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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상

안자와 공자의 상호 비판

간천(澗泉) naganchun 2013. 5. 28. 09:42

 

안자와 공자의 상호 비판

 

 

 

 

안자(晏子 BC589?-BC500년)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 3대에 걸쳐 벼슬한 명재상으로 공자보다 37세 정도 연상이고 공자보다 21년이나 먼저 세상을 떴다.

사기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말하기를 “안자는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 삼대에 벼슬하였다. 비용을 절약하는 것과 노력하여 일을 행하는 것으로 제나라에서 존중되었었다. 재상이 되어서도 가정에서의 식사는 고기 요리를 2품만으로 한정하고 그 집안 여자에게는 명주옷을 입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게 하였다. 그가 조정에서 상담에 응할 때에는 바른 의견을 제시하고 언제나 스스로 바른 행동을 하였다. 나라에 바른 도리가 행해질 때에는 명령대로 따르고 바른 도리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명령을 검토하여 바른 표준에 맞추어 행하려 하였다.”

안자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직의 신(臣)>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하는 군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섬기는 것이라는 사상이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안자의 사상, 예법, 그의 진퇴와 처세술 등 생활이 항상 토론의 대상이 되었었고 공자(BC551년-479년)자신은 안자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의 예법이나 생활은 비판하였다.

곧 “안자는 생전 인색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대부가 선조를 제사 지낼 때에는 소나 양을 희생하여 바치는데 안자는 돼지의 어깨 고기를 두(豆)라는 작은 그릇에 그것도 고봉으로 하지 않았고, 세탁한 의관으로 조정에 등청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대부라 하더라도 저렇게 인색해서는 신하로서 쓰기 어려울 것이다.”하고 비판했다고 한다.

 

공자(孔子)의 이념은 인(仁)으로 그 인은 <예(禮)>로 구현된다. 그 예의 세계야말로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세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그 자체를 고대에 있었던 소박한 형태의 것으로 만든다는 주장이므로 항상 현실을 거역하여 비현실적이고 혁명적이다.

노나라의 내란을 피하여 노나라를 떠난 공자가 제(齊)나라에 가서 경공(景公)에게 벼슬하려 한 일이 있었다. 곧 경공은 공자에게 전답을 주고 포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안자가 이를 막았다.

“유자는 익살스럽습니다. 지혜가 있어서 교언으로 사람의 판단을 그릇되게 합니다. 그러니 그의 사상을 규범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거만하고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으므로 아래 사람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복상(服喪)을 존중하여 사자를 지나치게 애도하고 파산할 정도로 장례를 훌륭하게 치릅니다. 그것을 우리나라의 관습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유자는 여러 나라를 유세하고 재물을 거지처럼 빌립니다. 그런 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천하를 다스릴 만한 현인이 죽은 후 주나라 왕실은 이미 쇠하고 예악이 쇠퇴하여 오래입니다. 몇 대를 걸려서도 그 학문을 탐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곧 그 예를 궁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공께서 공자와 그의 예법을 써서 제나라의 관습을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백성의 선두에 서서 착한 정치를 행하는 것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하고 비판하고 등용을 막았다 한다.

 

생각해보면 안자는 공자의 복고적이고 지나친 예를 숭상함에서 오는 허례를 비판한 것이고 공자는 안자의 지나친 실용적 검약치중의 생활태도를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상호 비판은 매우 의의가 있다. 곧 지나치게 허례허식에 빠지지도 말아야 할 것이며 지나치게 검약함으로 인색하게 살아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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