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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시대

돌봄의 시대 15 권태를 모르는 사람들

간천(澗泉) naganchun 2025. 3. 22. 05:09

요양원 거실의 식탁, 그 위로 점심을 기다리는 두 할머니의 대화가 잔잔히 흐른다.

“집에 감나무 있어?”

경상도 억양이 싹싹하고 경쾌하다.

“어~ 있쪄, 세 그루여~. 다 먹도 못혀. 실컷 먹고도 남아. 동네 다 노나주지.”

충청도 사투리는 느릿느릿, 그러나 단단하다.

 

두 분의 대화는 짧지만 깊다. 지금은 서로 다른 방에 배정된 두 분이지만, 한때는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였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이미 흐릿해져 있다. 대신 남은 것은 옛집의 감나무, 그곳에서 보내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짧은 대화 속에 두 할머니의 삶이 스며 있다. 감나무는 단순한 과실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어르신들이 살아온 일상의 축적이고, 그들의 기억 속에서 풍성했던 날들의 상징이다. 경상도와 충청도의 억양이 교차하며 나누는 이 담백한 대화 속에서, 요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의 흔적이 엿보인다.

 

요양원 생활은 단조롭다. 하루의 큰 줄기는 식사 시간으로 나뉜다. 그 사이에는 거실에서 졸거나, 휠체어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의 어르신들은 권태를 모른다. 권태란 무엇인가? 권태는 지나치게 많은 선택지와 함께 온다. 새로운 자극을 기대하지만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느껴지는 정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권태는 지극히 익숙하다. 우리는 할 일이 없어 권태롭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권태롭다.

 

하지만 요양원 어르신들은 다르다. 그들은 선택지의 범위를 좁힌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감나무 이야기를 나누고, 조용히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과거의 조각들을 소중히 꺼내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현대인이 자주 느끼는 권태를 모른다. 이 단순한 삶 속에서 권태를 잊고 살아간다.

 

권태는 단순히 무료함이 아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권태를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보았다. 권태는 삶의 무의미와 마주할 때 느껴진다. 현대 사회는 권태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 하지만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이 권태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삶의 무의미와 마주하기보다는 삶의 단순함과 조용히 화해한 듯하다.

 

요양원 생활은 마치 어린아이의 삶과 닮았다. 아이는 권태를 모른다. 놀이 하나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작은 발견에 기뻐한다. 요양원 어르신들 역시 비슷하다.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고, 느린 대화를 이어가며, 누군가의 "그려"라는 반응에 웃음 짓는다. 권태를 알기에는 이들의 삶은 이미 충분히 단순하고 충만하다.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서로의 삶을 조금씩 나누며 오늘 하루를 보낸다. 짧은 대화 속에서도, 조용히 서로의 존재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그들에게는 분명한 평화가 있다. 그 평화는 권태를 모르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다.

 

현대인의 삶은 때로 지나치게 복잡하고, 권태는 그 복잡함 속에서 피어난다. 그러나 감나무 이야기를 나누는 두 할머니처럼, 우리가 일상의 단순함 속에서 작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권태는 결코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삶이 단순해질수록 권태는 사라진다. 권태를 모르는 아이들처럼, 이곳의 어르신들은 단순함 속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그 모습은 마치 감나무 아래에서 감을 따던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다. 어쩌면

귄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어리석은 어른의 길로 들어선 것이고 아무래도 진정한 평안은 귄태를 모르는 이들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