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창신 溫故創新 ongochangsin

역사의 수수께끼/세계 여왕 이야기

스코틀랜드 여왕 메아리 스튜아트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2. 6. 28. 04:42

 

스코틀랜드 여왕 메아리 스튜아트 이야기

 

 

메아리 스튜아트 여왕

 

 

# 런던 올림픽 개최가 한 달 안으로 다가왔습니다. 차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이 자료를 소개합니다.(2012. 6. 28)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국왕은 1603년에 사거한 엘리자베스1세의 유언에 따라 스코틀랜드 여왕 메아리 스튜아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 왕국은 동일인을 국왕으로 추대한 동군연합이 되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 여왕 메아리 스튜아트의 혈통을 받은 왕이 현재까지 400여 년 간 왕위를 계승해오고 있다.

 

 

영국

(분홍색=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웨일스

빨강색=잉글랜드)

 

 

 

어린 여왕

 

1542년 11월 브리텐(Britain) 반도 일을 구실로 일찍부터 스코틀랜드를 노리고 있던 이웃 나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국경선을 침범했다. 맞대응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James V, 1512년 4월 10일~1542년 12월 14일)는 같은 편의 배신으로 크게 패하였다. 그 때 산달을 맞은 왕비 마리. 오프. 기스(Mary of Guise 、1515년 11월 22일~1560년 6월 11일)는 1542년 12월 8일 린리스고성에서 제임스 5세의 세 번째 아기로서 딸 메아리 스튜아트(Mary Stuart, 1542년 12월 8일~1587년 2월 8일)를 낳았다. 12월 14일 제임스 5세가 30세로 급서하였다. 장남과 차남이 일찍이 죽었으므로 메아리는 겨우 생후 6일로 스코틀랜드 여왕(국왕)이 되었다. 그 무렵 숲과 호수의 나라 스코틀랜드는 종교대립이 정치와 깊이 연결되어서 <친 프랑스파=가톨릭(구교도)>과 <친 잉글랜드파=프로테스탄트(신교도)>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아버지 제임스 5세와 어머니

 

 

아들(후 잉글랜드왕)과 메아리

 

처음으로 여왕의 섭정이 된 아란백작(James Hamilton, 1st Duke of Abercorn, 1811년 1월 21일~1885년 10월 31일)은 친 잉글랜드파(프로테스탄트=신교도)였다. 아란백작을 지원하고 있던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는 자신의 아들 에드와드(Edward VI, 1537년 10월12일~1553년 7월 6일=후 6세, 메아리보다 5살 연상)와 여왕 메아리와의 혼담을 가지고 왔다. 7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 간에 그리니치 조약을 맺고 어린 메아리와 에드와드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란백작은 국내의 친 프랑스파와 타협하여 12월에 그리니치조약 파기를 선언하여 여왕 메아리와 에드와드의 약혼은 취소되었다. 이어서 일어난 친 잉글랜드파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13세의 메아리

 

이 보고를 들은 헨리8세는 격노하여 어린 여왕을 빼앗고 나의 아들 에드와드에게 결혼시키려고 다시 스코틀랜드에 침입하였다. 이번에는 방어하는 자도 없어서 수도 에딘바라는 잉글랜드 병사의 손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쫓긴 메아리의 어머니 마리황태후는 딸을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을 시골 수도원에 숨기고 5세까지 키운 후 자신이 프랑스(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적과 동지라는 깊은 관계였다.) 출신이기도 하여 비밀리에 딸을 프랑스에 망명시켰다.

 

프랑스로 망명

 

메아리를 프랑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형식적으로 약혼을 했던 1세 연하의 프랑소와 황태자와 그 양친인 프랑스국왕 부처였다.

프랑스 국왕 앙리2세는 메아리를 <작은 여왕님> 이라 하고 왕비인 가트리느 메디치도 메아리를 마음에 들어서 귀여워했다. 16세기 중엽 프랑스 궁정은 수많은 유럽 궁정 중에서도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궁정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프랑스에서도 개화하여 중세 기사도정신과 르네상스의 화려한 고전문화가 하나가 되어서 찬란한 궁정문화가 꽃피었다. 이런 궁정에 등장한 어린 메아리는 그 사랑스러움이나 명랑함으로 주위를 매료시키면서 미래의 프랑스 왕비로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는 말할 것도 없고 라틴어, 그리스어 등에도 뛰어났다. 문예의 재능과 함께 자수를 하면 일류의 작품이 되고 말을 타면 남성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고삐를 잡았다. 시아버지가 될 프랑스국왕 앙리2세가 <이런 완벽한 아이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의 성장을 보였다. 15세가 될 무렵에는 <프랑스 궁정의 꽃>이라 하게 되었다.

 

프랑스 왕비가 되다

 

1558년(15세) 4월 메아리는 프랑스 황태자 프랑소와와 결혼하였다. 동년 11월 17일에 제임스5세의 사촌 누이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 9월 7일~1603년 3월 24일)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메아리의 시아버지인 프랑스왕 앙리2세는 <서자인 엘리자베스보다도 헨리 7세의 적출(메아리의 조모 마가레트는 헨리7세의 딸이다.)인 메아리야말로 정당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자이다.>고 항의하였다. 여기에는 갓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도 격노하였다.

그 1년 후 프랑스 국왕 앙리2세(Henri II de France, 1519년 3월 31일~1559년 7월 10일)는 기마시합 중 사고로 급사하였다. 메아리의 남편인 프랑소와는 1559년(16세) 7월 국왕 프랑소와 2세(François II de France, 1544년 1월 19일~1560년 12월 5일)가 되고 그녀는 프랑스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병약한 프랑소와는 1년 반 후에 16세로 병사하고 말았다.

 

스코틀랜드로 귀국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남편이 죽은 이상 메아리가 프랑스에 체재하는 것은 프랑스왕가 측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메아리의 어머니 마리 오프 기스(Mary of Guise、1515년 11월 22일~1560년 6월11일=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5세의 비, 여왕 메아리 스튜아트의 모)가 사망하여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귀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61년(18세) 8월에 에딘바라(Edinburgh) 외항 리즈에 2척의 갈레이(galley)선이 도착하여 메아리는 스코틀랜드 여왕으로서 13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깊은 메아리는 열렬한 가톨릭교도(구교도)였으나 한편 당시 스코틀랜드는 이미 프로테스탄트(신교도) 세력이 우세하였다. 게다가 정치 항쟁이 더해져서 오랜 동안 스코틀랜드를 떠나 있던 가톨릭교도인 메아리 여왕에게 치는 바람은 거세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젊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마술에도 뛰어난 메아리 여왕은 틈을 내어서 왕국의 각지를 순회하였다. 말 위에서의 시원한 모습과 군세를 지휘하는 그녀의 씩씩한 모습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반목하던 귀족들도 여왕의 매력에 함께 뭉쳤다.

그러나 메아리는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온건한 인품으로 사람들을 붙잡아 <여왕의 종교는 환영하지 않으나 여왕은 대환영이다.>라고 하여 받아들였고 메아리 자신도 가톨릭교도이면서도 프로테스탄트의 권리를 보증하고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유력한 귀족 마리 백작 제임스 슈트와트(James Stewart, 1st Earl of Moray,1531년~1570년 1월 11일=메아리의 이복 오빠)를 임명하는 넓은 도량을 보였다.

그런 무렵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메아리의 귀국에 따라온 종자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시로 여왕을 찬미하고 그 총애를 받던 샤도라르라는 남자가 대담하게도 여왕의 침실에 숨어들어서 체포되었다. 당연히 그는 불경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는 단두대에서 메아리의 궁전을 향하여 <안녕 여왕이시여! 가장 사랑하는 여왕이시여! 가장 잔혹한 여왕이시여!>하고 소리 지르면서 참수 되었다.

 

단리경과의 재혼과 파란

 

이런 와중에 메아리 여왕은 자신과 같은 핏줄인 스튜아트가의 피를 받은 단리경(Henry Stuart, Lord Darnley、1545년 12월 7일~1567년 2월 10일)이라는 보기에는 훌륭하나 절조가 없이 오만한 잉글랜드 귀족에게 마음이 끌리어 주위의 만류를 듣지 않고 만나서 5개월만인 1565년(22세) 7월에 재혼하였다.

 

남편 단리경

 

이 재혼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메아리와 같으며 잉글랜드의 유력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단리경과의 재혼으로 메아리의 왕위계승권이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결혼 후 이 재혼은 경솔한 판단이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1565년(22세) 8월 1일에 마리백작(James Stewart, 1st Earl of Moray,1531년~1570년 1월 11일=스코틀랜드 왕 제임스5세의 서자. 신교도 귀족 ,메아리의 이복 오빠)이 엘리자베스의 원조를 받고 1200명의 병력으로 메아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지원군이 오지 않아 스코틀랜드 군에 패배하여 그는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마리백작은 반란에 대하여 메아리여왕에게 사죄하고 다시 복귀하였다.

그 무렵 남편인 단리경은 횡포와 왕위를 요구하기도 하여 애정에 균열이 생긴데다가 여왕을 위로하던 비서 리치오(Riccio)를 질투한 나머지 리치오의 권한이 점점 강화될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과 함께 모반을 일으켜 1566년(23세) 3월 9일 리치오를 체포하고 메아리의 눈앞에서 참살하였다.(리치오 살해사건)

 

수난과 남편의 죽음  

         

이 모반에 의하여 리치오는 살해되고 메아리는 암살은 면하였지만 모반인들의 포로가 되었다. 이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마리백작은 에딘바라(Edinburgh)에 귀환하여 의회에 의하여 다음 3개의 의안을 결의하였다.

1) 단리경에게 <혼인에 의한 왕관>을 줄 것.

2) 스코틀랜드에 프로테스탄트(신교도)를 제정할 것,

3) 메아리는 스탈린성에 유폐한 다음 종신형 또는 사형에 처할 것 등이다.

그러나 메아리는 냉정히 행동하여 시기심이 강하고 소심한 단리경을 회유하여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때 단리경의 아이를 배어서 6개월이 되었는데 탈출 후에는 휴식도 취하지 않고 병사를 모아서 우수한 군인 보스웰백작(James Hepburn, 4th Earl of Bothwell、1535년~1578년 4월 14일)의 협력 위에 귀환하였다. 모반인들 태반은 잉글랜드 등에 도망쳤다. 그러나 쿠데타 후에 에딘바라에 입성한 마리백작 만은 쿠데타의 후였기 때문에 문책을 면하였다.

승리한 메아리는 그 후 3개월 후인 6월 19일에 단리경의 아들을 낳았다. 그는 후에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가 되고 후에 다시 잉글랜드왕 제임스1세가 되었다.

남편 단리경에게 정이 떨어진 메아리는 먼저 쿠데타 진압 시 활약한 보스웰백작과 사랑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1567년(24세) 2월 10일 에딘바라 교외의 오필드의 큰 저택이 대폭발하여 단리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연히 메아리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화를 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아리에게 <곧 자신이 의심을 받지 않도록 범인을 검거하여 결백을 증명하라.>고 하는 충고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보수웰과의 결혼과 퇴위

 

그러나 메아리는 이 폭발이 단리경을 노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노린 짓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범인을 적극적으로 찾아낼 수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 위에 메아리는 3개월 후 범인이라고 주목한 보스웰백작(James Hepburn, 4th Earl of Bothwell、1535년~1578년 4월 14일)과 재혼하였다. 이 축복 받지 못할 결혼에 국내외의 비난이 집중되고 국내에서는 그 결혼을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보스웰의 아이를 배고 있던 메아리는 둘이서 여기저기 도망쳐 다니다가 6월 15일 재혼 반대 반란군에 항복하였다. <매춘부를 태워 죽여라.><남편을 죽인 자를 태워 죽여라.>라는 민중의 매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메아리 여왕은 애딘바라(Edinburgh)에 연행되어 로흐레벤(Loch Leven Castle) 성에 유폐되었다. 보스웰은 도중에서 메아리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는 후에 덴마크에서 체포되어 10년 후에 발광해서 죽었다.

유폐의 몸이 된 메아리는 반란군에 의하여 보스웰하고 이혼하도록 하였으나 사생아를 낳을 수 없다 하여 이혼을 거부하다가 후에 유산시켰다.

1567년(24세) 7월에 메아리는 퇴위하고 1살인 아들이 제임스 6세라 하여 스코틀랜드왕으로 즉위하였다. 프로테스탄트(신교도)인 마리백작(메아리의 이복 오빠)이 섭정이 되었다.

1568년(25세) 5월 메아리는 유폐되었던 로흐레벤성을 탈주하였다. 메아리가 탈주했다는 소식은 곧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지고 <비운의 여왕을 살려라.> 하고 6천 명의 병사가 모였으나 그 오합지졸들은 마리백작의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피난

 

메아리는 어머니의 나라 프랑스에로 갈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도망쳤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메아리에게는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가 메아리나 제임스 어느 쪽이든 후계자로 지명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 도망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꽤나 역겨운 일이었다. 메아리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엘리자베스에게 위협이 되었다. 왕족 친족이니까 체포해서 스코틀랜드로 보낼 수도 없고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가 간섭할 것이 눈앞에 훤하다. 다시 메아리가 열심인 가톨릭(구교도) 신자라는 것으로 프로테스탄트(신교도) 편인 엘리자베스 1세로서는 가톨릭 세력의 의지해야 되는 인물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결국 메아리를 절도 있고 꽤 자유로운 연금 상태로 두었다. 메아리에 대한 대우는 일국의 여왕을 지낸 사람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항상 감시당하고 철창으로 가두어진 어두운 방에서 겨우 몇 사람의 시녀가 있어서 감시 하에 교회에 나가는 정도가 허용되었다. 그렇게 연금 상태에 있는 메아리에게 엘리자베스 1세는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한 유폐

 

메아리는 엘리자베스에 의하여 19년 간(25세에서 44세까지) 유폐되어 북부나 중부의 성을 수인과 같은 신세로 전전했다. 처음에는 낙관적이었던 메아리는 엘리자베스의 구두 약속을 믿고 자신의 왕녀로서의 권리회복을 도와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메아리의 남편(다린경) 살해의 의혹을 가지고 메아리와의 약속을 깨고 재판으로 애매한 상태로 결정이 나도 메아리를 확고한 이유도 없이 감금을 계속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운동부족으로 보기 싫게 살은 찌고 류마치스로 다리는 휘고 30대이지만 머리는 백발이 되었다. 이윽고 메아리는 <반 엘리자베스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 1세는 메아리를 엄하게 처벌하는 일도 없었다. 또 스코틀랜드의 메아리의 아들 제임스 6세(James VI. Charles James Stuart, 1566년 6월 19일~1625년 3월 27일)는 섭정을 맡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마리백작의 영향으로 어머니 메아리의 처우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살해음모와 사형

 

1586년(43세) 가톨릭(구교도)의 귀족인 안소니 바빙턴(Anthony & Babington) 이 엘리자베스 암살 계획을 편지로 보고하여 메아리는 이에 동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계획이 발각되어 바빙턴 일당은 체포되고 메아리의 편지도 압수되었다. 그래서 체포되어 <잉글랜드 여왕을 암살 혹은 위기로 떨어뜨리기 위하여 여러 암살 계획을 구상한 죄>로 재판에 의하여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바빙턴(Babington) 사건>은 잉글랜드 정부에 의한 음모설이 농후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의회에서의 재삼의 사형 집행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 받아 <타국의 여왕을 반역죄로 재판한다.>는 부당성 때문에 저항하여 서명을 미루었으나 1587년 2월 1일 마침내 사형선고서에 서명하였다.

1587년(44세) 2월 7일 메아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당일 3시간에 걸쳐 붉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메아리는 여왕으로서의 기개 높은 태도로 단두대로 스스로 나갔다. 향년 44세였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서거한 후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것은 메아리의 아들 제임스로 자식이 없는 엘리자베스 1세의 유언에 따라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왕 제임스 1세이기도 하였다. 일찍이 어머니의 죽음을 못 본 채한 제임스도 잉글랜드 국왕 취임 후 1612년에 어머니의 유해를 페터바라사원(Peterborough Cathedral)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겼다. 현재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묘지에는 메아리 스튜아트와 엘리자베스 1세가 같이 잠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