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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월요단상

면례(緬禮) 유감

간천(澗泉) naganchun 2018. 1. 8. 08:51



면례(緬禮) 유감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기독교의 성서 창세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27)라 해서 흙에서 나왔다고 했고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9) 하여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이런 줄을 아시고 사람이 죽으면 옛날에는 그 시신을 임시 토롱(土壟)을 하여 10년을 구산하고 정식으로 장례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일찍이 촌로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은 분리되어 사람의 넋인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뚱이 백()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조상의 체백(體魄)을 온전하게 모시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며 자손이 발복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10년을 길지를 찾아 구산하고 시신이 잘 보존되도록 관곽에는 역청을 발라 물이 들지 않게 하고 백회를 써서 내광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갖은 방법을 고려하여 조치를 하고 시신을 모셔 매장하였다.

어쩌다 집안에 가환이 끊이질 않거나 가세가 기울게 되면 조상의 묏자리 탓이라 하여 면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면례란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조상의 무덤을 헤쳐서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을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들끼리 “00당장 할아버지가 일어나신대요.” 하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말은 “00당장 할아버지가 이장을 해서 무덤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말로서 해당하는 가정에 새로 발복할 기회가 오는 것으로 믿고 동네가 초상을 치를 준비로 야단법석을 떨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는 조상의 묘를 이장하는 면례가 흔하게 치러지는데도 소문도 없이 조용히 시행되고 있다. 물론 면례를 치르려면 마치 초상을 치르듯 모든 물품과 예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런 절차는 모두 생략된 채로 치르는 것이다. 과연 그래도 괜찮을 것인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다.

 

나는 어려서 초등학교 3학년 때에 큰어머니의 묘소가 사방조림으로 그늘에 가린다 하여서 선친이 오래 걱정한 나머지 면례를 하게 되었다. 봉분을 헤치고 체백을 고르는 것을 어린 나도 참관하였었는데, 그 후로 오랜 기간 저녁만 되면 그 때 보았던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무서워서 방 밖을 나가지 못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선친이 4 〮‧ 3사건 한창일 때에 작고하셔서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가까운 곳에 묘소를 정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내가 성장하여 성인이 된 20대 초에 영구히 모실 묏자리를 찾아서 부득이 면례를 하게 되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선묘를 옮겨야 할 형편이 되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친족들이 서울로 부산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멀리 떨어져 살게 되어서 묘소를 벌초할 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남의 힘을 빌어서 벌초를 해야 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어서 부득이 후손들의 편의만을 고려하여 면례를 치러야 하게 되었다.

결국 증조부모(曾祖父母)님을 비롯하여 6위를 한 자리에 그리고 부모님과 종조부모(從祖父母)6위를 또 한 자리에 모시는 면례를 치러야 했다.

천재지변이나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면례를 치러야 한다면 좋을 일이지만 아무래도 조상님이 원하지 않을는지도 모르는 무리한 면례를 주관한 자손으로서 죄스럽기 한이 없다. 일을 치르고 나면 발복해야 할 터인데 나로서는 발복이 아니라 죄책감을 이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이장함으로써 다른 친족들은 벌초하는 괴로움은 한결 가벼워졌으니 당대 발복했다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옛날 명사의 면례의 예를 보기로 하자. 조선조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며 시조시인인 농암 이현보李賢輔=1467(세조 13)1555(명종 10)선생의 9세손 이만흡(李萬熻 1740-1811)정자동면례기(亭子洞緬禮記)를 보면 1555년에 매장한 묘를 1791년 곧 236년 만에 면례하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조선 효절공의 묘소는 옛날 도실 참찬공의 묘소 아래 건좌에 있었다. 이것이 1555년 을묘년 828일이다. 그러나 산소를 터 잡은 지 두어 세대가 전하지 못하고, 가문의 문제는 점점 기울어 갔다. 종사가 여러 번 끊어지고,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상화가 이어졌다. 그런 상황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이르렀다. 모두들 선영의 불길함이 원인이라 한다.

이를 보면 장례를 치른 후 자손이 9대를 내려오는 동안 가환이 끊이지 않아서 부득이 면례를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형이 --- 이일을 위해 사방으로 풍수를 구하고 현장을 답사시킨 결과 모두들 체백의 불안함이 이와 같이 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손이 오늘까지 이어온 것은 신기한 일이며, 물이 고이고 혈이 차가와 천년이 지나도 시신이 썩지 않으니, 어찌 세월이 오래 흘렀고 일이 중난하다고 해서 그냥 둘 수 있느냐고 한다, 전후 십여 명의 풍수들이 한 결 같이 주장하니 자손 된 몸으로 어찌 아픈 심정과 놀라움과 두려움이 없으랴!풍수들의 의견도 마땅히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견딜 수 없는 가환으로 풍수들의 의견을 따라 이장을 하게 되었다.

일꾼들을 나오게 하고 자세히 살펴본 즉 내곽의 바깥으로 송진을 두껍게 사용했는데 대게 장례에 사용하는 이른바 기름송진인 역청이었다. 외곽 아래의 한 면은 완연히 금방 만든 것 같고, 색체 또한 조금도 변색됨이 없으니 236년간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옷과 두건 등이 보존됨이 마치 한 달도 된 것 같지 않았다. 체백의 불안함을 상상해 볼 수는 있으나 그 이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손들이 곡진하게 애통해하며 사림들이 모두 슬퍼했다.

관곽을 열어보니 당시의 장례복식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 대표적인 관료들의 만사(挽詞) 35점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또한 옷과 두건 등이 보존됨이 마치 한 달도 된 것 같지 않았다 한다.

결국 조상의 체백이 불길하여 가환이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나 풍수들의 주장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면례를 치른 후 그 후손이 발복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세론이 평하기를 최근 20여 년간에 대권을 노리고 선조의 묘를 이장하였다는 대권도전자들 중, 한 분은 그 뜻을 이루었고 다른 분들은 이루지 못하였다. 당대 발복하는 예와 후대에 발복할 수 있을 예가 다르니 무엇이라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옛 사람들은 면례하는 것을 죄악시 하지 않고 효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조상의 뜻과는 전혀 다른 자손의 편의나 독단적인 생각으로 조상의 묘를 헐고 면례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조상의 영혼이 영원히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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