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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구드래 나루’에서

간천(澗泉) naganchun 2010. 10. 14. 05:00

 

‘구드래 나루’에서

 

 

 

 

 

 

 

 

 

 

 

 

 올 가을 대전에 일이 있어서 들르는 김에 백제의 옛 서울 부여를 보기로 했다. 대전에서 오후 2시 반에 직행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공주박물관을 둘러보고, 다시 부여행 버스를 타고 부여에 갔더니 저녁이 되었다. 부소산을 오를 양으로 그 가까운 곳에서 길을 물으니 친절한 아주머니가 길을 안내해주면서 말하기를 이 시간에 오르면 어두워서 돌아오는 일이 문제가 되므로 내일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덧 시간은 다섯 시 반을 지나 짧은 가을 해가 막 넘어가려는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구드래 나루를 찾아 해지는 백마강가에서 어둠이 깔리는 잔잔한 강상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백제 멸망의 순간에 잠시 마음이 붙잡힌다.

 

  ‘구드래 나루’란 부소산 서남쪽 기슭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로서 지금은 고란사에서 구드래 나루까지 유람선이 내왕하는 작은 나루에 지나지 않으나 그 옛날 백제가 흥왕할 때는 백제에서 백마강과 금강을 타서 일본으로 중국으로 돛배가 드나들던 국제 무역의 관문이었던 곳이다. 왕인(王仁)이 논어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기도 하였고, 많은 왕족과 공장(工匠)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게 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백제(百濟)’를 “구다라”라고 발음하는데, 이 “구다라”라는 말은 일본에 대륙의 문물이 들어가게 한 백제의 관문 “구드래“를 일컫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내일 새벽에 낙화암을 찾기로 하고 가까운 곳 여사에 들었으나 그 옛날 백제가 멸망하면서 의자왕이 치른 일들을 상상하며 가슴이 아파 옴을 느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사비성이 함락되어 의자왕이 이 구드래 나루터에서 당나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백제 사람들이 울며 전송했다는 곳이기도 하므로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기에 나라를 잃고 포로로 갖은 수모를 당해가면서 끌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나라를 잃은 슬픔보다는 한 나라의 왕이 적군에 의하여 끌려간다는 슬픈 사실을 눈앞에서 보며 울부짖는 백제 사람들의 천진하고 처절한 마음은 짐작하기에 남음이 있다.

 

  의자왕은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백제의 오랜 전통에는 다른 나라의 혈통을 받은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금기시 되어있었다 한다. 그러나 의자왕이 왕자시절에는 신라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극복하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포섭하기에 힘쓰는 한편, 부왕인 무왕과 모후인 선화공주에게 극진히 효도를 다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결국 나이가 40이 되어서 태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자 반대세력을 거세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고, 신라를 침공하여 100여성을 함락시켜 국토를 확장하는 등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재위 20년 중 초기에 이룩한 업적과는 달리 신라의 적의를 크게 자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득세한 왕으로서의 오만이 생겼는지 국정을 소홀히 하고 충신의 충간을 물리치며 주지육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이라도 했어야 할 터인데, 살아서 당나라에 끌려가는 그 처량한 모습에 백성들은 얼마나 원망하였으리.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은

 

  “비바람 처량한데 나라는 잃고

  강 물결 유유한데 꽃은 다 졌네.

  머나먼 저승길을 누가 벗 했을까.

  강남의 옛 임금님 따라 갔으리.”

 

하고 나라 잃고 이국인 당나라에서 죽은 의자왕의 원혼을 슬퍼하고 있지만, 이제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재조명하고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민족과 국토의 통일을 위해서 백제 멸망의 역사를 비롯하여, 근세 조선말기의 대원군 납치 사건이라든지, 6. 25전쟁 당시 중공군의 대거 개입으로 통일의 기회를 잃은 것이라든지. 요즘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지역 정부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고구려의 대를 이은 발해의 유적을 자기 나름으로 발굴 복원하고 있다 하니 그들의 간교한 의도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발해의 역사, 북간도의 문제 등을 밝히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어쩌다 미묘한 국제 관계 속에서 우리 국토의 통일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중국의 부당한 개입을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구드래 나루’에서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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