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포탄(黃浦灘)의 추석(秋夕)
피천득
월병(月餠)과 노주(老酒), 호금(胡琴)을 배에 싣고 황포강(黃浦江) 달놀이를 떠난 그룹도 있고, 파크 호텔이나 일품향(一品香)에서 중추절(仲秋節) 파티를 연 학생들도 있었다. 도무장(跳舞場)으로 몰려간 패도 있었다. 텅 빈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와 책을 읽으려 하였으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를 가겠다는 계획도 없이 버스를 탄 것은 밤 아홉 시가 지나서였다. 가든 브리지 앞에서 내려서는 영화 구경이라도 갈까 하다가 황포탄 공원(黃浦灘公園)으로 발을 옮겼다.
빈 벤치가 별로 없었으나 공원은 고요하였다. 명절이라서 그런지 중국 사람들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 밤뿐 아니라 이 공원에 많이 오는 사람들은 유태인, 백계(白系) 노서아 사람, 서반아 사람, 인도인들이다. 실직자, 망명객 같은 대개가 불우한 사람들이다. 갑갑한 정자간(亭子間)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누런 황포 강물도 달빛을 받아 서울 한강(漢江) 같다. 선창(船窓)마다 찬란하게 불을 켜고 입항하는 화륜선(火輪船)들이 있다. 문명을 싣고 오는 귀한 사절과도 같다. '브라스 밴드'를 연주하며 출항하는 호화선도 있다. 저 배가 고국에서 오는 배가 아닌가, 저 배는 그리로 가는 배가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같은 달을 쳐다보면서 그들은 바이칼 호반으로, 갠지즈 강변으로, 마드리드 거리에 제각기 흩어져서 기억을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와 작별하던 가을 짙은 카페, 달밤을 달리던 마차, 목숨을 걸고 몰래 넘던 국경.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면 영창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를 회상하였을 것이다. 과거는 언제나 행복이요, 고향은 어디나 낙원이다. 해관(海關) 시계가 자정을 알려도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사람은 없었다.
출처 : http://www.changbi.com/upload/sumjinriver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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