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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역사의 수수께끼

사막의 여왕 제노비아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1. 9. 22. 08:16

 

사막의 여왕 제노비아 이야기

 

 

* 3세기 로마제국의 군인황제 시대에 통상도시 팔미라를 수도로 하여 번영했던 나라, 팔미라왕국 또는 팔미라제국(Imperium Palmyra, 260년~ 273년)의 여왕 <제노비아>의 이야기이다.

 

 

팔미라의 여왕

 

사막의 나라 시리아의 중앙에 팔미라(Palmyra)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지금은 폐허뿐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 3세기 무렵에는 이 땅은 소아시아에서 이집트, 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대한 로마제국을 상대로 지중해의 자웅을 다투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 팔미라는 막대한 부를 이루고 영광과 번영을 누리었다. 이 땅에 군림한 것은 제노비아(Zenobia)라는 기개 높은 아름다운 여왕이었다.

그 여왕은 3세기 무렵 시리아 동부에 있는 사막에서 태어났다. 집시의 수령이었던 아랍인을 아버지로 하고 어머니는 이름다운 그리스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닮아서 갈색 피부에 눈은 어머니를 닮아서 검은 진주처럼 빛났다.

제노비아는 어려서부터 재색이 뛰어나서 12세가 될 무렵엔 두각을 나타내어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시 전체를 지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낙타를 타고서도 어른에 못지않은 기량을 발휘하였다.

한편 18세기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 1737년~1794년=영국 역사가)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제노비아의 미모에 대하여 “클레오파트라에 뒤지지 않고 정결과 용기는 훨씬 능가하며 모든 여성 중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영웅적”이라고 했다. “치아는 진주처럼 희고, 크고 검은 눈동자는 신비스럽게 빛났고 매력적인 감미로움이 이를 부드럽게 했다.”고 하고 또 ”오리엔트 세계에서 굴지의 여걸“이라고 평했다.

 

번영한 오아시스 도시

 

당시 이 시리아 사막 중앙에 있는 팔미라는 동서 무역의 중계지로서 번영하는 절정기였다. 팔미라의 오아시스는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을 거쳐서 연연히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종착점에 위치하여 낙타 등에 가득 싣고 긴 여행을 하는 대상들에게는 피곤과 마음을 쉬는 휴식처이기도 하였다.

 

사면문과 열주도로 유적

 

베르 신전 유적                              제신의 조상

 

팔미라에서는 많은 바자가 열려서 동서에서 금, 은, 보석, 실크, 소금 등 상품이나 장식 미술품, 가지가지의 진기한 물건들이 거래되었었다.

오아시스 주위에는 곡물, 견직물, 대추야자 등을 저장해 둔 창고가 많이 있었다.

다시 시내 중심에는 장려한 신전, 궁전 등이 건설되었다. 이르는 곳마다 조각해 놓은 거대한 석조의 원주가 숲처럼 서있었다.

그 둘레에는 수많은 훌륭한 집들이 있고 마을 주위는 십 수 킬로나 되는 든든한 성벽으로 둘러 지켜지고 있었다.

시가 중심지에 이어지는 문에는 지붕이 덮인 아케이드가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수많은 원주가 쓰이어서 사치스러운 조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있어서 팔미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을 약속 받은 오아시스 도시였다.

 

로마제국의 지배

 

거대한 부가 모이는 이 오아시스도시를 호시탐탐 노리는 강력한 제국이 있었다. 하나는 동쪽의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이고 또 하나는 서쪽의 거대한 대로마제국이었다.

이 무렵 거대 로마제국은 쇠퇴 일로를 걷고 있었다. 오랜 동안 침략하여 획득한 광대한 영토의 어느 곳에는 항상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제국 주변에서는 만족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한 번은 이 반란을 진압하려 하다가 3개의 보병군단을 전멸시킨 일도 있었다.

다시 3세기에 이르러서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가 격감하고 농업 노동력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게다가 동쪽의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의 공격이 활발해져서 제국은 만신창의 상태가 되어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막대한 공물을 징집할 수 있는 속주가 필요했다.

로마제국은 군대를 보내어 팔미라를 지배하에 두고 마음대로 징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팔미라인은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팔미라의 독립 쟁취

 

이무렵 로마제국 지배 하에서 팔미라를 통치하고 있던 젊은 귀족 오데나사스(Septimius Odaenathus、 ? ~ 267년)가 제노비아를 처음 보고 반해서 결혼하고 제노비아는 팔미라의 왕비가 되어서 궁정에서 살았다. 그 때 제노비아는 18세였다.

오데나사스도 제노비아도 로마의 횡포를 싫어했으므로 결혼하는 그 날부터 두 사람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비밀리에 사막에서 야영하면서 군대의 훈련에 시간을 보냈다.

제노비아는 야영을 하면서 사관들과 같은 조건으로 행동을 함께하고 결코 약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행군 중에는 며칠이라도 말 위에서 지내고 병사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식사를 했다.

그녀는 교양이 풍부한 여성으로서 그리스어, 아라비아어, 기타 여러 나라의 말을 말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출신이 다른 병사들에게도 여러 나라의 말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행동력은 남자를 능가하였다. 기개가 높고 드문 미모와 검은 빛나는 눈동자는 부하 병사들을 매료시켜 사관들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제노비아의 병사는 짧은 기간 내에 훈련 숙달 도를 높이고 사기는 왕성하며 정예의 병사가 되었다.

마침내 제노비아와 그 남편 오데나사스는 그들 스스로 키운 정병을 지휘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녀의 군대는 팔미라의 북쪽에 주둔한 로마군을 습격하였다.

불의에 공격을 받은 로마군은 대혼란에 빠져서 패주하였다. 제노비아의 군대는 로마군을 철저히 추격 섬멸하여 이에 팔미라시민이 비원이었던 독립이 달성되었다.

 

팔미라의 여왕으로서 전제

 

이 승리의 기쁨에 경탄한 주변의 여러 나라는 점점 제노비아군단에 가담했다. 얼마 없이 강대한 힘을 가진 제노비아 군대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비극이 일어났다. 남편인 오데나사스가 행군 중에 암살당한 것이다. 

제노비아는 이 비극의 슬음에 빠지지 않고 팔미라 전군을 통솔하여 오데나사스의 의지를 물려받아서 전력을 경주하였다. 스스로 전제군주가 된 제노비아는 숨 들릴 틈도 없이 로마 속주의 하나인 이집트에 7만의 대군으로 진격하였다. 이집트는 문화가 앞선 풍부한 나라로서 로마제국의 재정을 크게 담당하였던 곳이다. 여기서 올라오는 막대한 수확물과 수입으로 로마의 모든 사업을 성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노비아의 군대는 한 번 전투로 승리하여 이집트 전토를 제패하였다.

이에 이르자 시리아, 바빌로니아에서 소아시아 모든 나라와 이집트를 정복한 제노비아는 모든 국민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 최고의 군주로서 받아들여졌다. 지금까지 로마의 지배하에 놓였던 속주의 사람들은 지옥 같은 속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노비아는 로마에서 해방시킨 해방자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흰 낙타를 타고 황금 투구를 쓰고 자색의 외투를 바람에 날리며 개선하여 팔미라 주민들은 열광적으로 제노비아군에게 성원을 보냈다.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단기간에 이 정도로 넓은 영토를 지배한 여왕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팔미라의 멸망

 

한편 로마제국은 일찍이 지배하고 있던 영토의 절반을 잃고 사태가 심각했다. 로마제국은 팔미라를 단번에 격멸시키려고 정예라고 자랑하는 최강의 군단을 보냈다. 지휘에는 로마제국의 명장 오우레리안(Ourerian)에게 맡겼다.

싸움은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전투는 극히 처참하여 용맹한 제노비아의 군단도 많은 사자를 내어서 하는 수 없이 후퇴해야 했다.

마침내 제노비아는 살아남은 장병과 함께 팔미라 성내로 후퇴하여 성을 지키기로 하였다.

로마군의 포위 공격은 매우 치열하였다. 필사의 의지로 싸웠으나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하루하루 사기도 약해지고, 식량도 떨어져서 누구나 함락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래서 제노비아군은 포위된 성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페르시아에 원군을 청하였다.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제노비아는 로마군의 포위망을 보기 좋게 돌파하였다.

그녀에게는 재주 있는 신하가 몇 사람 있었다. 일행은 낙타를 타고 로마군의 눈을 피해가면서 동쪽으로 밤새껏 사막을 달렸다.

5일째 되는 아침 동이 틀 무렵 앞에는 유프라테스강이 보였다. 이 강을 건너면 저쪽은 페르시아이다. 그러나 그때 로마군이 추격해왔다. 로마군 추격대는 제노비아의 신하들을 죽이고 제노비아를 생포하고 말았다. 서기 272년 늦은 가을의 아침의 일이었다.

혹시 이때에 제노비아가 페르시아의 땅에 도달했다면 그 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른다.

한편 성안에서 기근을 참으며 원군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여왕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군에게 성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여왕을 생포한 로마군은 팔미라에 약간의 수비병을 남겨두고 제노비아를 연행하여 로마에 개선하려고 귀도에 올랐다.

이윽고 팔미라 주민은 로마군 수비대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군은 즉시 되돌아가자마자 팔미라 주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학살하고 말았다. 그래도 로마군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모든 건물, 신전, 사원 등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주요 도로에 줄지어진 1500본의 거대한 석주도 거의 넘어지고 파괴되었다. 제노비아가 건설한 호화로운 대신전도 재로 변하고 말았다. 팔미라는 그 절정기에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말았다.

 

제노비아의 종말

 

한편 로마로 데리고 간 제노비아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 그 여왕의 기록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여왕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전설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팔미라가 로마군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안 그녀는 단식하고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또 로마로 연행되어 가는 도중에서 병사했다고 하기도 한다.

또 로마로 연행하여 황금 쇠사슬에 묶고 전차로 끌어 시내를 돌아 다녔다고도 한다.

아무튼 신빙할 만한 말은 없고 진실은 영원히 감추어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