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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의 비극

간천(澗泉) naganchun 2010. 1. 23. 02:34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의 비극

 

 

 

폼페이(Pompei)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250 Km 나포리만을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베수비오스(Vesuvios) 화산 기슭에 위치한다. 이 땅은 세계 제일의 풍광이 아름다운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런 때문에 이 도시는 로마의 휴양지로서 부유한 귀족의 별장이 다수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주위 3Km 정도의 동서로 기다란 이 도시는 상업으로 크게 번영하여 인구는 2만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중에 4할은 노예였다.

 

신전광장과 베수비오스 화산

 

 

고대 폼페이의 역사

 

폼페이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한다. 기원전 4세기에는 로마에 점령당하고 마는데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의 지배를 싫어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로마의 군문에 들어갔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폼페이를 유린하지는 않아서 이 도시를 관대하게 다루었다. 시민에게는 로마시민권을 주었고 자치권마저 인정했다.

이에 폼페이는 로마 식민시가 되어서 퇴역 군인이나 부자들이 로마에서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윽고 폼페이 주민은 로마로부터의 이주자와 섞여 살았다. 사람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고 세금 부담도 없이 여유롭고 풍부한 속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서기 1세기경 로마는 시저의 시대가 끝나고 제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가 모든 호사를 다 부려서 밤낮 연회로 지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도가 일층 박해를 받던 시대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에 대항할 모든 세력이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고 지중해 일대를 우리 바다라고 할 만큼 대로마제국 난숙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것을 상징하듯이 겨우 수년 후에는 거대원형투기장 콜로세움 건설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고대 폼페이인의 생활

 

귀족의 생활은 매우 호사롭고 미식으로 날을 새는 매일이었다. 저녁부터 시작하는 만찬은 어슴푸레 어두운 침실에서 각자가 침대에 드러누워서 왼 무릎을 꿇고 오른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각 개인이 누워 자는 장소는 미리 정해졌었다.

만찬은 긴 시간을 두고 행해졌다. 노예가 오도블루를 시작으로 모든 산해진미의 요리를 운반해오면 저녁 식사는 어느 새 연회로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때로는 음악이 연주되고 남녀가 희롱하고 생각 외로 흥에 취하기도 하였다. 로마인은 따뜻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였다.

어느 연회에서는 넘치는 요리가 배열된 식탁 앞에서 입안으로 막대나 깃털을 넣어서 지금까지 먹은 음식을 토해내고 위를 비워서 다시 다른 요리를 먹는 일도 있었다. 손님이 토해낸 것을 치우는 일은 노예가 해야 했다.

이러한 역겨운 악취미의 포식 행위가 행해지는 한편 그 그늘에서는 빈부의 차가 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사하는 모순된 시대였다.

이처럼 폼페이만이 아니라 로마의 각 도시는 수도나 공중목욕탕 시설이 매우 고도로 정비되어 있어서 개인적인 욕실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부자들은 호사스러운 사우나를 겸한 욕실을 가지는 집도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듯이 로마의 도시는 거의 돌로 포장되었었다. 폼페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로는 모두 돌로 덮여있고 정비되어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큰비가 내리면 그대로 하수도 역할을 하였다. 빗물은 오물과 함께 사면을 따라 강이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였다.

 

발굴된 거리

 

그리고 횡단보도에는 징검다리가 놓여있어서 시민은 물이 넘쳐도 징검다리를 건너면 발이 젖지 않고 건널 수가 있었다. 특히 부잣집 앞 도로는 모자이크로 포장되기도 하였다.

시내에는 대소 4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그 곁에는 운동시설이 있어서 사람들은 구기 같은 게임을 즐겨서 땀을 흘리고 적당한 시간에 욕탕에서 땀을 빼러 가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인은 매우 목욕을 좋아해서 그들은 공중목욕탕에 모여서 하루의 태반을 보내기도 하였다. 거기서는 정치 얘기, 검투사의 시합과 도박 얘기, 음담패설까지 가지가지의 얘기들이 나누어졌다. 때로는 그 안에서 연회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마치 공중목욕탕이 일상생활의 일부이며 사론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공중목욕탕은 남녀 별 온냉수 별로 되어 있었다.

 

발굴된 목욕탕 건물

 

온수는 낮에 태양열로 덥혀진 것을 보일라에서 덥혀 욕실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냉탕에서 몸을 푼 다음에 온탕에 들어가서 몸을 덥히기도 하였다. 폼페인시는 화산 곁에 있지만 온천은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발굴된 빵집 아궁이

 

그러나 이처럼 청결을 좋아하는 로마인에게도 머리 이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한 듯하다. 상류계급 사람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 머리 이는 공통된 걱정거리였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시체에는 너무 긁어서 머리 피부가 벗겨져서 염증이 심했던 자취가 남겨지기도 하였다.

성애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특히 로마의 영향을 직접 받게 되어서 특히 퇴폐의 기색이 짙어졌다. 남의 아내로서 바람피우기는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고, 남자들의 바람피우기도 공공연시 되었으며 매춘숙소가 도시의 한 가운데 있어서 유객하는 여자의 간지러운 목소리가 대낮에도 울려 퍼졌다. 발견된 사창가 자취에서는 그리스 여자 노예가 포도주 겨우 두 잔 값으로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폼페이에는 오락 시설로서 2개의 극장과 원형경기장이 있었다.

극장에서는 음악이나 시낭송 그리스연극 등이 상연되었다. 특히 익살스러운 희극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곤 하였는데 관객의 흥미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형수를 써서 무대 위에서 실제로 집행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야외극장

 

원형투기장에는 잔혹한 쇼가 펼쳐지는 장소로서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높았다 한다.

휴일이 되면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기서는 검투사의 맹수와의 격투가 벌어지고 대량의 피가 흘려지는 것이었다. 굶주린 사자가 미친 듯이 검투사에게 달려드는 관경을 흥분 상태가 되어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이미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로마 문화의 퇴폐와 난숙의 정신을 거기서 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로마문화의 난숙하고 호화찬란한 가운데 폼페이는 신의 섭리대로 멸망하여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질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치스러움으로 오만해진 사람들에 대한 신의 노여움으로 인한 철퇴였는지 모른다.

 

베스비오스 화산

 

이 고대 도시에는 수일 전부터 멸망할 때를 예감시키는 징조라 할 수 있는 지진이 이어졌다. 그러나 많은 폼페이 시민들은 지진은 가라앉으리라 낙관하고 있었다. 베수비오스 화산은 정기적으로 활동하고는 쉬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그런 증거로는 서기 62년 2월 5일 격한 지진이 폼페이시를 뒤흔들어 피해를 입었으나 도시는 이전보다 더 훌륭하게 복구되어 되살아났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화산이 분화할 때의 무서움을 잊고 있었다.

또 이 화산의 화구는 노예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가 한 때 도망쳐서 숨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끌던 노예 검투사의 반란은 로마제국에 심각한 위해를 끼쳤는데 2년 후에 진압되어 수만의 검투사가 길가에서 깔리어 무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 노예들의 분노에 의한 것이 10년 후에 이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켜 폼페이를 비롯하여 주변의 도시를 함께 하여 지옥을 연출하게 되었다

겨우 표고가 1300m도 되지 않은 산이 폼페이시를 죽음의 재로 묻어버린 것이었다. 베수비오스산 산정부근에서 넓게 펼쳐진 포도밭이 수일 후에는 대분화에 의하여 다갈색의 용암으로 인하여 모두가 재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누가 예상했으랴. 그러나 잔혹한 운명은 몰래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베스비오스 화산의 폭발과 참상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에 대한 기록은 당시 로마 군인이었던 대 플리니우스의 서간을 그의 양자인 로마 문인,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에실리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61~112) 가 그의 친구인 역사가 코르네리우스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 55~120)에게 보낸 양부의 서간에서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당시의 기록이다.

그날 서기 79년 8월 24일 여름 한 낮에 돌연 분화는 시작되었다. 대지를 뒤흔드는 땅울림이 이어지고 엄청난 음향과 함께 베수비오스 화산의 산정은 날아가고 화구가 펑하고 입을 벌렸다. 분출되는 버섯 같은 구름은 하늘을 향하여 솟아올랐다. 머리 위를 검은 구름이 덮었다. 대낮인데도 폼페이시는 깜깜해졌다.

산산이 재와 돌멩이가 비처럼 내려왔다.

이윽고 화구에서는 긴 불꽃이 분출되고 고온인 펄이 냇물처럼 흘러 폼페이시가를 향하여 천천히 흘러갔다. 산은 3일 밤낮으로 재와 돌과 구름을 토해내고 모든 것을 묻어 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가 되어도 폼페이시의 많은 사람들은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들은 집안에서 내려오는 재와 돌이 약간 소강상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도 비처럼 내리는 재와 돌은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격해졌다. 어둠속에서 어깨를 끼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덥혀지는 재와 화산탄의 무게가 집 전체를 부셔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실제로 벽 일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고 지붕이 돌연 함몰하여 대량의 재가 떨어지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수 시간 후 재는 2m 이상의 높이로 쌓였다. 집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무서운 것은 새빨갛게 타는 돌멩이가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들은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떨어져서 도로나 집에 닿자 둔한 소리를 내면서 튀었다.

이제야 일각의 여유도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집이 무너지기 전에 안전한 장소로 피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전한 장소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부부초상화(빵집에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집 저집에서 기족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도 어둠속에서 방향을 모르고 손에 손을 잡고는 있으나 겨우 기어 헤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코와 입을 헝겊으로 막고 헝겊을 몇 겹으로 머리를 싸고 배회했다. 어느 가족은 힘이 다하여 괴로워하며 길가에서 죽었다. 어떤 사람은 떨어지는 화산탄을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아이들은 유독가스로 눈이 멀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지면을 기어 헤매다가 숨이 차서 질식사했다.

개는 고리를 풀지 못하여 짙은 연기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고리에 매인채로 죽어갔다. 집에서 기르던 노새는 통에 매인 채로 쓰러져 죽었다.

어떤 부자는 두 손에 금화를 꽉 쥐고 길가에 웅크려 죽었다.

어떤 가족은 최후의 순간까지 서로 얼싸 안고 최후를 맞았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꽉 쥔 채로 무서워 떨고 있는 아내를 의지해주며 지면에 엎드려 죽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웅크린 채로 질식사했다. 연인들은 서로 껴i안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겨우 수 십 분 전까지 아무 일 없이 생활해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지옥으로 떨어져 무참히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바다를 향하여 피난하려던 사람들은 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섭씨 몇 백도라는 고온의 화쇄류(火碎流)가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이윽고 순간 도망치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순간 모두 타 죽었다. 수 백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겹쳐지면서 죽어갔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살아남으려고 시체 위를 기어올라 조금이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하다가 결국 목이 타서 소사했다.

이렇게 하여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폼페이 시민의 약 1할인 2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재나 화산탄은 약해지지 않고 내렸다. 그것은 3일 밤낮을 내려쌓였다. 그리하여 폼페이시는 10m에 이르는 재가 층을 이루어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고대 폼페이시의 유적 발견 발굴

 

베수비오스 화산 폭발 후 폼페이시는 시간이 갈수록 잊혀져갔다. 천 수 백년 후 우연히 발견되어서 기적의 도시라고 부르게 되기까지 1700년 동안 화산회 밑에서 잠자던 폼페이시를 깨운 것은 한 사람의 우물을 파는 직공이었다.

18 세기 초의 일이었다. 폼페이 근교의 별장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대리석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모자이크라든지 그림액자, 금은 식기, 가지가지의 가구류 등이 속속 출토되었다.

그리고 폼페이에서 희생된 시체도 다수 발견되었다. 시체 그 자체는 부패 분해해버렸으나 화산회에 싸여서 굳어진 시체의 주형이라고 할 공간이 남아있었다.

조심스럽게 구멍을 뚫고 열린 공간에 의료 기구를 써서 공동 내부를 깨끗이 하고 석고를 유입시킨다, 3일 정도 후 굳어져서 꺼낸 것은 처참한 고뇌에 찬 희생자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희생당한 사람들의 자세를 정돈할 뿐 아니라 죽음을 맞는 순간의 고민하는 표정이나 입고 있던 의상에서 해어스타일까지 완벽하게 정돈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전의 직업, 연령, 성별, 건강상태까지 추측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 후 이 방법으로 몇 백 체의 시체의 주형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 살아 있다가 신의 뜻대로 갑자기 잠들게 된 2천 년 전 사람들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이리하여 폼페이에서 발굴해낸 가지가지의 출토품이나 시체들은 2천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적나라하게 진실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팍스로마나라고 자랑하던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였던 로마 사람도 실은 여러 가지의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즐기자 살아있는 한> 이것은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인생관을 나타내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