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흐르는 물이 아닌 멈춘 물에 비추어 본다(내편 덕충부)
상계는 공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자기 몸을 닦는 것은 자기의 지혜로써 자기의 마음을 찾아서 자기의 마음으로써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마음을 깨달은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이는 것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곧 왕태는 개인적인 수양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마음을 깨친 득도자 일 뿐인데 어찌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이는 것인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그 물음에 대하여 과연 왕태는 개인적인 득도자일 뿐인지 모른다고 긍정하는 태도로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는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보지 않고, 멈춘 물에 비추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멈춘 물만이 능히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주므로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곧 덕이 있으면 덕을 찾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왕태는 덕이 있어서 고요한 물과 같으므로 덕을 찾는 사람들이 저절로 왕태에게로 모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마음을 쓸 때 명경지수처럼 고요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은 흐르는 물에는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보지 않고, 멈춘 물에 비추어본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잔물결이 찰랑대는 물에는 비추어볼 수가 없다. 멈추어서 고요한 물에만 비추어볼 수가 있다. 세상의 일도 모두 그런 것이어서 자신의 마음이 명예나 이익이나 애정 때문에 움직인다면 그 마음에 사회의 참 모습이 비추어지지 않는다. 또 만일 사회의 참 모습이 마음에 비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회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회의 참 모습을 알고, 이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내리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자신의 마음을 멈추어있는 물의 고요한 상태로 지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하라는 말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사상이나 구절은 모두 장자의 독창이지만 장자는 이것을 잠시 공자를 빌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공자도 결국은 장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을 이끌어 가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언이다. 이렇게 하여 교묘하게 상대의 사람들을 자기의 주장에 끌어들이려는 것이 장자의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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