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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1. 9. 3. 06:23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이야기

미신이 사람들을 살인마로 몰아넣는 공포의 시대

 

 

재앙과 마녀

중세 유럽세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재앙이 빈번히 일어났다. 전쟁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여러 가지의 자연재해, 기근, 역병 등이 유행하였다. 그 때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사람들의 매일의 생활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앙으로 불안정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4세기 처음에 일어난 대기근은 전농촌의 3분의 1이 폐촌이 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모든 농민은 영양부족으로 죽든지 거지가 되어서 각지를 방황하든지 했다. 농민 중에는 부패하여 맥각균 독이 든 나맥으로 만든 빵을 먹고 미쳐서 죽기도 하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매장한 시체를 파먹는 사람도 있었다. 시가에는 고아, 노인, 병자, 불구자가 넘치고 매일 죽어갔다. 누구나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만 정신이 묶여서 이런 일들을 돌아보지 못하였다.

 

어떤 농민은 비탄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매일 마시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까지 하여도 보수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주의 발길에 차이는 일과 저주의 말뿐이다.

얼마나 이 말이 당시의 농민의 심경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갈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해서 결국 강도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50년 정도 후에는 중세 최대의 재앙인 흑사병이 대유행했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무엇이 자신들에게 재앙과 불행을 가져오는지 그 원인을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다.

 

재앙은 마녀의 요술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재앙 곧 기근, 역병, 천재지변은 마녀가 행하는 요술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리하여 광신과 미신으로 인하여 점점 점화된 불꽃은 공포라는 기름을 부어넣어 불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그 불꽃을 끌 수는 없다. 불꽃을 가져오는 마녀를 찾아내어 철저히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핏줄이 선 눈으로 마녀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이리하여 마녀 사냥의 불꽃은 전염병처럼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이다. 이윽고 마녀라고 의심되는 자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그런 때문에 고문이 행해지고 그 가혹함은 날로 가슴이 아플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마녀재판

마녀재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이단 심문 재판이 그 전신이 된다고 한다.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철저히 금지하고 박해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시간이 감에 따라 질과 양이 증가되기만 하였다. 마녀는 이단자이고 이 세상에 재액을 가져오는 존재였다. 가톨릭교회는 마녀를 발견하기 위하여 공연히 밀고를 장려하였다. 백성이나 귀족이나 상인도 비록 성직자라해도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녀사냥으로 인한 희생자는 여성만이 아니고 남녀노소가 희생이 되었다.

어떤 장소이거나 일상 모든 밀고와 용의의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상한 몸짓, 우연히 튀어나온 말, 조금이라도 이상한 언동이 있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의심을 받고 밀고 당할 수 있는 두려움 속에 있게 되었다. 오늘인지 내일인지 자신의 운명을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친한 사이라도 마음을 열 수 없고 부모, 형제마저 신뢰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가족의 유대는 깨어졌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극히 가까운 친구나 형제한테서 밀고당하여 처형된 것이었다.

이 무서운 폭풍은 약 500년 사이에 중세 유럽에 불었다. 마녀 재판으로 8백만이라는 무고한 사람이 처참한 고문을 받고 마녀라고 단정되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더러운 오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마녀 사냥에 의하여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것은 독일, 스코틀랜드, 프랑스 순이었다고 한다.

 

마녀라고 의심을 받은 사람은 심문관 앞이 불려나가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먼저 고발문을 읽는다. 그것은 대개 태아를 죽여서 먹었다든지, 시체를 개구리와 뱀과 섞어 삶아서 마녀의 비약을 만들고 동네에 저주를 걸어서 재앙을 불러왔다는 내용이다. 대개의 용의자는 나는 마녀가 아니라든지 죽이지는 않았다든지, 그것은 틀리다든지 음모라고 절규하지만 무엇을 말하여도 헛일이었다. 그 중에는 악마는 너희들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교회를 향한 저주스러운 악마라고 처리되어 고문대로 보내지는 것이 상례였다.

 

고문

심문에 의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다음은 고문이라는 무서운 단계로 옮기게 된다. 먼저 피고는 옷을 벗기고 나체가 되어서 새우처럼 웅크리고 매달렸다. 그 때 고통을 높이기 위하여 발에는 무거운 물건을 매단다. 그리고 몸뚱이를 뒤져서 증거를 찾는 일이 벌어진다. 증거란 악마의 마크라는 각인으로 악마와의 성교 시에 만들어져서 악마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오늘 날 누구에게나 볼 수 있는 보통의 멍든 자국이나 사마귀, 검정 사마귀 등이 이 시대에는 악마의 지문이나 입술 자국이라 하여 마녀라고 단정하는 유력한 증거였던 것이다. 그래도 발견되지 않으면 목에 막대를 집어넣어서 토해내게 하거나 많은 물을 마시게 하여 배설하게 하여 토사물을 탐색한 것이다.

<마녀를 헤엄치게 한다.>는 방법으로 유무죄를 정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먼저 피고의 머리나 수족을 묶고 연못에 넣는다. 피고가 헤엄을 치면 유죄로 마녀라고 간주된다. 잠겨서 익사해버리면 무죄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녀가 물보다도 가벼운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피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고문의 종류

자백을 강요하기 위하여 행한 처참한 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스페인 부츠라는 고문은 철제의 장화가 신겨져서 신발과 발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것이다. 제일로 선혈이 분출하고 너무나 아파서 형을 받는 자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절규를 한다. 대강의 경우 세 번에 무릎의 뼈가 부서지고 골수가 새나온다.

마녀의 의자라는 고문도 있었다. 엉덩이를 붙이는 부분이 비어있는 철제 의자에 앉혀서 밑에서 촛불을 붙이는 것이다. 고문이 시작되면 수형자의 엉덩이는 불에 타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음모나 항문 엉덩이의 살이 타서 무서운 고통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들은 배변도 하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만다.

성 안드레의 십자가라는 고문도 있다. 이는 수족을 십자가 위에 철제 고리에 고정시켜 주위에서 고리로 신체를 천천히 잡아 댕기는 것이다. 수형자는 차차 호흡을 못하게 된다. 몸부림치지도 못하여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최후에는 나무 막대가 꺾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로 수형자는 결국 죽게 된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의 고문이 있었다.

새빨갛게 다른 철제 꼬지를 발바닥이나 엉덩이에 대거나 눈 뚜껑을 닫지 못하게 하여 천천히 바늘을 눈동자에 찌르거나 혀를 잡아당기는 것이다.

그 중에도 물고문은 잔인한 것이었다. 먼저 가죽으로 만든 깔때기를 입에 끼고 물을 흘러들게 한다. 위가 부풀어 오르면 복부에 사람이 타서 흔들고 입으로 뱉어내게 한다. 그리고 다시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이를 몇 번 되풀이하면 피가 섞인 물을 토하게 된다. 수형자는 고통스러운 나머지 몸부림치게 된다. 자백하기까지 반복된다.

이렇게 고문을 한 결과 인간은 잠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없었던 일이라도 자백하게 되는 것이다.

곧 요술을 부려서 역병을 오게 한 것은 자기들이라고 한다든지 심야에 마녀집회에서 아이의 내장을 먹었다고 절규하는 것이었다.

일단 자백을 하면 그런 내용을 관리들은 적는 것이다.

 

화형

자백을 하면 그 수형자는 마녀로 간주되고 산 채로 화형에 처하게 된다. 그럴 때에 밑에서 장작에 불을 때는 사람은 명예로운 역할이었다.

장작에 불이 붙으면 무섭게 불이 타오른다. 동시에 수형자의 절규가 하늘을 찌른다. 이때가 절정이라서 구경꾼들도 망연자실하는 순간이다. 이윽고 수형자는 숨을 거둔다.

중세의 이 사악한 마녀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은 3일간에 10만 명이나 구경하였다고 한다.

마녀 발견업자란 상인도 생겨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에게 고발당하지 않을까 하여 매일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다.

아무튼 마녀로서 처형당한 사람의 재산은 전부 몰수되고 그대로 재판관이나 교회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처형에 사용된 장작이나 연료, 처형대의 재료 등을 조달하는 업자를 알선하는 일로 뒷거래를 하였다고 하니 마녀 재판이란 교회의 재산을 늘리는 가장 효율적인 수입원이었다. 사실 이를 반증하는 듯이 무제한의 살인을 정당화하였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사건도 다수 기록되고 있다.

예를 들면 1460년 북 프랑스의 알라스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은 머리가 이상한 노파, 여러 사람의 남의 처, 노화가 등 수명에게 용의가 있다고 한 사건이다. 그들은 마녀 집회에 참가하여 무차별 성교를 되풀이하여 신에 대한 모독을 행하였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정식 절차도 없이 갑자기 고문을 받은 그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아무렇게나 불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마녀라는 낙인이 찍히고 화형에 처하여 아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후에도 다수의 사람이 적발되어 처형되었다.

 

감형

처형 직전에 1분간이라는 자기변호의 시간이 주어졌으나 그 실체는 목숨과 금품을 교환하지는 것이었다. 약간의 부자만이 전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사들였으나 그런 사람은 참으로 약간이었다.

1637년에 독일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은 한 사람의 착란 증을 앓는 노파의 말로 다수의 사람의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처참한 고문에 의한 고통으로 미쳐버린 노파는 심문하는 대로 차례차례로 마을 사람을 공범자라고 불었다. 그 수는 실로 45명이나 되었다. 노파가 죽은 다음에도 이들 마을 사람들은 심문의 마수에 걸려서 그들도 고문의 무서움에서 피하려고 다른 사람을 공범자라고 불었다.

이리하여 희생자의 수는 마침내 수 백 명이 고문 끝에 처형당하였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재산을 늘리는 데에 맛을 들인 이단 심문 법정이 본래의 역할을 잊고 재산을 몰수하기 위하여 무죄한 사람을 마구 처형한 예라 할 수 있다.

이후로 사람들은 마녀재판이 행해지는 데에 대하여 언제 누가 자기의 이름을 대지나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낸 것이다.

 

마녀사냥의 종말

1755년 독일의 바바리아에서 행해진 마녀재판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과학과 합리주의 시대가 와서 사람들 마음에 합리적인 생각이 싹트게 되자 무지몽매하고 미신이라는 토양에서 파생한 광신주의를 씻어버린 것이다. 500년 간 중세 유럽에 불었으나 사람들은 다음에 오는 시대는 어떤 시대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제국주의시대가 오고 혁명과 근대 무기에 의한 대량살상의 시대가 왔다. 마치 마녀사냥에 자리바꿈한 대량 살상의 시대였던 것이다.

닥친 공포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으로 생각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