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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일들

간천(澗泉) naganchun 2009. 10. 9. 13:52

 

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일들

 

 

 

평소에는 싱크대 앞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내자가 싱크대 앞에서 소리 질러 날 부른다. 오래 동안 사용한 가스레인지가 낡아서 교체하려고 하는데 가스 호스를 어떻게 빼야 할지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호스의 연결부분에 밸브가 단단히 잠겨있어서 풀기가 어려운 점도 있지만 가스가 새면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건드리기가 두려운 것이다.

 

문명의 근원은 불의 발견과 그 이용에서 유래한다고 하듯이 부엌은 가족의 식생활의 원천을 이루는 곳으로 주로 불을 다루는 곳이라 두려우면서도 일찍이 신성시하여 왔다. 따라서 여러 가지 풍습이 전해지기도 한다. 부엌에는 조왕신이 지키고 있다는 민간 신앙이 있어서 이사를 갈 때 불을 꺼뜨리지 않고 가지고 가는 풍습이나, 이사 간 집에 성냥을 가지고 가는 풍습 등은 불을 신성시하며 숭배하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화전민 촌에서는 부뚜막에 불씨를 보호하는 곳을 만들어 두는데, 이것을 '화투' 또는 '화티'라 부르며 불을 꺼트리지 않도록 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불을 얻기가 어려운 옛날에 집집마다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고 주부가 정성을 기울이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도 적지 않으리라.

 

문득 60년대 시골에서 살 때를 생각하게 한다. 그 때는 석유 호롱불을 켰고, 땔감으로는 짚을 때었다. 65년 무렵 묵은 집을 헐고 자리를 옮겨 새로 집을 지었는데, 그 때 생활개선의 일환으로 개수대는 일하기 좋게 하느라고 높게 하여 서서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었었다. 그러나 부뚜막은 예전처럼 낮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장작을 땐다면 높은 부뚜막 아궁이에 집어넣으면 될 것이나 짚으로 불을 때기 때문에 짚을 부엌 바닥에 놓고 아궁이 앞에 앉아서 계속하여 짚을 넣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두가 가스렌지를 쓰게 되었으니 아낙네들이 얼마나 편한 세상이 되었는가.

 

부뚜막 얘기를 하게 되니 문득 옛날에 땔감을 위하여 꼴을 베어야 했던 가을을 추억하게 된다. 처서가 지나면 한여름 지겹던 더위도 풀이 꺾여 한결 더움이 가시고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조 밭에는 탐스러운 조 이삭이 고개를 숙여 가을바람에 흔들거리고, 조밭 둘레에는 수수 이삭이 거무죽죽하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흔들거리거나 어떤 것은 뻣뻣하게 솟아올라 탐스럽게 보인다. 이 무렵이 되면 농가에서는 한겨울 마소를 먹이기 위하여 혹은 땔감을 위하여 꼴을 베는 시기가 된다. 동네 대장간은 낫을 만들거나 벼르기 위하여 분주해진다. 집집마다 남정네들은 분주하게 낫을 갈고 꼴 베기 준비에 바쁘다. 꼴을 베는 낫이란 보통 한 손에 잡고 베는 낫이 아니라 낫 길이가 40센티미터는 되고 자루는 한 발 반쯤 되는 것으로 서서 꼴을 베기 위한 연장이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 긴 낫만을 낫이라 이름하고 한 손에 잡고 베는 낫은 호미라 한다. 남정네들은 주로 이 긴 낫을 가지고 서서 하루 종일 꼴을 벤다. 그 능률이란 한 손에 잡고 베는 낫질(좀호미질이라 한다)의 수십 배는 더할 것이다.

 

가을바람이 불어 꼴을 베는 시기가 되면 어린 마음이라 언제면 꼴 베는 날이 올 것인가 하고 기다려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꼴 베는 날 새벽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산해진미의 반찬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보통 때는 구경도 못하는 흰쌀밥에 팥을 섞은 밥이 나오고, 돼지고기도 추렴하여 반찬으로 나오고,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게다가 끝물 고춧잎과 들깨 열매 줄기를 넣은 부침개가 나온다. 물론 고소리에서 짜낸 술도 한 병 준비된다. 한 겨울을 따뜻이 나게 하는 땔감을 준비하는 중대사라는 점도 있겠지만 꼴을 베는 일꾼에 대하여 후하게 대접을 하려는 어머니의 배려가 더 크다.

산야의 풀들도 푸른빛이 바래서 누른빛을 띠기 시작하고 넓은 들판 듬성듬성 경작지에는 하얀 메밀꽃이 한창 피어서 향기가 그윽하고, 스르륵스르륵 소리를 내며 푸른 풀을 베는 낫질 끝마다 꼴이 베어 눕혀지는데, 풀 냄새가 그리도 향기로웠다. 꼴을 베고 나면 일주일쯤은 말리고 다음에는 운반하기 위하여 꼴단을 묶는다. 한 아름 정도씩 묶어서 마소가 많은 집에서는 수 100여 바리, 한 바리는 한 아름 정도의 묶음 30단을 말한다. 마소가 없는 집에서도 30바리 정도는 해야 한 겨울을 날 수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낫꾼을 빌고 또 꼴단을 묶는 사람도 인부를 빌어야 했었다. 그런데 이 꼴단을 묶을 때와 베어서 묶어 놓은 꼴을 집으로 운반할 때는 어린아이라도 한 몫을 하게 되므로 학교를 쉬고 들로 나간다. 물론 진수성찬을 준비하고 가게 마련이다. 어린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마른 꼴을 한 묶음 정도씩을 한 데 모으는 일과 묶인 꼴단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다. 처음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마음으로 즐거워했으나 얼마 일을 아니하고 지겨워지고 언제면 저 해가 기울게 되나 하고 시간이 빨리 가기만 바라며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한 나절이 지나면 가을 해는 짧아서 어느새 일을 마칠 시간이 되고, 모아 놓은 꼴단은 산처럼 쌓이게 된다. 꼴단을 운반하기 위하여서는 또다시 일꾼을 빌어야 했는데 그 일꾼을 빌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마차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 집 꼴을 도맡아 운반해주는 아저씨가 계셔서 이 운반하는 일만은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우리 집 일을 해주신 그 아저씨는 나의 증조부님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의 병에서 구해주셨다고 하여 보은의 뜻으로 우리 집에서 어려워하는 꼴 운반은 만사를 제쳐놓고 해주셨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목뒤에 아기 주먹만큼 한 허물이 났는데 동네에서는 나력이라고 해서 죽는다는 것을 수술을 하여 치료해주신 분이 나의 증조부님이셨다고 한다. 그 아저씨의 아버지는 물론 그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그 병을 고쳐주었다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보답한 것이다. 나의 증조부님은 일찍이 제주목 절제사의 부인의 병을 치료하여서 이름이 높은 명의로서 구좌면 근동을 비롯하여 동쪽으로 정의현(현재 성산 표선 등지)까지에서 많은 환자가 모여들어서 치료를 하셔서 이름보다도 괴리(槐里=한동리의 옛 이름) 고 약국으로 통하는 분이셨다고 한다. 약국이지만 요즘 병원처럼 입원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하여 특히 허물을 수술하는 치료를 잘 하셨고 멀리서 온 환자들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입원을 하여 치료했다고 한다.

나는 중학교엘 간다고 시로 옮아 살았기 때문에 그 후로는 꼴 베는 일에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해를 계속하여 우리 집 일을 맡아 해주었었다. 그런데 대를 이어가면서 은혜에 보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한 아저씨는 어느 해 한 여름에 뇌염을 앓아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생각해보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인가. 그렇게도 인심 좋고 효성스러운 사람이 독한 병을 얻어 세상을 버리게 되다니, 하늘이 너무나 무정하다는 생각을 감출 길 없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고, “오늘 베푼 선은 내일 당장 돌아오지 않더라도 후손에게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으니 반드시 그 후손에게는 축복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염원한다.

 

생각해보면 근 60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석유나 가스를 땔감으로 하는 시대이니 산에서 땔감을 구할 필요도 없고, 수익이 낮다고 하여 메밀 농사도 짓지 않으니 메밀꽃 향기를 맡을 수도 없다. 꼴을 베던 산야에는 억새가 무성하여 향기 없는 하얀 꽃이 메밀꽃을 대신하고 있다. 자연도 재생이 가능한 정도로 사람의 손이 가야 제대로 생기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살기 어렵고 괴로웠으나 이제는 찾기 어려운 그 후한 인심과 사람다운 정이 넘치는 잊어버린 그 옛날이 그리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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