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제 ‘에카테리나 2세’ 이야기
에카테리나
출생과 도전
여제 에카테리나(Ekaterina 1729~1796/ 재위 1762~1796) 2세는 1729년 4월 21일 독일 보메라니아의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소피 푸리데리케 아우구스타라 했다.
어머니 요한나 에리사베타의 본가는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가진 집안이고 아버지는 독일의 가난한 귀족 안하르트 쓰아르브스트가의 크리스찬 아우구스트공이다.
여제 엘레자베타
에카테리나는 얼굴은 빼어난 미모가 아니지만 머리 회전이 뛰어났다. 어려서 프랑스인 가정교사 밑에서 매우 열심히 공부하였다.
1739년 에카테리나는 외가의 연회에서 표트르대제의 손자인 소년 표트르를 만났다. 이 표트르(Pyotor 1728~1762) (후 표트르 3세)는 여제 에리사베타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독일 홀스타인가에 시집간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 소년 칼 베타 우르리히를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가 된 사람으로 표트르 대공이라 하였다.
에카데리나는 1742년 2월 20일 표트르대공과 맞선을 보기 위해서 여제 에리사베타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에 닿았다. 씩씩하고 청초하며 건강한 에카테리나는 여제의 마음에 들어서 이튿날 21일 왕위계승권자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성 에카테리나 훈장을 받았다.
개종과 결혼
기쁨 속에 황태자의 약혼자가 될 소피는 대공 표트르가 언동이 어리고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결혼해서 행복해지기 위하여 멀리 여행을 하고 온 것이 아니다. 정치로써 러시아에 군림하기 위하여 시집을 온 것이다.” 하고 그녀는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러시아 백성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하여 러시아어의 공부에 열중했다. 그리고 1744년 6월 28일 스스로 러시아 정교(원래는 루터파 신교도였다)로 개종했다.
29일부터 그녀는 러시아 풍의 에카테리나 아렛세이에브나라고 이름하였다.
다음날 약혼식을 올리고 29일부터는 <러시아 대공비>가 되었다.
에카테리나가 16세가 되는 1745년 8월 21일 가산 사원에서 러시아의 권위를 가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표트르가 성적 불구이고 생래적으로 유치하기도 하여 에카테리나는 8년 간 처녀인 채로 지냈다. 그녀는 색정을 발산시키려고 사냥이나 승마에 열중했다. 에카테리나가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가진 것은 대공 부처의 시종이었던 세루게이 사르도이고프(Sergey Vasilievich Saltykov 1726~1765)이다. 그는 남편인 표트르가 동정이라는 것을 공연히 알고 있는데 자기의 애인(에카테리나)이 임신하면 자신에게 혐의가 오게 될 것을 알고 여제에게 상주하여 표트르의 포경 수술과 숙련된 부인에 의한 치료를 받게 하였다. 한편 표트르 대공은 사랑하지도 않은 아내를 의무감에서 안아야 했다.
아들 바웰 1세
세르게이의 계략은 이유가 있었다. 곧 에카테리나는 이때에 이미 세르게이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유산했다. 여제 에리사베타는 대공에게 아버지가 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나라를 위하여 다시 세르게이를 종용했다. 9월 20일 명목은 표트르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실은 세르게이의 아들(이것은 에카테리나의 회상록에서)인 바웰(후의 바웰 1세)이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는 여제에 의하여 후계자로 키워졌다.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그녀는 다키도우스의 <연대기>를 읽고, 몬테스큐나 볼테르 등 후에 전제군주로서의 이름이 높아지는 기반을 쌓아갔다.
쾌락의 욕구와 정치적 야망
그녀의 다음 상대가 된 것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보냐토프스키(Stanislaw August Poniatowski 1732~1798) 백작(후에 에카테리나의 뜻에 따라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가 됨)으로 그는 영국의 정치적 계략에 따라 에카테리나에게 접근하게 된 포란드 명문의 미남 청년이었다. 영국은 그를 이용하여 에카테리나를 농락하여 영국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었다.
한편 표트르는 에카테리나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부재상인 미하일 보론쓰오프의 조카 딸 에리사베타 보론쓰오프라는 무교양의 추악한 여성에게 억지로 끌리게 되었다.
국제 정세의 와중에서 에카테리나는 대공비로서의 지위에 위기가 닥칠 듯한 때에 영국의 사주를 받은 보냐로프스키 백작이 마침내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에카테리나 30세 때에 오르로프가의 쾌남 특히 그리고리 오루로프(Grigory Orlov 1734~1784)와 접근하여 하룻밤을 함께 하였다. 그는 군사행동에 뛰어나고 충성심이 강했으며 한편 성적 상대로서의 매력도 뛰어났다. 근위연대에 큰 영향력을 가져서 에카테리나는 그 영향력에 에리사베타가 근위연대의 호위를 받고 동궁까지 행진하여 쿠데타를 성공시켰던 그 힘을 본 것이었다. 결국 이 청년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이 남편인 표트르3세를 퇴위시키는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녀는 생애의 친구이자 지적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한 부인을 만났다. 후에 에카테리나의 비서가 되어서 과학아카데미를 활성화한 근위사관 다슈코프 공작의 아내로서 예술, 문학, 철학을 잘 아는 재원인 에카테리나 다슈고봐(Ekaterina Romanovna Dashkova 1744~1810)부인이다. 에카테리나는 그녀와 지적인 화화를 즐길 수 있었다.
표트르 3세의 즉위와 애정의 균열
남편 표트르 3세
1761년 12월 오랜 병을 앓던 여제의 용태가 위독해지자 다슈고봐(Ekaterina Romanovna Dashkova 1744~1810)부인은 에카테리나에게 쿠데타를 종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레고리 오루로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 오후 여제 에리사베타는 서거했다.
여제는 후계자로서 아무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들이나 장군들은 관습에 따라 불안하기는 하여도 대공 표트르를 <황제 표트르 3세>로 인정하여 충성을 맹세하였다.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 그가 존경하고 있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2세를 위하여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강화하고 다시 교회 재산의 몰수나 군대나 관청에서 프로이센식 규율을 강제하여 불합리한 칙령을 내려서 정신들에게서 신임을 잃었다.
1762년 2월 21일 탄생을 축하하는 제전에서 표트르3세는 아내 에카테리나에 대하여 성 에카테리나 훈장을 애인인 에리사베타 보론쓰오봐(Elizaveta Vorontsova)에게 넘기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황후나 황위 계승자의 아내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라서 에카테리나를 물리치고 에리사베타를 새 황후로 삼을 의도를 명확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신임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명에 따랐다. 그리고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4월 22일 그녀는 후에 러시아 최대의 명문가가 된 보프린스키 가문의 시조 아렉세이를 낳았다. 이는 그리고리 오르로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황제 표트르3세는 에카테리나를 슈류셀부르크성채에 유폐하려고 베테르고프 이궁으로 옮기도록 엄명을 내렸다.
쿠데타와 즉위
표트르3세의 즉위에 못마땅하게 생각한 쿠데타 세력의 주축이 된 다슈고봐 부인과 그리고리 오르로프가 밀책을 논의했었는데 마침 1762년 6월 27일 궁정혁명의 비책을 알고 있던 동지의 한 사람인 바세크 대위가 체포되었다. 그에게서 비밀이 새어나갈 것을 두려워한 그리고리 오르로프와 에카테리나 다슈고봐 부인은 일거에 쿠데타를 일으켜 1762년 6월 28일 미명에 에카테리나를 마중하러 사자 아렉세이 오르로프가 에카테리나가 살고 있는 베테르고프에 도착했다.
비서 다슈코바 부인
<준비되었습니다. 여제의 위에 즉위하십시오.>하는 아렉세이와 함께 마차에 탄 에카테리나는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 이스마이로브스키 연대의 병영 앞에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었다.
일순 정적을 깨고 대지를 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의 어머니 에카테리나 만세> 하는 환성이 울리고 내가 먼저라고 다투어 남자들이 그녀의 옷소매에 입을 맞춘다.
사령관 기리루 라스모프스키(Cyrillic-RazzMoffSkiingEarlIs) 백작이 <여제 폐하 에카테리나를 러시아 제국 유일의 불가침의 군주로 삼는다.>하고 선언하고 다시 노브고로도의 대사제 드미트리 세체노브(Dmitry Tri-Sechenov)로부터 <러시아 정통군주로서 웨벨전하와 함께> 하고 축복을 받았다.
교회와 원로원에 의하여 합법적인 군주로서 인정을 받은 에카테리나는 가도를 봉쇄하고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늦추고 그날로 근위병과 수도의 각 부대 1만 명을 이끌고 남편 표트르와 대결하기 위하여 페테르고프로 향했다. 황후가 즉위했다는 소식에 표트르는 떨려서 에카테리나의 사자가 내미는 <자발적 퇴위 선언>에 서명했다. 그는 서명하기에 앞서 자기가 사랑하는 4 가지만은 빼앗지 마라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이올린과 애견과 흑인 노예와 연인이었는데 연인만을 제외하고 세 가지는 승인하였다. 그리고서 로프샤의 이궁에 유폐시켰는데 후에 그 감시를 밭았던 아렉세이 오르로프에게 암살되었다.
1762년 9월 22일 모스코바에서 대관식을 올려 에카테리나 2세로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황제기 되었다. 이때에 에카테리나는 로마노프조의 권위를 후세에 전하는 호화로운 왕관을 만들었다. 반면 자신의 생활비와 화장비 등은 일체를 삭감하여 국고의 적자를 매웠다.
에카테리나의 정치
여제 에카테리나 2세는 우선 자신을 권력의 좌로 앉게 한 공로자들에게 금과 영지를 수여하여 보답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에카테리나 2세는 당시 유럽 유행이었던 계몽사상의 숭배자로서 볼테르, 디토르와도 펜팔을 하고 계몽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계몽주의에 입각해서 내정개혁을 행하려고 1767년에는 관료대표와 각 계급의 대표 500명으로 이루어지는 입법위원회를 열어서 왕권의 절대와 법 앞에서의 국민의 평등원칙을 내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푸가쵸프(Pugachev 1744-1775)가 반란을 일으켜 지주의 토지와 재산을 탈취하여 농민에게 분할해주는 등 농민 전쟁이 빈번히 일어났기 때문에 통상과 생산의 자유를 인정하고 귀족에 의한 농민지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1785년에는 귀족에게 특허장이 공포되어 귀족에 한해서 토지와 농노의 소유를 인정하고 귀족은 조세와 군역을 면하고 아무 직업에라도 취업이 기능한 자유 계급이 되었다. 결국 농민은 완전히 지주귀족의 노예화하여 악명 높은 러시아의 농노제가 완성되게 되고 말았다.
문화와 교육의 정비에도 힘을 써서 러시아어 사전 편찬에 착수하였고, 여자교육을 위하여 <스모리누이 여학원>을 설립하여 유럽 제국의 궁정 사교계로 진출시킬 귀부인의 양성에도 힘을 썼다. 교육의 진흥, 병원의 설립, 문예의 보호 등의 사업을 행하고 볼쇼이극장이나 이궁인 에르미타주 궁전의 건설에도 열심이었다.
그녀는 문필에도 뛰어나서 회상록, 서간, 동화, 희곡 등의 문예작품을 남기고 있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그에 위협을 느껴 국내를 단속하고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여 대외적으로는 국제간 분쟁의 중재자역할을 하기도 하여 러시아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높이기도 하였다. 폴란드 분할을 추진하여 그 영토의 일부를 병합하여 러시아 영토를 확대하였고, 이전 자신의 애인이었던 스타니스와프 보냐도프스키를 폴란드의 왕위에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에카테리나의 애정 편력
에카테리나는 결혼은 하였으나 남편인 표트르대공이 성적 불구였기 때문에 8년여 동안 처녀의 몸이었다. 대공비의 몸으로 첫 상대의 연인은 미모에 세련된 지성과 연애 감정을 지닌 시종 세르게이 사루도위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 1726~1765)로 그와 함께 육체적 쾌락과 동시에 임신하여 바웰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여제 마리아 에리사베트는 표트르가 성적 불구임을 알고 후계자를 얻기 위한 욕심에서 묵인하고 있었고 그 아이를 맡아 양육하였다.
에카테리나는 진지했으나 세루게이는 역할을 다하자 다른 여성을 만나 살았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애인 포냐토프스킨
다음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도프스키(Stanislaw August Poniatowski 1732~1798)였다. 스타니와스프의 출현으로 에카테리나는 그 많은 애인을 버리고 진지하게 지냈다. 그는 후에 에카테리나의 후원으로 폴란드왕이 되었으나 실정을 거듭하여 결국 폴란드를 소멸시키게 되었고 후에 에카테리나에게서 다액의 연금을 받아서 일생을 마쳤다.
이들 둘 사이에는 딸 안나가 태어났다.
다음에는 다른 귀족적인 남성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하여 근골이 강건한 육체를 가진 군인인 그리고리 오르로프(Grigory Oriov 1734~1784)와 상대하였다. 결국 이 청년과 깊은 관계를 가짐으로써 에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3세를 퇴위시키는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리 오르로프는 군사적인 행동의 재능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강했으며 성적 파트너로서도 뛰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두뇌가 명석한 에카테리나와 철학, 정치, 예술, 사상 등을 주제로 한 논담의 상대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애인 오르로프
밤마다 새로운 자극과 쾌락을 구하기 위하여 매혹적인 애인을 찾았던 에카테리나가 45세 무렵 10세 연하의 구리고리 포템킨(Gregoly Potemkin 1739~1791)과 맺어져서 비밀리에 결혼하고 46세에는 딸 에리사베타 포템키나를 낳았다. 생애 중 가장 진지하고 성실하게 사랑했던 장군인 구리고리 포템킨은 남성적인 매력만이 아니라 군사적 정치적 지도력이 뛰어났었다 한다.
에카테리나의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강건한 육체와 국가의 난사를 상담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석한 지성과 남에게 타협하지 않는 인격 등은 다른 애인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정치적인 재능에 사로잡혀서 그 때까지의 모든 애인은 쓰다 버렸지만 그이에게만은 그녀의 성적 욕구가 다한 후에도 국정을 맡긴 중신이었다. 그는 1791년에 병으로 사거했다.
여제 에카테리나는 <이제부터는 혼자서 러시아를 통치해야 한단 말인가?>하고 비탄에 잠겼다 한다.
그 외에도 아렉산더 란스고이(Aleksandor 1758~1784)는 미모일 뿐 아니라 능력이 있어서 여제를 보좌하고 여제의 총애가 깊었다. 1784년 26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애인 포템킨
플라톤 즈보프(Platon Zubov 1767~1822)는 에카테리나 최만년의 총신으로 포템킨의 입장을 위협할 정도로 영향력을 가지고 행세를 한 듯하나 용모 이외에는 별 능력은 없었던 듯하다.
알렉산더 마모노프(Aleksandor Mamonov 1758~1803)는 젊어서 총애를 받았는데 한 귀족의 딸과 연애를 하게 되어 결혼을 허가받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자주 여제와 자기 남편과의 은밀한 얘기를 퍼뜨리는 바람에 여제의 노염을 사서 어느 날 밤에 마모노프 부처의 사저에 모스크바 경찰서장이 나타나서 여제의 서명이 들어있는 명령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 6명의 여자로 분장한 경찰이 달려들어서 그 부인을 벗기고 때렸다. 그러고 나자 서장이 다시 와서 <여제의 처분은 이것으로 끝나지만 다시 근신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시베리아로 보낼 것이다.>하고 위협하고 갔다는 일화가 있다.
평가
국민으로부터 어머니로서의 지지를 얻게 되고 43년간 강력한 통치로 국가를 부하게 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학문예술을 진흥시키고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외교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한편 악담도 많이 들었으니 황위약탈자, 남편 암살자, 사이비 계몽주의자, 십 명이 넘는 애인을 둔 음란한 여자라는 등등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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