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3대 악녀(惡女) 이야기 2
냉혹 비정한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
1. 황후가 되다.
무측천의 본명은 무조(武照)라 하고 624년 산서성의 꽤 높은 지위의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4살에 뽑혀서 후궁이 될 수 있는 <재인(才人)>이 되었다. 그 지위는 궁녀 중 7계급 중에 6 번째의 낮은 신분이었다. 14세에 궁으로 들어가야 하는 딸을 보고 우는 어머니에게 무측천은 <천자에게 쓰이는 것은 행운입니다. 어찌 슬퍼할 일이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한다. 애초부터 황후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제도에 의하면 궁녀에는 신분에 차이가 있어서 황후를 필두로 하여 최하위의 시녀까지 7단계가 있었다.
후궁에는 많은 궁녀가 있었던 것 같다. 뽑혀서 후궁에 들게 되면 황제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있고 침소를 함께 하는 수도 있다. 따라서 황제의 눈에 들어 운 좋게 아이라도 얻으면 하나의 시녀의 존재에서 황후에 까지 한꺼번에 출세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측천은 태종을 극진히 섬겼다.
649년 태종(太宗)이 붕어하자 3대 째인 그 아들이 태종의 뒤를 이어서 고종(高宗)으로 황제의 위에 올랐다.
당시 후궁은 황제가 죽으면 그를 섬기던 후궁들은 전원이 비구니가 되어서 궁을 나가야 한다. 무측천도 제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서 장안 시내에 있는 니사(尼寺)에 거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측천은 비구니의 입장에서 다시 후궁으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고종의 궁녀로서 고종을 섬기게 되었다. 고종이 비구니가 된 무측천의 모습을 일견하고 마음이 움직인 때문이라든지 무조가 태종이 죽기 전에 황태자였던 고종에게 어떤 수작을 건 것이라고 전해진다. 아마도 후자가 아닌가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조는 태종이 죽기 전부터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두 다리를 걸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도 무조의 선견지명에 의한 냉철한 계산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조는 비구니가 되어 태종을 조상하며 일생을 마치기보다 후궁으로 되돌아와서 권력을 수중에 넣고 마음대로 궁중을 휘두르고 싶다는 욕심이 강했던 것이다.
무측천은 키가 크고 모가 난 얼굴과 뚜렷한 눈썹은 여자라 하기보다 남자 못지않은 강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궁중에서 제일이라는 두뇌와 특유의 강인한 의지로 황후나 비를 곁눈질하는 고종을 교묘하게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해 간 것이다.
그런 보람이 있어서 얼마 없어 무측천은 장남과 장녀를 이어서 낳았다. 그 때 황후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가슴에는 야망이 싹터서 차차 무서운 음모로 변하기 시작했다.
2. 무측천의 음모
장녀가 태어나서 3월 12일 고종은 피서하기 위하여 장안을 떠나 만년궁이라는 이궁으로 향했다. 기괴한 사건은 도중 휴양지에 멎은 3월 19일에 일어났다. 무측천의 방에 혼자 재우고 있던 아기가 누군가에 의해서 목이 졸려 죽은 것이다. 그 때 무측천이 비어있을 때 그 방을 찾아 온 사람은 황후뿐이었다. 자신의 아이가 없었던 황후는 아기가 귀여워서 출산 축하를 겸해서 찾아간 것이었다. 당연히 황후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신당서(新唐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는 영아 살인범은 무측천 본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황후가 아기를 달래서 요람에 눕힌 후 무조가 몰래 들어가서 자기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불을 덮어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싸늘해진 아기를 고종이 발견하고 놀라자 그녀는 울며 자신의 아기를 잃은 어머니로서의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그리고 죄가 황후에게 있다고 호소하자 고종은 격노하였다.
무측천이 후궁의 실권을 잡고 고종을 조종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횡포를 미워한 황후와 비는 무측천을 비난하는 일이 많아졌다. 두 사람은 궁 안에서 무측천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를 불고 다닌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무측천은 철저하게 보복했다. 무측천은 황후와 그 일파가 몸이 약한 고종에 대하여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
저주란 주술의 일종으로 인형이나 상대의 육체의 일부를 써서 저주하고 죽게 하는 주술이다.
병약하고 때때로 발작하는데다가 신경질이 되어 있었던 고종은 그 소문을 믿고 즉시 황제의 침실을 수색하게 하자 과연 침대 밑에 목각 인형이 발견된 것이다. 그 인형에는 고종의 이름이 새겨지고 게다가 그 가슴에는 바늘이 꽂혀 있었다. 이것은 황후를 모함하기 위해서 무측천에 의한 음모라고 한다.
고종은 영아 살해 사건 후 황후를 멀리하게 되고 업신여겼었는데 원한을 품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황후와 그 일파는 범인으로서 체포되고 결백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무근인 그녀에게 그것이 될 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화는 극에 달하였다. 이에 고종은 황후 왕씨(王氏)와 소숙비(蕭淑妃)를 폐위하고 유폐시키고 무측천을 황후로 봉하였다.
3. 황후와 비에 대한 복수
그때 유폐되고 있던 비가 무측천에게 <너를 쥐로 태어나게 해준다. 나는 죽어서 고양이로 태어나 너의 목을 물어 죽일 것이다.>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였는데, <죽어서 태어나 복수할 수 없게 해주마. 뱀에게 손발은 필요가 없다.> 라고 하여 두 사람은 손발이 절단되어 두 팔과 두 발을 등에 돌려 붙인 모양을 하게 하여 술 항아리에 담갔다.
독사를 술에 담가서 액을 추출시킨 약주 사주라는 것이 중국에는 있는데, 무측천은 말을 실현하여 피가 얼게 하는 복수의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저주의 말을 하면서 며칠간은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쥐띠였던 무측천은 죽기 전에 비가 한 저주의 말을 잊지 않고 궁중에서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게 되었다 한다.
그녀는 스스로 말을 실현하는 반면 말이 거꾸로 실현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미신이라든지 운이라는 것을 병적으로 믿는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장안의 궁전에 자신이 참살한 황후와 비의 망령이 나온다는 말이 나돌아서 그 두려움에서 피하려고 낙양으로 여행을 한 일도 있다. 결국 무측천은 낙양에 새로운 궁전을 짓자 일찍이 이사를 하고 말았다.
4. 질투심에 의한 보복
무측천에게는 이상한 질투심이 있어서 조금한 일이라도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무측천의 친척으로 단두 사람밖에 없는 한 어머니와 딸은 모두 기괴한 죽음을 하였다. 먼저 무측천의 언니였던 부인은 식사 도중 먹은 것을 토하고 경련을 일으켜 죽었다. 그리고 그 딸도 같은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괴로워하며 입으로 거품을 품으며 죽었다. 두 사람 모두 고종의 마음에 들었었다. 그것을 질투한 무측천에게 독살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 아가시는 그녀의 원한을 사서 감옥에 유폐되고 말았다. 물도 먹을 것도 주지 않아서 어느 날 문을 열고 보니 바짝 말라 죽어 있었다 한다. 이처럼 수 명의 아가시가 감옥에 유폐되어 가지가지 방법으로 참살 당했다. 이처럼 이유도 없이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 그녀에게 죽음을 당한 자는 친족만도 70명 이상이고, 대신급의 고관들도 40명 이상 살해당하였다고 보고 있다.
무측천만큼 친족이나 육친을 가볍게 보고 증오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이만큼 다수의 인명을 살해한 여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다. 무측천은 정치의 실권을 잡자마자 자신의 의향에 맞지 않은 인간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이다. 고종은 병약하고 내향적이라서 무엇이든지 무측천이 하자는 대로 했다.
무측천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친족이거나 자식이라도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또 자신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신하가 있다면 파면하거나 좌천시켰다.
5. 무측천의 아들과 그들의 운명
고종에게는 자녀가 모두 12명이 있었는데 그중 6명 곧 4남 2녀가 무측천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남은 이홍(李弘)이라 하고 둘째는 이현(李賢)이라 하고 셋째는 이현(李顯)이라 하고 넷째는 이단(李旦)이라 했다.
656년에 무측천의 장남 이홍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홍(李弘)은 온순 겸손하여 고종과 대신들의 신임을 받았다. 이 무렵 고종은 건강이 악화되어 황위를 이홍(李弘)에게 선위하려 했다. 그러나 무측천(武則天)은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권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아들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홍(李弘)은 자기 말을 잘 듣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이홍이 황제가 되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은 실현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675년 무측천은 24살의 아들을 독살하여 버렸다.
이홍(李弘)이 죽은 후에 둘째 아들 이현(李賢)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현(李賢)은 총명하고 정치적 역량도 뛰어났다. 더욱이 재상들이 주변에서 그를 잘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측천(武則天)은 다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다.
그 후 낙양에 있는 이현의 거처에서 대량의 무기가 숨겨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680년 8월 이현(李賢)은 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폐서인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파주(巴州)로 추방되었다. 684년 무측천(武則天)은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이현(李賢)을 죽였다.
그때 아버지인 고종은 자식의 폐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아서 용서하려 하였는데, 무측천이 단호해서 용서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 사건을 적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무측천 자신이었다. 이 사건을 획책한 것은 바로 무측천이라고 보고 있다.
680년에 이현(李賢)이 폐서인이 된 후 셋째 아들 이현(李顯=같은 발음)이 태자로 책봉되었다.
6. 황제 등극과 공포정치
683년 고종(高宗)은 황위를 셋째 아들인 태자 이현(李顯)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20세인 태자 이현(李顯)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中宗)이다. 중종은 그의 형들에 비해 아주 나약했기 때문에 무측천(武則天)은 처음부터 순순히 그의 즉위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황제에 즉위한 후 황후가 된 위씨(韋氏)를 총애한 나머지 그 장인 위현정(韋玄貞)을 재상에 그리고 그 일족을 요직에 임명하였다. 황태후 무축천을 과소평가하여 일어난 이 사태가 발단이 되어 무측천은 중종을 폐위시키고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한 다음 그를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다. 중종(中宗)을 유폐시킨 후 무측천은 자기의 막내아들 이단(李旦)을 황제로 옹립하였는데 이가 예종(睿宗)이다. 이때부터 무축천은 예종의 정사 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결국 4남인 예종도 체포되어 궁중에 감금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의 아들은 무측천 본인에 의하여 배제되고 그녀 스스로 제위에 올라 마침내 중국사상 최초의 여황제가 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아들들을 제위에 앉히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가 최고의 옥좌에 앉아 자신만의 극가를 만들려고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무측천은 그때 67세였는데, 제위에 오르자 놀라운 체력과 정력으로 공포정치를 단행했다. 그녀는 고대 중국의 주왕조를 동경하였었다.
먼저 국호를 당나라에서 주(周)로 개명했다. 그리고 스스로 주왕조의 후예라고 칭하고 방해가 되는 당왕조 일족을 근절 시키는 데에 나섰다. 그 수단으로서 그녀는 하층민으로 혹리(酷吏)라 칭해지는 잔인하기 끝이 없는 조직을 만들어 적대하는 세력에 대하여 용서 없이 피의 숙청을 행했다. 또 투서함을 만들게 하고 밀고 제도를 장려했는데 밀고에 의하여 체포된 자는 혹리에 의하여 무서운 고문을 받은 나머지 살해되었다. 백성은 언제나 밀고를 두려워하여 당나라 황제의 핏줄이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 체포될는지 모르는 운명에 떠는 매일이었다. 잔혹한 고문 기술이 특히 진보한 것도 이 시대였다.
7. 무측천의 은퇴와 향락
70세가 지나서 권력을 수중에 넣고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무조는 정치를 신뢰할 수 있는 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정치의 표면에서 물러나 쾌락의 세계에 몸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무렵이 되자 공포정치의 시대는 끝나고 백성으로서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녀는 정사의 상대로서 일찍이 비구니로 니사에 있을 때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절에서 고기를 먹게 해준 괴승 풍소보(馮小寶)의 도움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무측천이 궁으로 들어오게 되자 풍소보를 불러들여 설회의(薛懷義)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정사의 대상을 삼았다, 그는 후에 무측천의 미움을 사서 궁중에서 궁녀들에게 태장을 받고 죽었다 한다. 그리고 미소년인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형제(兄弟)를 환관으로 후궁으로 끌어들이게 되어 갔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20대로서 희고 훌륭한 미모의 청년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은 회춘제의 전문가로서 무측천을 기쁘게 하기에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스캔들이 알려지자 백성의 조소거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지우기 위하여 그녀는 그들을 궁정 내에 가두어서 전용 기관을 만들었다. 그 기관은 궁정 내부에 만들어져서 화려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넓은 정원이 있고, 볼만한 조각이 여기 저기 있었고, 곱게 채색한 다리나 문으로 마치 도원경과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뜬세상 같은 이 도원경에 있었던 일은 모두 주연과 정사와 도박이었다. 마치 무측천의 만년은 퇴폐적 생활을 다한 것이었다.
8. 혁명과 무측천의 죽음
699년에 무측천은 유폐되어 있던 여릉왕(廬陵王, 中宗) 이현(李顯)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 정월 무측천은 이미 82세의 고령에다 병까지 겹쳐 체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때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이 문무 대신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하여 무측천의 환관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등을 죽이고 중종(中宗)을 황제로 옹립한 후 '당(唐)'이라는 국호와 당황조(唐皇朝)를 복원하였다. 그러나 중종(中宗)은 무측천(武則天)을 그대로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 일컬으면서 태상황으로 존중하였다.
그 해 11월, 위독한 무측천을 방문한 중종(中宗)에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씨(王氏)의 일가를 사면 복권시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자신의 사후에는 황제라 칭하지 말고 태후라 칭하여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러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측천은 705년 11월 2일 상양궁(上陽宮) 선거전(仙居殿)에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무측천(武則天)은 운명할 당시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지금도 무측천(武則天)의 묘비(墓碑)는 이례적으로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무측천 사후 재등극한 중종은 유배지에서 항상 위후(韋后)에게 <내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되면 그대가 바라는 대로 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녀도 무측천을 본받아 권력을 휘두르고 방해가 되는 중종을 안락공주(安樂公主)와 짜서 독살하고 말았다.
그러자 퇴위 되었던 예종(睿宗)의 아들 융기(隆基)는 군사를 모아 710년에 혁명을 일으켜 위씨(韋氏) 일족을 축출하고 예종을 복위 시키고, 얼마 없어 그 뒤를 이어서 현종(玄宗)이 되었다.
측천무후의 무자비(글자 없는 비)
9. 평가
무측천은 약 반세기 가량 국정을 다스리면서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정치는 훗날 당(唐)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개원의 치(開元之治)'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고 평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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