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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을 위대한 여성

비참하게 생을 마친 여성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4/5)

간천(澗泉) naganchun 2023. 8. 10. 03:03

비참하게 생을 마친 여성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4/5)

 

 

4 , 독립

 

로댕과 헤어진 카미유는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클로드 드뷔시(프랑스어: Claude Debussy, 1862822~ 1918325)와 친분을 가지며 새로운 연인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보였지만 결국 카미유의 거부로 금방 헤어졌다. 다만 카미유의 작품 중 '왈츠'의 모델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드뷔시에게 선물로 주었고 드뷔시는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1893<성숙의 시대>을 살롱에 출품해서 극찬을 받았다. 1894년 로댕의 부탁으로 벨기에 예술가협회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 전시를 했는데 이때까지도 로댕과는 계속적인 서신 교환은 있었다. 살롱에 <로댕의 흉상>을 출품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로댕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99년 살롱에 자신의 역작인 대리석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전시회 중 작품을 도난당했다. 작품을 훔친 범인이 로댕이라고 생각했던 카미유는 로댕을 비난함과 동시에 영원히 로댕과 멀어졌다. 카미유는 아예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옮겼고 이 후 14년간 혼자 기거했다.

 

5.. 어려운 삶

 

1900<애원하는 여인>을 제작하고 1905년 알고 지내던 작품 중개상 외젠 블로의 주선으로 블로의 화랑에서 단독 작품전 개최의 제안을 받았다. 당시 카미유의 생활은 매우 빈곤했는데 로댕의 모델로 있을 때 로댕을 사랑한 나머지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고 로댕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겨울에 연료가 끊겨 덜덜 떨다가 싸구려 와인을 연달아 흡입했고 결국 알코올 의존증 증세까지 오게 되었다. 이미 카미유는 이 때 정신병자로 판명 난 상태였다.

 

6개월 후 블로의 화랑에서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 13점을 전시했으나, 이 날 술에 취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블로는 단 한 점도 팔지 못했다. 한 번 로댕의 연인으로 인식된 카미유를 독자적인 예술가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카미유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되었다. 1906년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을 보이는 족족 부숴버렸고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9년 동생 폴 클로델(Paul Claudel)이 청나라 톈진에서 영사로 근무한 후 프랑스로 귀환하여 카미유를 만난 뒤 누나의 비참한 생활상을 청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알렸다. 1906년 카미유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폴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이 후 아버지와 폴의 도움으로 카미유는 간신히 연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