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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시대

돌봄의 시대 13 이생의 이별 : 이별의 여러 얼굴들

간천(澗泉) naganchun 2025. 3. 15. 05:34

김천 직지사 옆 복사골, 그곳이 그녀의 친정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허스키했고,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이야기들이 목구멍을 지나며 낮게 떨리는 듯했다. “거기 가고 싶어.”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곳은 그녀의 젊음이 묻혀 있는 곳이고, 그녀의 뿌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요양원의 한 작은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낸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편적이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살고 있고, 아들은 재산을 물려받고 떠났다. 딸의 신세를 잠시 지다가 결국 이곳으로 왔다. 면회를 오는 가족은 없다. 마치 그녀의 과거는 요양원 문턱에서 발길을 멈춘 듯하다. 그 모든 관계는, 그 모든 인연은, 이생에서의 이별로 종결된 듯 보인다.

 

우리는 흔히 이별을 죽음으로만 정의한다. 하지만 그녀가 증명하듯, 이별은 살아있으면서도 찾아온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인연이, 어느새 타인의 존재로 흐릿해지고, 더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기억의 침식 속에서 사라진다. 사랑도, 약속도, 울고불며 다짐했던 순간도 결국 물보라처럼 흩어진다. 그녀는 그 이별의 정점에 서 있다. 죽음으로 맺는 사별이 아닌, 살아 있으면서도 이어질 수 없는 단절의 이별 속에서 말이다.

 

젊은 시절 우리는 사랑을 꿈꾼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늙어갈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삶은 약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치매에 걸리고, 기억이 사라지고, 몸이 쇠락하며, 어느덧 한 사람은 요양원에 머물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떨어져 산다. 함께한 세월이 쌓였어도, 그런 이별 앞에서 삶은 다시 각각의 독립된 조각으로 흩어진다.

 

그녀는 이가 없다. 미음을 먹는다. 그 미음이 적다고 불평을 하며, 김치를 그리워한다. 그런 사소한 욕망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가 묻어난다. 마르고 깡마른 몸, 커다란 눈은 어쩐지 시쮸 개를 떠올리게 한다.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요양보호사가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길 때,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목소리를 긁으며 “따랑해”라고 답한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사람과의 소통을 놓지 않는다.

 

하루에 한두 번 휠체어로 옮겨져 허리를 세운다. 그 순간은 그녀의 하루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허리를 펴고 앉아,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다. 삶이란 무엇인가?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내다가도, 허리를 펴고 앉아 세상을 보는 작은 순간에도 의미가 있다면, 그 자체가 삶의 전부 아닐까.

 

그녀의 삶을 보면 허무하다. 모든 관계는 흩어졌고, 모든 약속은 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미음을 먹고 싶다고, 더 많은 양을 달라고 조르고, 김치를 그리워하며 욕망을 내보인다. 그것이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생명의 끈질긴 의지가 담겨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얇은 경계가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는 것 같지만, 어쩌면 가장 뚜렷한 이별은 삶 속에서 일어난다. 사랑했던 사람을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한 기억이 사라지고, 서로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이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생존의 흔적들, 그 작은 욕망들과 순간들은 우리가 삶을 완전히 허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든다.

 

그녀의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복사골을 그리워하며, 휠체어에서 허리를 세우고, “따랑해”라는 작은 말로 자신을 증명하며. 이 허무 속에서도 빛나는 작은 순간들이 그녀를 살아 있게 한다. 그녀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