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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우주

물리학자가 해명한다. 언젠가 종말을 맞을 우주에서 우리가 사는 의미(2/3)

간천(澗泉) naganchun 2022. 6. 7. 03:28

 

 

물리학자가 해명한다. 언젠가 종말을 맞을 우주에서 우리가 사는 의미(2/3)

 

 

과학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발전하였다.

 

그 사이에도 나는 아직 심리학 리포트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과제의 노리는 바는 인류는 어째서 여러 가지의 경영에 당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막상 무엇을 쓰자고 하니 그 테마는 너무나 막연하다는 것을 느꼈다.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 아이디어를 그럴듯한 말로 쓴다면 잘 안된 리포트라도 취해질 것이다. 나는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문득 그런 것을 말하였다. 그러자 한 사람의 레지던트 아드바이서(Resident Advisor =미국 대학에서 기숙사의 감독이고 기숙생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상담에도 당해주는 사람)가 오스왈트 슈펭글러Oswald Arnold Gottfried Spengler1880-1936)서양의 몰락을 읽어보면 어떠냐고 권해주었다. 독일 역사학자로서 철학자로이기도 한 슈펭글러는 수학과 과학 어느 쪽에도 오랜 동안 흥미를 가지고 있던 인물로서 레지던트 아드바이서가 그 책을 권해준 것도 마침 그 때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저작에 대해서는 훼손폄훼가 있고 그 원인이 된 부분은 확실히 큰 문제가 있고 악질적인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하여 이용되기도 하였지만(슈펭글러의 이 책은 서양의 정치적인 내부 붕괴를 예언하였다고 해도 찬양하거나 몰래 파시즘을 옹호하고 있다고 하여 비난되기도 하였다.) 나는 문제의식이 너무도 좁은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기억이 남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가 흥미를 끈 것은 크게 다른 여러 가지의 문화를 종단하여 존재하는 <숨겨진 패턴>을 드러내기 위하여서의 포괄적인 한 패의 원리가 있다는 슈펭글러의 구상이었다.

그 숨겨진 패턴은 물리학과 수학의 지식을 일변시킨 미적분이나 유크리트(Euclid) 기하학에 의하여 상세히 기술된 패턴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슈펭글러는 나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대하여 쓰인 것이 수학과 물리학을 진보의 전범으로서 찬양하는 것도 흥미 깊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 깊이 놀라게 한 것은 그 책의 조금 뒤에 나타나는 다음의 말이었다.<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생물이다. 생물은 모두가 늙지만 인간 이외의 생물은 그 생물로서는 영원할 것으로 보이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순간만으로 한정된 의식을 가지고 늙는다.>이다.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고 한다. 인간만이 가지는 지식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여 본질적으로 인간만의 것이라는 무서움>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슈펭글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모든 종교, 모든 과학연구, 모든 철학은 그 무서움에서 유래한다.>

나는 이 일행을 숙독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동기에 관한 하나의 생각이 나타나 있고 나는 그 생각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수학의 증명에 매력이 있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성립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자연법칙이 마음에 호소하는 것은 그것이 시간을 초월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그러면 시간을 초월한 것의 탐구, 영원히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는 특질을 탐색하는 데로, 우리들을 구동시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사람은 시간을 초월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인생에는 한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일 것이다.

이 생각은 조금 전에 느낀 수학과 물리학과 영원의 매혹에 관한 하나의 견해와 반향이 맞아서 재빨리 과녁을 맞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죽음이라는 것에로의 당연한 반응에 기초를 둔 인간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어프로치였다. 그것은 생각을 다한 것 같은 어프로치는 아니었다.

슈펭글러가 끌어낸 결론에 대하여 생각하는 중에 나에게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 장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슈펭글러가 말하듯이 과학은 인생은 언젠가 끝난다고 알아 버린 것에로의 하나의 반응일 것이다. 종교와 철학도 또 그런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와 철학뿐일까.

 

프로이드의 초기의 제자로서 인간의 창조의 프로세스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오토 랑크(Otto Rank(Otto Rosenfeld)1884-1939)에게 말하게 한다면 그것뿐일 이가 없다. 랑크가 보기에 예술가란 창조에로의 충동을 가진 자이고 <그 충동은 허무한 인생을 영원한 목숨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1905-1980)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이 <자신은 영원히 계속하여 존재한다는 환상을 잃어버렸을 때> 인생 그것에 대한 의미를 잃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이나 그들에게 이어지는 다른 사상가에게 통하는 것은 예술의 탐구에서 과학의 발견까지 인류의 문화의 꽤 많은 부분은 한정되어 있는 생명의 본성에 대하여 사색하는 생명에 의하여 구동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얼른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수학과 물리학의 폭 넓은 영역에 골몰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느끼면 생과 사의 속 깊은 이중성에 휘몰린 인간 문명의 통일이론 등이라는 생각에는 말려들 것이라고는 누가 예상했을까?

일본어원문=物理学者かすいずれ終末える宇宙たちがきる意味

출처=https://gendai.ismedia.jp/articles/-/89884?pag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