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야기
엘리자베스 1세
복잡한 왕실과 수난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1) 여왕은 1533년 9월 7일에 태어났다.
그 아버지 헨리 8세(Henry 1491~1547 재위는 1509~1547)는 1509년에 이스파냐 여왕의 딸 카사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과 최초 결혼하여 딸 매리(Mary 1516~1558)를 낳았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왕비의 시녀인 안 보린(Anne Boleyn 1507~1536)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로마 법왕에게 이혼허가를 요구했으나 법왕이 하기하지 않았다. 헨리8세는 이에 불복하고 영국 교회의 카톨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1533년에 자기의 뜻대로 왕비 카사린과 이혼하고 두 번째 아내로 안 보린과 결혼하였다.
아버지 헨리 8세 어머니 안보린
안 보린은 아버지가 주불대사인 토마스 보린이고 어머니는 백작 토마스 하워드의 딸로서 1526년에 프랑스에서 돌아와 헨리8세의 첫째 왕비 카사린 오브 아라곤의 시녀로서 일하고 있었다. 이는 미모는 아니지만 매우 강직하고 책략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533년 9월에 헨리8세와 이 안 보린과이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 엘리자베스이다.
왕비가 된 안 볼린은 내 딸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권자가 되도록 헨리8세에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카사린의 왕녀 매리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했다. 이때 매리는 17살이었다. 새 왕비 안 보린은 자신을 왕비로 인정하지 않은 매리를 매우 학대했다. 주거를 빼앗고 엘리자베스의 시녀로서 일하도록 하였다. 이를 거역하면 감독관으로 하여금 매를 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매리는 안 보린을 왕비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국국교회에도 따르지 않았다.
안 보린이 매리를 암살하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고 의심스러운 남자의 출입도 있었다. 한편 헨리 8세는 잰 심무아(Jane Seymour 1509~1537)라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방해가 되는 안 보린 왕비를 1536년에 반역과 간통죄의 명목으로 처형하고 말았다. 안 보린이 처형되자 그 결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엘리자베스는 서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헨리 8세는 세 번째 왕비로 잰 시모아와 결혼하여 에드와드(1537~1553) 왕자를 낳았다. 헨리의 세 번째 왕비인 잰 시모아는 매리를 시녀의 자리에서 왕녀로 복귀시켜 궁중으로 불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서자로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4살 때에 여장관에게 묻었다. <어째서 어제까지는 왕녀님이라 했는데 오늘부터는 엘리자베스님이라 합니까?>하고 묻기도 했다고 하고 여장관이 엘리자베스에게 입힐 옷이 없다고 왕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한다.
헨리의 세 번째 왕비인 잰 시모아는 왕자 <에드워드>를 낳고 세례식을 오릴 때에는 엘리자베스를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에드와드 왕자의 어머니는 에드와드를 출산하고서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3 년 후 1540년에 헨리 8세는 네 번째의 왕비로 안 크레브스(Anne of Cleves 1515~1557)를 맞았다. 왕은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했는데 실제 얼굴이 초상화만큼 미인이 아니라서 왕의 눈 밖에 났으며 그녀는 무엇에나 무감동인 성격이라서 곧 싫어져서 수개 월 후에 이혼하고 말았다.
그 다음 다섯 번째의 왕비로 처음 아내와 같은 이름인 카사린 하워드((Katherine Howard 1521~1542)를 맞았다. 헨리의 다섯 번째 왕비 카사린 하워드는 엘리자베스의 생모 안 보린의 사촌 동생 벌이되기도 한다. 20세 전의 어린 나이라서 엘리자베스와는 10살 정도밖에 차이가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녀에게 잘 따랐고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나 얼마 없어서 처형되고 말았다.
헨리 8세는 1543년에 여섯 번째 왕비 카사린 파르( Catherine Parr 1512~1548)를 만났는데 이 여자는 헨리 8세와 맞먹을 만한 강한 여자였다. 카사린 파르도 세 번째 결혼이었다. 그녀는 딱 부러지는 성격이라서 그녀의 행동에 반감을 가진 가신들이 그녀를 부실하다고 고발해도 그에 대항하여 반론을 펴고 자신이 무고함을 밝히곤 하였다. 그래서 헨리 8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의 자리를 지켰다.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카사린 파르는 엘리자베스를 왕녀로서 복권시키고 엘리지베스와는 사이가 좋았다. 헨리 8세 사후에 이복동생인 에드워드가 즉위하고 엘리제베스는 카사린 파르의 주거에서 카사린 파르의 보호 하에 살았다. 카사린 파르는 1547년 헨리 8세 사망 후 3개월 후에 토마스 시모아와 재혼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같이 살았다. 이 때 엘리자베스는 15살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하기까지
이복동생인 에드워드 6세와 재인 그레이
1547년 헨리 8세가 서거하자 9살인 에드워드 6세(재위 1547~1553)가 즉위하였다. 그는 국교를 신교 프로테스탄트로 하여 교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런데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15살로 서거하자 다음 왕위 계승권자는 헨리8세의 장녀이고 에드워드의 이복 누님인 매리가 승계할 차례였는데 매리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라서 그에게 왕위를 승계하게 하면 곤란해진다는 사실을 에드워드 6세에게 알려서 그가 죽기 전에 왕위는 헨리 8세의 누이의 손녀이고,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인 카사린 파르가 후견인인 제인 그레이(Jane Grey 1537~1554)에게 왕위를 물려준다고 유언하게 하였다. 그래서 재인 그레이가 즉위하였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
매리 1세의 즉위
재인 그레이의 즉위는 혈통상으로 봐서는 재인 그레이의 외조모가 헨리8세의 누이였기 때문에 헨리7세의 외증손녀가 되지만 왕위 계승하기에는 무리한 일이었으므로
의회는 반대하였다. 재인 그레이의 즉위에 반대하는 무리가 헨리 8세의 제1왕녀인 매리((Mary Tudor,1516~1558)를 옹립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어 왕궁을 포위하고 왕위의 재인 그레이를 체포하게 하고 왕위를 탈취하여 매리 1세로 즉위하였다. 매리 1세는 즉위하자 카톨릭 복귀의 정책을 강행하였다. 그에 저항하는 신교도를 무참히 학살하여 <피투성이 매리(Bloody mary)>라 불리게 되었다.
매리 1세는 자기 생모를 이혼하게 하고 처형당하게 하였으며 자신을 학대한 안 보린의 딸인 엘리자베스를 제거하려고 몇 번이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0세가 된 엘리자베스는 반역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매리 1세를 알현하여 자신이 프로테스탄트인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과 반역의 뜻이 없다는 것을 호소했다. 그런데 마침 매리 1세가 엘리자베스를 제거할 기회가 왔다. 1554년 켄트주에서 <화이아트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화이아트의 반란>은 매리 1세 정권을 타도하고 엘리자베스를 왕위로 즉위시킨다는 것이었다. 매리 1세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엘리자베스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런던탑에 유폐하고 말았다.
이복 언니 매리 1세
1554년 매리는 스페인왕자 훼리페와 결혼식을 올리고 엘리자베스를 런던탑 감금에서 풀어 거성 하트필드에서 은서하게 하였다.
매리는 어떻든 엘리자베스를 제거하려고 꾀하였으나 의회의 귀족들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여 엘리자베스의 처형을 반대하였고, 장차 남편이 될 스페인 훼리페 왕자가 엘리자베스를 살려 두어야 한다고 반대하였다. 그는 매리가 40세가 다 되므로 만일 매리가 출산을 못하는 경우에는 후계자인 엘리자베스가 없으니 스코트란드의 매리 슈트아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녀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렇게 되면 영국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고 스페인은 오랜 동안 프랑스와 적대관계였으므로 현재로서는 스페인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여 처형을 반대하였다.
한편 훼리페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배후에서 공작을 하고 있기도 하였었다고 한다.
1554년 7월 20일 스페인 왕실의 피를 이은 매리 1세는 11세 연하인 스페인황태자 훼리페(Felipe 1527~1598))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 훼리페는 스페인에 귀국하여 훼리페 2세로서 즉위하였다.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말려들어서 프랑스에 패하여 대륙에 있던 유일한 영토 카레를 잃게 되었다. 메리 1세는 난소종양으로 1558년에 42세로 서거하였다.
런던탑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와 그 치세
1558년 11월 17일에 이복 언니인 매리 1세의 뒤를 이어받아 튜터 왕조 최후의 왕으로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즉위하였다(재위 1558~1603). 당시 그녀는 25세였다.
1536년 모후가 그녀의 2세 때에 처형되어서 이복 언니인 매리처럼 사생아 취급을 당하였었다. 그러나 헨리 8세 최후의 왕비 카사린 파르의 탄원에 의하여 왕녀로서 복권되고 카사린한테서 양육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어학에 뛰어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유창하게 말하였고 또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서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한다.이복 언니인 매리가 왕위에 있을 때에는 위험인물이라고 해서 런던탑에 유폐당하기도 하였다.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매리 1세의 치세 하에서 불안한 생활을 해 온 시민들은 카톨릭교도이거나 청교도이거나 모두 크게 환영하였다. 1558년 즉위해서 1603년 3월 70세를 일기로 서거하기까지 45년간의 엘리자베스의 치세는 영국이 화려한 번영을 누린 시대였다.
숨을 거두기 전에 후계자로서 스코트랜드왕 제임스 6세(매리 슈트어트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후계자 제임스 6세
1) 정치 자세와 기반 구축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하기까지 25년간에 많은 수난을 당하였으므로 그녀로 하여금 정치적 지혜를 깊게 하였다. 나이와 달리 냉정하고 교묘한 처세술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외교정책에 있어서 언제나 전쟁의 비용과 위험성을 피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밑천을 들이지 않고 이득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즉위하자 먼저 추밀원 의원을 39명에서 19명으로 축소했다. 그 반 수 이상이 매리 1세 시대부터 활동한 사람이었다.
성직자 정치가를 줄이고 실무경험이 있는 자를 등용했다. 국무대신에 윌리암 세시르(William Cecil 1520~1598), 대법관에 니코라스 베이콘 (Nicholas Bacon, 1510~1579)) 등 2명이 중심이 되어 여왕을 보좌했다.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를 물리쳤으나 북부에는 카톨릭 신자가 많으므로 일부는 남겼다. 반면 과격한 신교 신앙자를 멀리하였다.
스페인하고의 관계는 좋았고. 프랑스와는 결혼해주기를 바라는 훼리페2세(언니 매리의 남편)의 마음을 걸고 매리 1세 시대부터의 전쟁을 유리하게 끝냈다.
2) 국교의 확립
영국국교회는 영국의 아이덴티티로서 나라의 기둥이었고 여왕으로서도 그 기초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1559년 4월 예배통일법이 정해져서 영국에서의 공통기도서 사용이 명해졌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군주로서 국내에서는 종교적 리더로서 최고 수장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여성은 종교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되어있었다. 그래서 <수장>이라는 명칭을 <최고통치자>로 바꾸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3회의 권고에도 거부할 때에는 반역자로 처형한다고 선언했다.
청교도들은 성서원리주의에 입각해서 우상을 철저히 배격하고 영국국교회의 의식을 싫어하고 엘리자베스가 하는 방법에 대하여 <종교적이 아니라>하고 비판했다.
그들은 성화를 더럽히고 성상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고 카톨릭교도는 예수회가 영국에 전도사를 잠입시켜 반란을 획책했다. 여왕암살계획 정보도 들어왔다. 이들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3) 정적 제거
엘리자베스는 즉위하면서 바로 가장 적이 되었던 것은 스코트랜드왕 매리 슈트어트(Mary Stuart 1542~1587)였다. 매리 슈트어트는 잉글랜드왕 헨리 8세의 누님 마가레트(Magaret tudor 1489~1541)의 손녀였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가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항상 잉글랜드왕위의 계승권을 주장했었던 것이다.
매리 슈트어트 여왕(스코트랜드여왕)
이 매리 슈트어트는 프랑스왕 프랑스와 2세와 사별 후 영국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신교파인 엘리자베스에 대하여 구교진영의 지지를 모으려 획책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스웰 백작과 불의의 관계를 맺어서 남편인 단리(Henry Stuart, Darnley 1545~1567)를 살해하였다는 의혹으로 스코트랜드 귀족의 공격을 받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적인 엘리자베스에게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받아들인 엘리자베스는 남편 단리 살해의 증거 서류를 몰수하고 19년간 잉글랜드 각지의 감옥으로 전전하며 그녀를 감금하였다가 1587년 2월 정치적 음모의 혐의로 처형하고 말았다.
4) 재정난 보완
재정난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략선(私掠船/Privateer)에 약탈허가증을 수여하여 식민지에서 귀로의 스페인선을 약탈하게 하기도 하고 대서양에서 마제란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칠레나 페루연안의 스페인 식민지 선박을 습격하여 막대한 재보를 약탈하여 엘리자베스에게 헌납하여 국고를 보충하였다. 존 호킨스(John Hawkins 1543~1595)등은 노예상으로 1564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700톤급 거대선을 제공해주어서 해적 행위 및 노예상으로 영국에 부를 축적하였다.
5) 해상권 장악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을 받아 프란시스 드레크(Francis Drake 1543~1596) 제독 휘하의 해군이 알마타 해전에서 불타는 함선으로 적 함대를 공격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세계무역을 한 손에 넣게 되었다.
6) 만년의 실정
만년에는 공유지의 사유지화법령에 의하여 대량 난민이 발생하였으나 그에 대처하는 <엘리자베스 구민법>의 효과가 없고, 스페인전이나 아일랜드의 반란 진압 등에 군사비가 증대하여 사회불안이 증가하였다. 또한 재정 핍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독점특허장을 난발하여 의회의 반대에 봉착해서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하였다. 이때에 엘리자베스는 의회에서 <황금의 연설>이라 평가되는 연설로 유명하다.
그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아무리 비싼 보석이라도 이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사랑입니다. 이 보석은 어떤 보물보다도 나에게는 존귀합니다. 나의 왕관의 영광은 국민의 사랑과 더불어 내가 여왕으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옥좌에는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왕이 앉았던 일은 지금까지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큼 나라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은 여왕이 앉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이 연설로 의회의 상황을 역전시켰다. 그것은 불리하리라 생각했던 <여자>라는 성을 이용하여 남자들의 기사도정신에 호소한 결과였다.
5) 문화부흥의 기초 확립
문화적으로 부흥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윌리암 색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를 중심으로 한 문필가가 다수 배출되어 문화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사생활
여왕에게는 많은 구혼자가 있었다.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코트랜드, 스웨덴에서는 에릭크국왕이, 스코트랜드에서는 왕위계승권을 가진 제임스 하밀튼이 구혼해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들 모두에게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페인에 대해서는 적대시한다면 프랑스에 시집가버린다고 하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이와 반대로 말하곤 하였다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즉위하기 전 한번은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는 왕족으로 혈통이 좋고 젊고 미모의 청년이어서 마음이 끌리었으나 그가 엘리자베스를 거절하였다 한다. 그 이유는 <엘리자베스는 너무 현명해서 여자답지가 않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나는 영국과 결혼하였습니다.> 하고 공언하여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이었으므로 처녀왕(the Virgin Queen)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레에세터 백작 로버트 듀드리(Robert Dudley 1533~1588), 에섹스 백작 로버트 데버렉스(Robert Devereux 1566~1601). 월터 로리경(Sir Walter Raleigh 1544~1616) 등 수인의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애인 듀드리
특히 듀드리하고는 한때 결혼을 생각하였다고 하나 듀드리의 처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생겨서 공모설이 나돈 때문에 단념했다고 한다. 이들 두 사람은 같은 왕족이며 유폐생활에서 만나 다정하게 지낸 사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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