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여성과학자
28, 큐리 부인 이야기 2
2. 면학과 결혼
파리에서의 고학
3일간 기차여행을 끝내고 1891년 10월 마리아는 파리로 옮아 살았다. 당시 여성이라도 과학교육을 수강 가능한 교육 기관이 하나가 있었다. 소르본(Sorbonne) 대학 등록용지에는 이름을 <마리아>에서 프랑스어풍의 <마리>라 쓰고 물리, 화학, 수학을 배우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슬라브계의 얼굴을 한 밝은 푸른 눈동자의 마리는 학내에서 여러 사람의 눈을 끌어서 그녀 자신도 형부를 통하여 젊은 이그나시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 1860년11월18일~1941년6월29일=폴란드 피아니스트, 작곡가, 정치가, 외교관, 수상) 등 파리에 사는 폴란드인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장래는 폴란드에 돌아간다고 결심한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언니 부부의 곁을 떠나서 파리에서 흔한 7층 건물 석조 아파트의 다락방을 빌어서 이사를 하였다.
마리는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가정교사로서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난방도 없었기 때문에 추운 때는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끼어 입고 잠자면서 공부에 열심을 다하였다. 끝내는 병으로 쓰러져서 의사인 형부의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듭 노력한 결과 1893년에는 물리학의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해에 저축이 동이 나서 체념하기도 하였으나 동향 학우가 그녀를 위하여 장학금을 신청하여 주어서 면학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피엘 큐리와의 만남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지금까지 저축한 것에 의존하는 생활을 바꾸어 마리는 프랑스공업진흥협회의 수탁연구를 하여 적지만 수입이 생기게 되었다. 여전히 다락방 신세는 계속되었으나 그러는 가운데 저축하여 장학금 전액을 반제하였다.
남편 피엘 큐리와 함께
그러나 부탁을 받은 강철의 자기적 성질의 연구는 대학이나 근무하고 있던 가브리엘 리프만(Jonas Ferdinand Gabriel Lippmann、1845년 8월16일~1921년 7월13일=룩셈부르크 태생의 유태인 물리학자 발명가)의 공업시험장에서 행하기에는 좁아서 곤란했다. 그런 무렵 체하누프(Ciechanów)시대에 알았던 여성이 신혼여행으로 파리에 와서 마리를 찾아왔다. 그녀의 남편인 후리플(Fribourg)대학 물리학 교수인 요세프 코바루수키(Jozef · Kovarusuki 1900- ?) 가 고민거리를 듣고 장소를 제공해 줄만 한 인물을 소개해주었는데 그는 프랑스인 과학자 피엘 큐리(Pierre Curie, 1859년5월15일~1906년4월19일=프랑스 물리학자)였다.
피엘 큐리는 당시 35 세로 파리 시립 공업물리화학고등전문학교(EPCI)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당시의 피엘 큐리는 프랑스에서는 무명의 학자였으나 그는 이온 결정(結晶)의 유전분극(誘電分極) 등 전하(電荷)나 자기(磁氣)의 연구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큐리 천칭 개발이나 후의 큐리의 법칙에 이어지는 기본원리 등을 해명하고 있었다. 1893년에는 영국의 윌리암 톰슨(William Thomson、켈빈남작Baron Kelvin of Largs,)1824년6월26일~1907년12월17일=영국 물리학자)이 모처럼 찾아올 정도로 프랑스 국외에서는 천재라고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출세나 여성과의 교제 등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정부가 준다는 훈장도 거절하고 박봉에 열악한 연수설비에 안주하여 무심히 연구에 열중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성관에 대하여 피엘 큐리는 그의 일기에 <여성 천재란 좀처럼 없다.>하고 자신의 학문적 탐구심을 이해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894년 봄 초대면의 피엘을 보고 첫 인상을 마리는 <장신에 맑은 눈동자, 성실하고 온순한 사람이면서 어딘가 분망한 몽상가의 분위기를 풍겼다.>고 되돌아보았다. 과학이나 사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자신과 공통되는 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피엘 큐리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어서 그는 마리에 끌리었다. 후에 딸 부부를 더하면 통산 5번이나 노벨상을 받게 되는 큐리 부처는 이렇게 만났다. 코바루수키 교수가 두 사람의 천재를 맺어지게 하는 중매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피엘은 학위 취득을 목표로 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이루어 놓은 <대칭성 보존의 원리>(큐리의 원리) 논문의 복사를 그녀에게 선물하고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리는 자신의 다락방에 피엘을 초대하였다. 피엘은 가난하고 근신하는 그녀에 충격을 받아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여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마리는 언젠가는 고국인 폴란드에 돌아갈 것을 맹세하고 있었다.
1894년 수학 학사학위를 취득한 마리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바르샤바에 귀향하였다. 다시 파리로 돌아갈까 어쩔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았으나 야규웨대학(Uniwersytet Jagielloński=폴란드에서 가장 오랜 대학)은 여성을 채용해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 피엘은 마리에게 구혼하는 편지를 수차 보내고 10월에는 마리는 파리로 돌아왔다. 피엘은 자신의 열의를 직접 마리에게 말하고 함께 폴란드에 가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마리가 피엘의 청혼을 수락한 것은 1895년 7월이었다.
1895년 7월 26일 질소한 결혼예식이 올려졌다.(신부 마리는 28세 신랑 피엘은 36세) 신부의 드레스는 형부의 어머니가 선물하였다. 교회에서의 선서도 가락지도 연회도 없는 예식에는 폴란드에서 아버지와 언니가 왔다. 축복 속에 예식을 마친 두 사람은 축의금으로 구입한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전원지대를 도는 신혼여행을 했다. 이리하여 마리는 새로운 애인, 인생의 반려 그리고 믿음직한 과학연구의 동지를 얻었다. *
출처: https://naganchun.tistory.com/entry/큐리-부인-이야기-2-2-면학과-결혼-1613 [온고창신 溫故創新:티스토리] 재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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