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일들
아마도 어린이와 강아지가 아니더라도 겨울이 되어 첫눈이 내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다 우리의 주변에 중대한 경사라도 있을 경우 눈이 내리면, 서설(瑞雪)이라 하여 더욱 좋아하고, 덕담의 소재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것이 상례일 것이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밤의 고요함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하늘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리는 함박눈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환희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신비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도록 한다. 도대체 하늘은 무슨 조화로 하얀 눈을 내리게 하여 저토록 온 누리를 아름답게 만든단 말인가. 나는 눈 덮인 설경의 정밀도 좋아하지만 눈이 내린다면 가벼운 서풍을 타고 함박눈으로 내렸으면 한다. 그러면 외투 깃을 높이 올리고 터벅터벅 눈에 취하여 이 세상의 오욕 칠정에 찌든 내 마음을 정화시키며 한없이 들길을 거닐어 무념무상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사년 새해가 밝아 얼마 되지 않은 이 겨울, 연일 대설 보도이다. 속말에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올해 소한과 대한 사이에는 인명 피해와 수천억 원의 재물의 피해가 따르는 40년만의 대설 한파라 한다. 폭설과 한파가 밀어닥쳐 전국이 냉동실을 방불하게 한 일주일이다. 아침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남국인 제주도에도 눈이 내렸다. 이 눈은 계속 삼일 동안 내려 영하의 날씨를 이루었으니 제주도 기상 관측상 15년만의 일이라 한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면 먼저 생각나는 일들은 어둡고 답답한 것들뿐이다. 서울의 노숙자들, 그들은 그 추운 밤을 어떻게 지낼까. 눈은 쥐구멍에도 쌓인다는데 이 추위에도 지하철 어느 구석에서 잠자리를 잡기나 할 것인가. 그러나 추위에 잠들어버리면 그것은 동사로 연결되는 것이다. 얼어 죽는 일은 없을까.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 노숙자를 이런 추위에 따뜻이 재울 시설 하나 제공하지 못하는 나라는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고 원망해 본다. 그러나 역시 가난은 나라가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살려는 의지와 현실에 맞추어 잘 적응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기도 하다. 생각나는 것은 이 뿐이 아니다. 달동네 판자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런 눈 위에 땔감은 누가 그 달동네까지 옮겨다 줄 것이며 수돗물이 얼어서 물은 어떻게 공급이 가능할 것인가. 꽁꽁 얼어붙은 비탈길을 넘어지지 않고 어떻게 다닐 수 있겠는가. 또한 두메산골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깊은 눈으로 촌락과 단절되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저 북쪽 시베리아에서처럼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아니면 《삼국지》라도 읽으며 한가롭게 이 깊은 눈 속을 지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봉덕에 불을 지펴놓고 고구마라도 구워 먹어가며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하고 손자 손녀들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을까. 그뿐이 아니다 낙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주일이나 대륙과의 교류가 끊긴다면 생활필수품의 보급이 끊겨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눈은 내려도 살포시 대지를 덮어, 온 누리를 하얗게 하는 정도면 좋을 텐데, 이렇게 한파와 함께 미터로 헤아릴 정도의 눈이 온다는 것은 낭만과 경이와 환희를 가져오기는커녕 암울하고 참담함으로 위협을 줄뿐이다. 과연 기상 이변이 아닌가.
눈이 내리면 좋아하는 것이 강아지요 어린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은 어린이일 것이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추위도 잊은 채로 해지는 줄을 모른다. 어린이는 추위를 견디는 힘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어린 때의 생각이 난다. 60년 가까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옛날의 일이다. 그 때는 인구도 적었고 산업사회가 오기 전의 농경 위주의 전통사회의 일이라 자연은 그대로 보존되고, 생태계에도 변화가 별로 없는 때의 일이다. 그 때는 눈이 자주 내렸다. 눈이 내려 들판을 덮으면 들판으로 새를 잡으러 나갔었다. 새를 잡으려면 생이치(새를 잡는 올가미)라는 것을 만든다. 치는 날일(日)자 모양이나 활 모양으로 만드는데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 곧 말총을 꼬아 만든 올가미를 치 틀에 맨 줄에 한 치 정도의 간격으로 달아 새가 덤벼들면 걸리게 만든다. 그리고 일자 모양의 치 틀에는 네 귀에 말뚝을 박을 수 있게 만들고 활 모양의 치 틀에는 세 곳에 말뚝을 만든다.
눈이 내려 온 들판을 덮어버리면 새들은 먹이를 구하지 못하여 떼를 지어 먹이를 찾아 몰려다니게 된다. 눈 덮인 보리밭 한가운데에 덮인 눈을 긁어내고 검은흙이 드러나게 하여 그 자리에 생이치를 박아두고 새 미끼로 좁쌀을 뿌려 두고서 멀리 바람을 피하여 망을 보다가 새떼가 한 번 날아와 앉아 먹이를 먹고 날아가 버리면 올가미로 만들어진 치에 새들이 걸려 파닥거리는 것을 달려가 한 마리씩 붙잡는다. 많이 잡힐 때는 일곱 여덟 마리씩이나 잡힌다. 그밖에도 새를 잡는 방법으로는 조 이삭에 말총으로 만든 올가미를 매어 섶 가지에 매달아두면 먹이를 좇던 새가 조 이삭을 뜯어먹으려다가 잡히기도 하였다. 잡아온 새는 털을 벗기고 내장을 빼낸 다음에 소금을 뿌려 숯불에 구우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다. 어려운 농촌이라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아기의 영양 보충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눈 속에 꿩이 집안에 날아들어 잡아먹었는데, 그 해 겨울이 지나기도 전에 그 집안에 불상사가 생겼다는 둥, 노루가 외양간에 달려들어서 잡아먹었는데, 그 집에도 또한 흉한 일이 생겼다는 둥 하여 어려움에 처한 짐승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을 듣기도 하였었다. 요즘 말로 하면 자연을 보호하여 생태계를 보존해야 한다는 선인들의 교훈이었지 않은가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조물주가 삼라만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종은 종마다 제각기 자연의 하나로서 제 구실을 맡기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섭리가 있는데, 탐욕스럽고도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몸에 좋다고 하면 야생의 짐승을 마구 잡아내는 일은 얼마나 조물주의 섭리를 어기는 일인가. 이렇게 자연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결국 자연의 하나인 인간마저도 자멸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라는 걸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부득이한 필요에 의하여 사냥을 하더라도 자연의 먹이사슬의 법칙에 따라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부족이 없도록 사냥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조물주의 섭리에 따르는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눈이 쌓이면 생이치를 들고 새를 잡으러 들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모이 부대를 짊어지고 들로 나아가서 새들에게 모이를 뿌려주고 오리라 하고 눈발이 멎기를 기다려야 하리라. *
'단상 >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을 맞으며 (0) | 2010.04.06 |
---|---|
한국인 비교 예찬(禮讚) (0) | 2010.01.10 |
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일들 (0) | 2009.10.09 |
전통과 이름 짓기 유감 (0) | 2009.09.14 |
가을날 새벽에 드리는 기도 (0) | 2009.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