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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일본군 땅굴을 보면서

간천(澗泉) naganchun 2011. 3. 4. 06:11

 

일본군 땅굴을 보면서

 

 

 

 

 

삼락회가 주관하는 가을철 자연보호행사에 참가하여 일본군이 판 땅굴을 보았다. 내가 본 땅굴은 제주도 서부 중산간 한경면 청수리 산야의 표고 140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산을 온통 미로 같이 굴을 파서 은밀하게 땅속에 진지를 만들어 미군이 일본 본토 총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판 땅굴이다. 우리는 어느 독지가에 의하여 그 일부가 복원되고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수품들을 전시한 ‘평화박물관’을 보았다. 참으로 새삼스럽게 60년 가까운 어린 시절의 쓰라린 추억을 더듬게 되어 마음이 착잡하였다.

 

일본은 1930년대부터 대륙과 대양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제주도를 전략 기지로 활용하여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규슈에서 발진한 비행기가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중간 기착지로서 제주도가 알맞은 위치에 있었고 특히나 1937년 중일전쟁에 대비해서는 적극적으로 모슬포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항공대를 배치하였으며, 태평양 전쟁말기에 이르러서는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5년도에 들어서 6월에 오키나와가 함락되자 일본 군부는 제주도에 군대를 증파하고 본토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결전장으로 태세를 갖추었다 한다. 당시 제주도민은 22만 정도였는데 일본군은 7만에 가까운 병력이 집결되어서 제주도 서부지역인 애월, 한림, 한경, 대정, 안덕 등 지역을 주진지로 구축했었다. 오늘 보게 된 가마오름의 땅굴은 그들의 주요진지의 하나였던 것이다.

 

《손자》에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라.”는 말이 있다. 곧 전쟁이란 모략을 써서 적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적으로 하여금 식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위장을 하기도 하고 차폐(遮蔽)와 은폐(隱蔽)를 일삼는 것이다. 전쟁 시에 땅굴을 파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땅굴이라 하면 북한이 남침을 위하여 파놓은 철원 지방의 땅굴이나 도라산 부근의 땅굴 등은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암반을 뚫고 지하를 통하여 은밀하게 대규모의 병력과 포대를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그 규모가 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베트남 꾸찌 땅굴은 80센티 정도의 좁은 통로를 통하여 체구가 작은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나 속에는 대규모로 군대로서의 갖추어야 할 모든 시설을 갖추어 놓아서 장기간 잠복하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길이는 총연장 250킬로미터나 되어서 외부와 연락이 가능하도록 미로 같은 연결을 하고 있음을 본 일이 있다.

 

남침 땅굴은 지하를 통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수송하여 한국을 침략하려는 목적으로 판 땅굴이지만 우리 국군에 의하여 발각되어 폐쇄되었다. 한편 베트남의 땅굴은 1940년대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하여 두더지가 제집을 파듯이 받침대도 없이 붉은 진흙을 파내어 만든 것인데 베트남 전쟁 때에는 미군을 공격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었다. 그런데 가마오름의 땅굴은 이들 다른 땅굴에 비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땅굴 안에는 참호, 침실, 작전본부, 주방은 물론이고 병원시설까지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전차마저 격납할 수 있게 하였었다 한다. 주변 일대의 땅을 징발하고 제주도민을 징용하여 곡괭이 하나로 파낸 요새이다.

 

내가 어릴 때 동네에서 듣기로는 젊은 장정 누구누구는 북해도 탄광으로 징용을 가고, 누구누구의 아버지는 정뜨르 비행장(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또 진드르(신촌과 삼양 사이) 비행장으로 징용을 갔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다.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징용으로 끌려가서 노역에 시달렸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해방이 되던 1945년은 일본이 얼마나 다급했었는지 대미 항전을 위하여 물자 공급에 총력을 다 하도록 독려하였다. 식량 공출을 비롯하여 철물 공출로 조상 대대로 이어 써오던 제기마저 공출하게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낸다. 못 낸다.” 하고 다투시던 일이 기억된다. 심지어는 어린이들에게까지 노력동원을 강요하였다. 그 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봄에는 고사리를 꺾어 바쳐야 했고, 여름에는 진 나무껍질을 벗겨 바쳐야 했으며, 소나무 송진을 모아 바쳐야 했다. 더군다나 동네별 학년별로 농지를 개간해서 수확한 농산물을 내도록 하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세화초등학교였는데 학교는 야전병원으로 징발되었기 때문에 동네 큰 집을 얻어서 학년별로 수업을 했다. 우리들 한동, 평대의 4학년 학생들은 동학년인 평대리 부소윤군네 집에서 공부를 하였고, 대부분의 시간은 야외 근로봉사라는 미명하에 작업을 하였다.

 

괴로웠지만 통쾌한 기억은 우리 동네 같은 반 학생은 여덟 사람이었는데, 동네에서 떨어진 들판에 자그만 70- 80평 정도의 밭을 우리들 힘으로 개간하여 고구마를 심었는데 작업 시간에는 주로 이곳에 가서 김도 메고 담장도 쌓으며 관리를 하였다. 8월이 되어 고구마 밭에 가보니 대낮에 연한 분홍빛을 띤 나팔꽃과 비슷한 꽃이 피어있는 것이 아닌가? 좀처럼 볼 수 없는 고구마 꽃이 핀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동네에 돌아와서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에게 여쭈었더니 “고구마 꽃이 피면 세상이 바뀐다.”고 옛날부터 전하는 말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한 일이 확인되고서 며칠 후에 임시수업장인 평대리에 갔더니 일본천황이 항복하는 방송을 하게 되어서 일본은 망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것이다. 우리가 가꾼 고구마 꽃이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해방을 알리는 ‘해방 꽃’이 된 것이다. 그 후로 고구마를 바칠 의무는 없어졌으니 우리들 여덟 사람이 수확을 해서 나누어 먹었던 통쾌한 일이 생각난다. 식량난으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라 고구마라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잊을 수 없이 통쾌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을 약취하여 강대한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여 아시아 모든 나라의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괴롭혔으나 또다시 재건되어 경제 대국을 이루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전쟁은 없어져야 한다. 다시는 타민족에 의하여 굴욕적인 수모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각성하고 노력해야 하리라 새삼스럽게 다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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