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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세계 여왕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명군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0. 6. 4. 07:17

 

오스트리아의 명군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이야기

 

 

마리아 테레지아

 

 

왕권의 확보 

프랑스 루이 16세의 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여제로 알려지고 있는데 실은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황제가 아니고 황제비이다.

마리 테레지아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항가리왕, 보헤미아왕인 하브스브루크가의 칼6세로 테레지아는 그 장녀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머니를 닮아서 미모였으며 칼 6세 황제의 장녀로서 시민의 인기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1722년부터 윈에 유학 중 육촌 오빠인 로렌느공자 프랑스 슈테판(Franz Stephan 1708~1765)과 연애를 하여 1736년 2월 12일에 혼례를 올렸다. 당시 왕족으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연애결혼이었다 한다.

칼 6세는 아들이 없어서 딸 텔레지아를 차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하부스부르크가는 대대로 남자가 상속을 받는 관습이었는데 칼 6세는 국사칙서를 발표하고 국내와 각국에 대하여 여자에게도 상속권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부스브루크가를 상속 받을 수는 있어도 황제가 될 수는 없었으므로 서랑인 로도리겐공 프랑스 슈테판이 황제의 위에 오르기로 하였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1740년 칼 6세가 서거하자 바이에른, 프로이센, 삭센의 독일 제후국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고 영토를 분할하려고 쳐들어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 계승전쟁(1740-1748)의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서거했을 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23세였다.

 

남편 신성로마 제국 황제 슈테판

 

남편 프랑스 슈테판과의 사이에는 이미 아이가 3명 있었다. 그 때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테레지아는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가 없고 의지할 이는 남편인데 남편은 군사적인 재능이 없으며 거듭되는 전쟁으로 전쟁 비용도 원군도 얻지 못하는 처지라서 정신들은 이 여자 상속인에 대하여 싸늘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테레지아는 굴하지 않고 1741년 항가리를 쳐서 부왕의 위를 계승한 왕이 되고 의회에서 항가리 사수의 뜻을 확실히 해서 필사의 구원을 호소했다. 그런 그녀의 자세에 감동하여 지금까지 반항적 입장에 섰던 항가리 귀족들이 그녀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게 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자금과 병력을 얻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천부적인 정치력과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적인 매력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또 프로이센에 대항하고 있는 영국과 네델란드의 지원을 얻어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후국에 대하여 반격을 가하게 되었다. 

1743년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여왕이 되고, 1745년에는 남편 프랑스 슈테판이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황제(프랑스 1세 슈테판)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위대한 여제로서 국외에서도 인정하게 되었다.

 

치적

의무교육의 확립--타국에 앞서서 전국에 소학교를 신설하여 의무교육을 확립했다. 전국에 동일한 교과서가 배부되고 각 지역 고유어로 교육했다. 그런 결과 국민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능력 위주의 인재 활용과 중신 대우--종래의 명문귀족출신이 아니면 등용되지 않았으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젊고 우수한 인재를 발굴 등용하여 요직에 배치하고 구관인 중신들에게는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귀족과 성직자에 대한 과세 실현--종래에는 일반 서민에게만 부담하던 세금을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부담하도록 만난을 무릅쓰고 실현시켰다.

 

 

테레지아의 동전

 

 

내정의 개혁--전후 오스트리아와 베멘의 정청을 통합하고 군제, 행정과 재정, 왕의 영주지 관리 등을 통합하였다. 부역경감을 통하여 농민을 보호하고 학제와 사법제도를 개혁하고 산업을 육성했다.

특히 군대에서 상관이 병사를 때리는 것을 금지하고 귀족이 아니라도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문호를 개방한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일반 시민이나 농민의 자제도 입학하게 하였다.

적극적인 외교--외교면에서도 수세기 동안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성립시키고, 러시아,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칠년전쟁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를 괴롭혔다.

정략결혼 외교--외교 정책에는 전략결혼을 이용했다. 아들 셋, 딸 셋이 정략 결혼했으나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장남인 요셉 2세는 바루마공 필립의 딸 마리아 이사베라와 혼인했다. 6녀 마리아 아마리아는 바루마공 페르티난드의 비가 되었다. 3남 레오폴드 2세는 스페인왕 가루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루두이가와 혼인했다. 10녀 마리아 카로리나는 나포리왕 페르티난드 4세비가 되었다. 4남 페르티난드는 모데나공여인 마리아 페아트리고스와 혼인했다. 11년 마리아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루리16세와 혼인했다.

 

현모양처로서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좋은 아내이며 현명한 어머니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한 남편 프랑스 1세가 1765년에 서거하자 자신이 죽을 때까지 15 년간을 화장이나 호사를 하지 않았고 상복을 입고 살았다.

 

 

상복 입은 여제

 

 

하브스부르크가 유일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5명 딸 11명을 두었는데

성장하여 어른이 된 아이는 아들이 4명 딸이 6명이었다 한다.

장녀 마리아 안나는 병약했기 때문에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는데 여제가 프라하에 여학교를 세워서 교장으로 있었다.

장남인 요셉은 부왕 프랑스 슈테판이 사거 후(1765년) 황제의 위에 즉위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4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매들 중에 오직 연애결혼을 허락받아 삭슨왕가의 공자 아르베르토와 결혼하고 남편은 항가리 총독이 되었고 일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남편 아르베루토는 높은 교양과 예술품 코렉션으로 윈 미술관에 <아르베르토 디나미술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5년 마리아 에리사베트는 24세 때에 두창을 앓아서 미모를 잃고 프라하의 여학교에 있었다.

6녀 마리아 아마리에는 정략결혼으로 북 이탈리아의 바르마공 페르티난도에게 시집을 갔다. 8살이나 연하인 남편은 교회의 종을 치는 일과 밤을 굽는 일을 좋아했을 뿐 군주로서의 그릇이 되지 못 하였다. 첫 사랑과의 연애결혼을 망쳐버린 바도 있어서 자포자기하여 결국에는 모제인 마리아 텔레지아로부터 본국 귀국을 허가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후 바르마는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어 마리아 아마리에는 1802년 남편이 죽자 수도원에 들어갔다.

3남인 레오폴드는 아버지의 영지인 도스카나공국의 대공이 되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 나라의 문화 경제발전에 공헌했다. 그 후 형인 요셉의 시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재위 2년으로 사거했다. 명군의 자질이 있었다 한다.

10녀인 마리아 카로리네는 무교양의 나포리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과는 어긋났지만 자식들 축복은 받은 듯하다.

4남인 페르티난드는 모데나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살기는 미라노에 살았는데 현지의 총독을 겸하고 있었다.

11녀인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와 정략결혼하여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당하였다.

5남 맥스밀리안 프랑스는 자식들 중에 가장 자질이 좋지 않아서 어려서부터 성직자로서의 교육을 받아 게룬의 대사교가 되었다.

 

 

검소한 시민 생활의 모범

 

 가족들과 함께

 

궁정에서 생활하면서도 시민적인 가정생활을 중시하고 16명의 자녀의 어머니로서 사랑스러운 아내로서 충실하며, 카톨릭 계몽군주로서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국모로 경모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