등 구멍을 뚫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만 혼돈은 죽고 말았다.

 

산은 자연 상태에서 우리 인간에게 연료,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동식물, 아름다운 풍치, 심리적으로 안정과 풍요 등 수없이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산이 원하지도 않은 제 마음대로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무리하게 눈과 코와 입 같은 구멍을 파듯이 헐고 있어 산이 그대로의 산이 아니고 죽은 산이 되어가고 있으니 잠자코 있을 이가 있겠는가? 전국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난개발이 빚어낸 재앙이 아닌가.

우리 인간은 산이 원하는 바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면 산신령이 노하지 않을까? 하고 외경의 생각을 가지고 대처래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우면산은 어떻게 복원될 것인가 걱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