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작 뉴턴(1642~1727) 이야기(8/13)
==떨어지는 사과에서 힌트를 얻어 근대과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7, 라이벌과의 분쟁
1) 라이프니츠와의 분쟁
이 무렵 미적분의 선취권을 둘러싼 대륙의 라이프니츠(독일어 ;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와 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라이프니츠는 1684년에 미분적분법을 발표하였다. 1687년에는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발표되었다.
뉴턴이 미분적분을 개발한 것은 <경이의 해>인 1666년 무렵인데 이 시점에서는 공표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미분적분법을 훔쳤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이미 대물이 된 뉴턴은 표면에는 등장하지 않고 제자들이 라이프니츠를 공격했다. 라이프니츠도지지 않으려고 대항했다.
그런데 이 불모의 싸움도 뉴턴의 그 완강함으로 승리한다.
곧 1716년에 논쟁 상대인 라이프니츠가 사망하였다.
현재에는 미분적분의 기호는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기호가 쓰기 쉬우므로 그 기호가 쓰이고 있다.
2) 프램스티드와의 분쟁
달 관측 데이터를 둘러싼 영국의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 1646-1718, 영국 천문학자)와의 분쟁이 있었다.
뉴턴이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 1646-1719, 영국 천문학자)에게 요구한 것은 달 관측 데이터이다. 뉴턴은 자신의 달의 이론을 완전한 것으로 하고 싶었다. 뉴턴은 최초에는 정중하게 요구했는데 조금 더 관측정도를 올려서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공표하고 싶은 플램스티드는 이것을 거부한다.
1707년 혹 1712년에 뉴턴은 차차 고압적이 되어 최후에는 그 정치력으로 플램스티드의 관측데이터를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 영국의 천문학자, 기상학자, 물리학자, 수학자)에 의하여 억지로 출판( 『영국천문지』 )시켰다.
69세인 왕립협회 회장 뉴턴과 65세인 왕실천문대대장 플램스티드가 직접 대치하여 분노한 뉴턴이 플램스티드에게 모욕적인 욕을 퍼붓는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이 『영국천문지』는 핼리의 데이터도 덧붙여져 있고 전체로서는 정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1719년 플램스티드는 실의에 빠진 채로 사망했다.
여기서도 라이벌이 사망으로 뉴턴이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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