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이야기
귀비가 되다.
양귀비(楊貴妃)는 지방 사천성(四川省) 관리의 딸로서 아명을 양옥환(楊玉環)이라 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에게서 자라 17세가 되었을 때 미모에 평판이 높아서 당나라 제6대 황제 현종의 후계자로서 현종황제의 비 무혜비(武惠妃) 가 낳은 제18황자 수왕(壽王)의 비(妃)로서 뽑혀 궁에 들어왔다.
737년 현종은 총애하던 무혜비가 죽자 비탄에 빠져 날을 새다가 전국에 화조사(花鳥使)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그 후비 감을 찾게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지 못하였다. 후궁 3000명의 미녀들 중에서도 알맞은 후비 감을 고르지 못하였다. 740년 가을 우연히 장안 교외의 온천 보양지 화청지(華淸池)에서 무혜비와 매우 비슷한 양옥환을 만났다.
양옥환은 당대의 미녀답게 복스러운 자태와 눈매, 작은 입으로 조금 살이 찐 모습으로 현종은 “너라면 조금의 바람에도 끄떡없겠구나.” 하고 농을 할 정도로 그 미모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당시 현종은 56세이고 양옥환은 22세였다. 현종은 양옥환을 자기의 비로 맞고 싶었으나 양옥환은 자기 아들의 아내이고 만일 세상이 알게 되면 현종의 명예는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현종황제는 그녀를 도교의 절에 보내어 태진(太眞)이란 이름을 붙이고 여도사(女道士)가 되게 하였다. 곧 그녀의 자유의사로 남편인 수왕과는 이혼하였다.
745년 현종은 정식으로 양옥환을 황후로 맞아들여서 후궁으로서는 최고급인 귀비(貴妃)의 첩지를 내렸다. 그래서 양귀비가 되었다. 그 때 양귀비는 27세이고 현종은 61세였다.
미모와 재주
양귀비는 자질이 풍염한 육체파 미인으로 여름의 더위를 많이 타서 매일 옥으로 만든 물고기를 입에 물고 더위를 견뎠다 하고, 흐르는 땀에는 기름기가 짙고 향기가 있어서 이것을 닦으면 손수건이 복숭아 빛이 되었다 한다. 양귀비가 후궁을 산책하고 있노라면 뜰에 피었던 꽃들이 양귀비의 미모와 몸에서 발산되는 향기에 부끄러워서 오므라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귀비를 수화(羞花)의 미인이라 한다.
귀비는 영리하기도 하여 현종의 기분을 잘 맞추었다.
현종황제는 정치가라 하기보다 예술가다운 기질의 남자로서 스스로 가무단을 조직하여 자작 가무, 음곡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현종은 궁중의 이원(梨園)에 악사들을 모아 스스로 작곡하여 가르칠 정도여서 현종은 갈고(羯鼓=타악기)를 귀비는 비파를 악사들은 필률(篳篥=피리), 공후(箜篌)를 합주하기도 하였다.
미인이면서 가무음악에도 능하여 현종의 취미와도 잘 어울리는 양귀비는 후궁 3000명을 제쳐두고 혼자서 현종의 총애를 차지하였다. 양귀비는 곁눈질하며 미소 지어 요염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게다가 그녀의 특기인 예상우의(霓裳羽衣)의 춤은 당 현종이 편곡한 춤으로 현종을 매료시켰다.
양씨 일족의 영화
현종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면 다 이루어주었다. 귀비에게는 세 사람의 언니가 있었는데 모두 미모에 뛰어나서 함께 궁중에 들여서 한국부인(韓國夫人), 괵국부인(虢國夫人), 진국부인(秦國夫人)이라 칭했고, 사촌 오빠 중 하나는 부마를 삼기도 하였고 양국충(楊國忠)은 재상으로 삼았다. 양씨 일족은 막대한 부를 얻게 되고 욕심껏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택의 호화로움을 경쟁하여 자기 집보다 좋은 것이 있으면 개축하여 토목공사가 그치는 날이 없었다 하며, 온 나라에서 뇌물이 모여들었고, 황족마저 그들을 거스르면 벌을 받았다.
현종이 여산(驪山) 온천으로 피한을 가면 양씨 가문 사람들이 각기 색다른 옷을 입고 행렬을 지어 수행하였고 그들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진주나 비취 같은 보석 장식품들이 길가에 흩어졌었다 한다. 그러면서 당나라의 국력은 쇠하기 시작하였다.
호화로운 궁중 생활
그 삶은 호화찬란하여 두 사람은 날마다 연회나 가무로 날을 새웠다. 양귀비는 전용의 목욕탕인 <귀비지(貴妃池)>가 있어서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바로 현종 앞에서 춤을 추면 현종은 그 모습에 반해서 바라보곤 하였다. 또 양귀비는 여지(荔枝=박과에 속하는 1년생 과실)라는 과실을 좋아하여 아득히 먼 남쪽에서 운반해오는데 도중에 상하지 않도록 되도록 빨리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빨리 달리는 말을 먼지를 날리며 달리게 하여 운반시켰다 한다. 양귀비로 인하여 현종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일변하여 그 정열은 잃어버렸다.
백거이(白居易)는 그의 <장한가(長恨歌)>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구름 같은 풍부한 검은 머리, 꽃이 핀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번쩍거리는 금비녀를 꼽고 양귀비는 연꽃무늬를 수놓은 휘장 속에 따뜻하게 봄밤을 현종과 지냈다. 봄밤이 짧음을 한하며 해가 중천에 뜰 때에야 일어났다.
이후로 현종은 이른 아침의 정무는 폐하게 되었다. 그녀는 현종의 마음에 들어 연회에는 언제나 곁에서 시중들고 밤이면 밤마다 혼자서 현종을 독차지했다.
현종은 후궁으론 3000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미녀가 있어도 3000명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현종의 총애를 양귀비 한 사람에게만 쏟았다.
황금으로 지은 궁전에서 화장을 하고 요염한 모습으로 연회석에서 시중들고 연회가 끝날 무렵에는 흠뻑 취해서 봄 기분을 녹여낸다. 양귀비의 일족은 모두 고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영광은 그 한 집안으로 모여들었다. 천하의 부모들은 아들 낳기를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했다.“
이리하여 당대 제일의 명군이라 일컬어졌던 63세의 현종은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양귀비와 두 사람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안록산의 난과 죽음
현종과 양귀비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양귀비는 후궁으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때에 변경 수비대장을 하던 안록산(安祿山)은 자식이 없는 양귀비의 양자가 될 것을 제의하여 두 사람의 뜻이 맞아서 양자 연조가 성립되었다. 안록산은 양귀비보다 16세가 연장이었다.
양귀비의 양자라는 지위를 얻은 안록산은 남성으로서는 출입이 금지된 후궁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두 사람이 불륜을 저지른다는 설까지 나곤 하였다. 그것을 듣고 불쾌히 생각한 것은 재상인 양국충이었다. 양귀비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안록산과 양국충의 권력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양국충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종에게 <안록산 모반의 두려움이 있다.>고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안록산은 선수를 쳐서 15만의 강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755년에 <안록산의 난>을 일으켰다. 변경에서 경험이 풍부한 안록산의 군대에 대하여 당나라 정부군은 훈련되지 않은 군대라서 승패는 분명했다.
장안이 함락 당하게 되자 현종은 양귀비와 양씨 일족을 동반하고 근위병의 수호를 받아 장안을 탈출하여 촉(蜀)나라를 향하여 달렸다. 서문에서 50여 킬로인 마외(馬嵬)에 닿자 <이 반란의 원인은 양씨 일족에게 있다.>고 해서 근위병은 양귀비와 재상 양국충을 처치하도록 현종에게 요구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국충은 근위병에게 죽고 다시 양귀비의 자매들도 차례차례로 살해당했다. 현종은 어쩔 줄을 모르고 환관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양귀비의 액사(縊死)를 명했다. 이에 양귀비는 756년 38세로 생을 마쳤다. 그 후 현종은 반란 발발의 책임을 지고 퇴위하고 아들 숙종(肅宗)이 즉위하였다. 그 후 현종은 반 연금 상태에서 762년 78세로 생을 마쳤다.
양귀비의 시체는 마외의 역전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묻혔다.
그 후 정치에서 은퇴한 현종은 양귀비가 길바닥에 묻힌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개장을 바랐으나 주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그는 은밀히 명을 내려서 양귀비의 시체를 황량한 길바닥에서 다른 장소로 이장했다. 이장을 맡았던 부하가 양귀비의 몸에 지니고 있던 향낭(香囊)을 가지고 왔는데 현종은 그 향낭을 몸에 지니고 양귀비를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다가 사거했다 한다.
현재 서안 서쪽 60 킬로 정도의 마외에는 양귀비의 묘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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