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의 거실 한편에서 우아하게 손목을 들어 올리는 한 할머니. 그녀의 팔목에는 주렁주렁 팔찌가, 손가락에는 금반지와 다이아몬드 반지가 번쩍인다.
“나는 이대 나온 여자야!”
그 한마디는 마치 그녀의 타이틀이자, 요양원의 명함 같은 것이다. 그녀의 반짝이는 악세사리와 말투는 단연 주목을 끈다.
“댁의 허즈번드는?”
이 질문은 종종 요양보호사들에게 날아든다. 마치 자기 옛날 사교계 시절의 회장님 톤처럼. 순간 멈칫하다가 우리는 대충 맞장구를 친다.
“아유,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그러면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이대 출신 할머니의 요양원 라이프는 단순히 이런 반짝이는 순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영화처럼 극적이고, 드라마처럼 감정 기복이 심하며, 코미디처럼 웃긴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녀에게는 외출과 자랑, 그리고 비밀의 구역이 있다.
몇 주 전, 딸과 손자가 면회를 온다고 했다.
“연어초밥이랑 아이스커피를 사주기로 했어!”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딸과 손자의 자랑은 끊이질 않았다.
“아들은 매달 김이랑 커피를 보내줘. 내가 커피 없으면 못 살아!”
하지만 정작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면, 커피를 마시다 만 컵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종이와 휴지가 바닥에 가득하다. 식판은 늘 반찬으로 뒤범벅이고, 물컵에는 밥알이 둥둥 떠다닌다.
그런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침대 근처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둑어둑한 방에서 기독교 방송 설교를 틀어 놓는다. 목사님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동안, 그녀는 반짝이는 옷을 입고 헤어브러시로 머리를 정리한다. 자기 관리는 필수다.
“머리 어때? 예쁘지? 내가 옛날에 압구정동에 살았거든.”
그 한마디에 요양보호사들은 한 번 더 맞장구를 친다.
“그럼요, 할머니! 정말 세련되셨어요!”
칭찬이 이어지면 그녀는 더 활짝 웃으며 말한다.
“내가 이대 나왔잖아!”
그녀는 의외로 다른 방 어르신들에게 친절하다. 가끔 간식을 남겨 와서 말도 못하고 누워 있는 어르신에게 직접 떼어 먹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요양보호사들은 기겁한다.
“할머니, 체하면 어떡해요! 누운 채로 드리면 안 돼요!”
그러면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한다.
“내가 알아서 해. 나 친절하잖아.” 친절과 잔소리의 교차점이다.
그러면서도 말끝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난다. 그 서운함은 곧장 잊히고, 다시 거실로 나와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목욕은 그녀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이벤트다. 목욕이라는 왕실 의식이다. 누가 목욕을 시켜주느냐에 따라 일주일 내내 자랑이 달라진다.
“OO 씨가 나 씻겨줬어. 정말 잘하더라니까! 최고야!”
그날 목욕을 도운 요양보호사는 하루 종일 칭찬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정작 옷은 본인이 입던 것을 고집한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히려 하면 “싫어!”라고 외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 옷이 제일 예쁘잖아. 내가 압구정에서 이거 입고 다녔어.”
그 말을 들으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거실에서는 가끔 그녀의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목사님의 설교 방송을 들으며 감동을 받으면 요양보호사들에게 감상평을 늘어놓는다.
“역시 훌륭한 설교야. 내가 저 목사님 권사님이랑 통화도 했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는 자기 인생을 자랑하지만, 어딘가 쓸쓸하다. 압구정동의 화려했던 시절, 딸과 손자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여왕으로 남으려 애쓴다. 하지만 방 안의 어둠 속에서 그녀의 반짝이는 악세사리는 과거의 잔광처럼 보인다.
“나는 이대 나온 여자야.”
그 한마디는 그녀의 자존심이자, 자신을 지탱하는 말이다. 요양원의 침대와 어둑한 방 안에서도 그녀는 스스로 빛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가끔은 웃음으로, 가끔은 위로로 그녀의 삶에 화답한다.
그녀의 인생은 웃기고도 슬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렬하다. 과거와 현재, 자존심과 현실, 화려함과 어둠 사이에서 여전히 그녀는 여왕처럼 요양원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이대 나온 여자야!”
그 말은 우리가 끝내 잊을 수 없는 그녀의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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