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을 둘러보며
백화정
어제 부소산을 오르지 못한 때문에 오늘은 일정이 바빠서 새벽 6시 40분에 내자와 함께 여사를 떠나 부소산을 올랐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부소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비문을 이용할 수가 없어서 후문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이곳은 주민들의 운동 코스로서 아침에는 산에 오르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쌍쌍이 짝을 지어서 산으로 오르는 사람이 많았다. 후문 매표소에 열려있는 작은 문을 들어서니 쭉쭉 곧게 뻗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시원하고, 산책로는 널따랗게 정비되어 있었다.
간밤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였으나 새벽 숲 속 공기를 마시니 가슴이 깨끗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 사자루 근처의 광장을 좌로 돌아서 낙화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잘 다듬어진 산책길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꾸불꾸불해지더니 돌계단으로 변하였다. 돌계단을 내려가기 200여 미터 앞에 낙화암 백화정(百花亭)이 눈앞에 보인다. 백화정 아래에서 난간 가에 서서 멀리 백마강교를 내다보며 천 삼백여 년 전에 3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 과연 3천 명이나 많은 궁녀들이 있었는지 의심이 되지만 부소산성을 밀고 궁성으로 쳐들어온 당나라 군사들에게 몸을 더럽히며 살아날 생각은 차마 하지 않았을 터이니 막다른 길이라 백마강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아리따운 젊음을 꽃처럼 날려 떨어지는 장렬한 죽음 앞에 당나라 군사들도 간담이 서늘하였으리라.
한 많은 나라의 멸망 앞에 몸을 던져 죽어 간 수 많은 원혼을 달래려 묵념을 하고서 기념사진을 찍으려하는데 마침 건장한 체구의 장년 한 분이 셔터를 눌러주고는 백마강에 얽힌 전설을 한 마디 들려준다. “저 앞에 보이는 다리를 백마강교라고 하는데 백제가 멸망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써서 용을 낚았다고 하여 저 백마강교에서 밑으로 내려가서 백제대교 까지를 백마강이라 한다고 하며 용을 낚았다는 바위를 조룡대라고 한다.”고 말했다. 침략군의 장수라고 영웅적인 전설을 누가 만들었는지, 점령군 장수노라고 백제의 문화유산인 정림사 오층석탑에 대당평백제국(大唐平百濟國)이라고 곧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고 자기의 전승 기록을 남기는 무모하고도 오만방자한 침략군에 짓밟힌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그것을 전설이라고 전하는 이 고장 사람들은 이런 전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백제를 멸망하게 한 의자왕은 과연 전해지는 대로 포학무도한 군주였을까? 과연 3천이나 되는 궁녀가 있었단 말인가? 천년이 넘은 옛 이야기라고 해서 일방적인 침략군에 유리한 전설을 그대로 전해주어야 할 것인가? 하고 의아심을 지닌 채로 고란사로 내려갔다.
또다시 200여 미터 돌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니 아주머니 한분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3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 이 고란사라 하고, 의자왕이 이 낙화암 바위틈으로 흐르는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물을 길어가는 궁녀가 이 낙화암 바위틈의 약수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위에서 자란 고란초 잎을 띄워서 바쳤다 한다. 새전함에 약간의 새전을 올리고 합장하여 기도를 드렸다. 몸을 날려 자결한 3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고 싶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여행길에 안전을 빌기도 하였다. 원래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니 산사에 들러도 합장 기도 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나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는 한정된 종교라는 것은 없어졌다. 의식에는 익숙하지 않으나 기독교이건 천주교이건 불교이건 숭앙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종영각(鍾靈閣) 앞을 돌아 뒤로 가서 바위틈으로 흘러나와 고인 약수를 마시고 상자에 담겨진 고란초를 관상하고 돌아 나왔다. 십여 년 전에는 암벽에 고란초가 자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람의 발길이 잦아서 그러한지 보호하기 위하여 화분에서 기르는 모양이다. 그리고 약수도 그냥 바위틈에서 떠 마셨던 것 같은데 양철 판으로 막아 자루가 긴 국자로 떠 마셔야 했다. 기왕이면 자연 친화적으로 바위와 어울리는 돌로 테두리를 짰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관광도 좋지만 그로 인하여 자연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어느덧 한 시간 반이나 지났다. 이제는 도로 돌계단 길 400여 미터를 올라가야 하는데 기가 막힌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유람선도 뜨지 않는 시각이다. 어떻든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숨이 턱턱 막힌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특히 내자는 고혈압인데다 아침에는 약도 마시지 않았다는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서너 번 쉬엄쉬엄 숨을 고르고서 힘들이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사람이 다니기 좋도록 만든 계단이라면 다른 산책로처럼 매끈한 돌로 깔아 놓았으면 오르고 내리는 데 덜 힘들지나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내리막길이니 슬슬 사자루 앞을 지나 내려가다가 삼충사 앞을 지날 때에는 잠깐 멈추어 서서 울타리 너머 전각을 한 참 쳐다보고는 다시 걸으며 백제의 충신 흥수(興首)와 성충(成忠), 그리고 계백(階伯) 장군의 전설을 내자와 이야기 하며 하산했다. 흥수와 성충은 적이 침공해올 것을 예감하고 기벌포와 탄현 안으로 적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충언했는데 어쩌다가 의자왕은 간신의 말만을 듣고 충신의 충언은 받아들이지 못하여 5백년 사직을 망쳐버렸단 말인가. 현대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요즘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과거를 캐는 작업을 시작할 모양인데, 지나간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응징하거나 역사의 사실을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고 오히려 백제의 멸망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의 진상과 그에 관련되는 사실을 밝혀 교훈을 삼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면 6. 25전쟁은 한국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식의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돈다는 말이 있다. 백제의 멸망에서 우리는 오늘을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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