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의 거실을 둘러보면 할머니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 다른 분인데, 머리 스타일은 똑같다. 짧은 커트머리.
흰 머리카락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까만 머리가 섞여 있는 할머니도 보인다. 아마 가족이 모시고 나가 염색을 시켜준 덕분일 것이다. 그건 분명 운이 좋은 경우다. 대다수는 이곳에서 머리카락도 ‘단체 생활’을 한다.
한 가지 스타일, 그저 짧은 커트머리. 이곳에 자주 오시는 미용사나 자원봉사자의 작품이다. 모두 비슷한 머리카락을 가졌는데도, 이상하게 각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어떤 할머니는 사내아이 같고, 또 어떤 할머니는 보이시한 매력을 뿜어낸다. 또 어떤 할머니는 어디서 보았던 유럽 영화 속 고독한 여주인공을 닮았다. 짧은 머리가 각양각색의 인생을 담고 있다.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면 그날의 하루를 엿볼 수 있다. 요양원의 할머니들의 뒤통수는 마치 작은 우주다. 누운 시간이 길었던 분들은 뒤통수가 납작하다. 그 납작한 머리에서 뻗친 머리카락들은 종종 하늘을 향해 작은 분수를 만들어낸다.
머리 뒤쪽이 볼록한 할머니는 어떨까? 그곳은 마치 분화구처럼 머리카락들이 흩어진다. 각자 자기가 만든 작은 풍경을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것이다.
하루에 두세 번은 이런 머리를 빗어드린다. *“곱다 곱다, 오늘도 예쁘네요!”* 하며 빗질을 하면, 할머니들은 좋아하신다. 빗질하는 손길에 미소를 머금고,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신다. 두피에 전해지는 빗의 부드러운 압력,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빗질이 아니라 작은 힐링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 그 짧은 빗질 하나가 할머니들의 시간을 잠시 되돌린다. 이 머리는 분명 자신이 직접 감고 빗었던 머리다. 손수 모양을 내던 그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지금은 누군가 대신 빗어주지만, 그 손길에서 작은 위로와 보살핌을 느낀다.
이곳에서는 긴 머리를 볼 수 없다. 관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연히 긴 머리카락은 사라지고, 쪽진 머리나 비녀를 꽂은 옛날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짧고 깔끔한 커트머리가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이 짧은 머리는 효율과 실용성의 상징이면서도 어르신들의 매력을 드러낸다.
파마머리도 드물다. 예전에 동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고 나면 볼륨감 넘치는 머리카락을 자랑하던 모습은 이제 없다. 대신, 단순한 생머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 생머리는 이상하게도 보이시한 매력을 풍긴다. *“사내아이인가? 소녀인가?”* 순간, 할머니들이 나이를 잊고 보이는 새로운 모습이 여기에 있다.
요양원의 할머니들은 노인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어린 소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준다. 짧은 머리에 빗질을 받을 때 보여주는 표정은 어린아이가 보호받을 때의 그것과 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선이 있다. 스스로 머리를 감고 꾸미던 여인이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지하는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진다. 이들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저 한 사람의 가녀린 존재가 된다.
이제 나는 요양원의 할머니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보이시 할머니.”*
그들은 나이가 많아도 소녀 같은 순수함과 여인으로서의 단단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짧은 머리와 각기 다른 뒤통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새로운 종은 나이도, 성별도, 기존의 틀로는 정의하기 어렵다. 이들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면서도, 어딘가 당당하고 사랑스럽다. 이들이 살아온 긴 시간과 함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도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 빗질을 하면서 나는 그 흔적들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
요양원의 할머니들은 어른도, 소녀도 아닌 특별한 존재다. 그들은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자, 누군가를 웃음 짓게 만드는 매력을 가진 새로운 종이다.
‘보이시 할머니’ 이곳 요양원의 빛나는 정체성이다.
*‘보이시하다’는 여성이 외모나 태도, 성격 면에서 전형적인 여성스러움보다 중성적이고 남성적인 느낌을 줄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주로 짧은 머리 스타일, 단정하고 활동적인 복장, 직설적이고 당당한 성격 등에서 이런 인상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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