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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기/천재들 이야기

컴퓨터, 원자폭탄 개발의 천재, 노이만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21. 2. 26. 10:55

컴퓨터, 원자폭탄 개발의 천재, 노이만 이야기

 

노이만

 

 

인간인 척한 악마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중에서도 한 단계 광채를 나타낸 자가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Margittai Neumann János Lajos, Johannes Ludwig von Neumann, 19031228- 195728이다.

그는 겨우 53년 남짓한 짧은 생애 사이에 논리학, 수학, 물리학, 화학, 계산기과학, 정보공학, 생물학, 기상학,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에 관한 15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천재들만 모이는 프리스톤고등연구소의 교수진 중에서도 다시 계단이 다른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 노이만은 <인간인 척한 악마>라 불렸다.

그는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알려지는 한편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만하탄계획(Manhattan Project)>의 과학자 집단의 중심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 생전의 논문을 모아서 출판한 영어판 <폰 노이만 저작집>은 전6권으로 합계 3689쪽에 이른다.

1<논리학, 집합론, 양자역학>, 2<작용소. 에르고딕이론(ergodic theory). 무리에서의 개주기관수>, 3<작용소환론>, 4<연속기하학과 기타의 화제>, 5<컴퓨터설계, 오토메타이론과 수치해석>, 6<게임이론, 우주물리학, 유체역학, 기상학>이라는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논문이 얼마나 다채로운 전문분야에 영향을 끼쳤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선행 연구는 거의 없었다.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노이만형 컴퓨터>, 양자론의 수학적 기초에 등장하는 <노이만환>, 게임이론에서의 <노이만의 정리> 20세기에 진전한 과학이론의 어느 연구 분야를 거슬러도 어느 곳에서 반드시 무슨 선구자로서 <노이만>의 지도의 업적을 만난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노이만 집합>, <노이만 보틀넥크(Von Neumann bottleneck/병목)>, <노이만 모델>, <노이만 패러독스> 등 그의 이름을 붙인 전문용어를 50종류 이상 발견할 수가 있다.

그 한 노이만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어떻게 가치를 중시하며 어떠한 도덕기준을 따라서 행동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밝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의 전문분야의 틀 내부에서 단편적으로 의론되기는 했어도 종합적인 <폰 노이만의 철학>에 대해서는 선행연구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노이만의 생애와 사상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폰 노이만의 철학>에 다그치는 것이 <폰 노이만의 철학>의 목적이다.

그것도 단순히 <생애>를 소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학문>과 그와 관계가 깊었던 <인물>을 들면서, 시대배경도 떠오르도록 연구하여 적어나갈 예정이다. 노이만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주었으면 다행이다.

처음에 폰 노이만의 생애를 개관하고 원자폭탄 투하에 관련한 노이만이 한 역할을 되돌아보고 싶다.

 

행운의 시기에 탄생했다.

 

존 폰 노이만은 190312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헝가리 왕국은 서기1000년 로마교황에게서 왕관 수여에 따라 건국한 카톨릭교 국가이다. 13세기에 몽골제국에 침략당하고, 16세기에 오스만터키제국에 점령당한 일도 있지만, 17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어서 국토를 회복하였다.

그 후 국토 확대가 반복되어 최대영역은 현재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공화국의 전역, 다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오스트리아의 일부까지에 달했다.

중앙유럽은 옛날부터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려서 이제도 다민족국가 간 여러 가지 국제 분쟁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1867년 하브스브르크가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국왕을 겸한 오스티리아 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하여 그 후 이 지역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이 평화는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의 50년 정도의 단기간만이 계속되었으나 노이만은 이 행운의 시기에 탄생하여 우아한 소년시대를 보낼 수가 있었다.

부다페스트는 1873년에 도나우 강을 낀 서안 부다와 동안 베스트가 병합하여 헝가리왕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노이만이 태어난 1903년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80만 명이 넘어서 런던, 파리, 베를린, , 상트베테르브르크에 다음가는 유럽 제6위의 대도시였다. 그 아름다운 경관은 당시로부터 <도나우 강의 진주>라 불렸다.

20세기 초두의 헝가리왕국의 밀가루 수출은 세계 1위를 자랑했고 부다페스트의 경제성장률은 유럽에서 제1위였다. 파리의 샹제리제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안도라시거리의 지하에는 유럽대륙 처음으로 지하철이 개설되었다.

당초에 런던 지하철을 달리고 있던 증기기관으로 부다페스트의 전기식지하철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광경이었다. 거리에는 600이 넘는 카페가 있고 유럽 최고봉의 고등교육으로 알려진 김나지움이 3교가 있었다.

후에 미국의 노이만과 함께 <만하탄계획>을 추진한 레오 실라도(Leo Szilard,1898년생), 유진 위그나( Eugene Paul Wigner, 1902년생) 그리고 <수폭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1908년생) 등 세 사람의 물리학자 다시 <암묵지>로 알려진 철학자 마이켈 폴라니( Michael Polanyi, 1891년생) <홀로그라피(holography)>를 발명한 전자공학자 데네슈 가보르(Gábor Dénes, 1900년생), <방랑의 천재수학자> 포르 에르데슈( Paul Erdős, 1913년생)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시대의 부다페스트 생으로 3교인 김나지움의 어느 한 학교의 졸업생이다.

 

천재라 불린 사람은 단 한 사람

 

이들 중에서 노이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김나지움에서 1학년 선배였던 위그너였다.

그는 후에 베를린공과대학의 포란니(Karl Polanyi1886-1964=빈 출신의 경제학자) 밑에서 박사학위를 타고 있다. 나치스 독일의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여 위스콘신대학 교수를 거쳐 프린스톤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3년에는 <원자핵과 소립자의 이론에서의 대칭성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위그너가 <어째서 당시의 부다페스트에 이 정도로 많은 천재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 질문은 과녁이 빗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천재라 불리는 자는 단 한 사람, 존 폰 노이만뿐이니까!>

어느 일요일 오후, 11세인 노이만과 함께 산보를 하던 12세의 위그너는 노이만한테서 <군론(群論)>을 배웠다고 한다.

위그너는 후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유소시부터 수학도 뛰어나게 우수했지만 군론은 전혀 미지의 개념이었다. 그 당시 노이만의 수학은 이미 대학원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

이 무렵 위그너가 <재미있는 정리(定理)가 있는데 증명할 수 있을까?>하고 노이만에게 질문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위그너로서는 증명할 수 없는 <수론(數論)>의 난해한 정리였다. 그는 아무리 노이만이라 해도 쉽게 증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자 노이만은 <이 정리는 알고 있나? 모르나--.저 정리는 어떤가?>하고 여러 가지 수론의 기본적인 정리를 들어서 위그너가 이미 알고 있는 정리를 일람해서 들었다. 그리고 그들 정리만을 보조정리로 써서 우회해서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난해한 정리를 증명해보인 것이다.

다시 노이만은 위그너가 모르는 다른 적절한 보조정리를 쓰면 더 간결하게 중명할 수 있음도 설명해 보였다.

자신이 난해하다고 생각했던 증명을 노이만이 간단히 이끌어내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지식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 알게 된 위그너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이 날부터 그는 노이만에게 <열등감>을 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노이만과 위그너는 인간의 의식에 따라 <양자론적상태>가 정리된다는 양자해석을 제창하였다. 거기서 노이만이 끌어낸 것이 우스꽝스러운 명칭인 <위그너의 친구의 패러독스>이다.

 

장군이 될는지 모른다

 

1937년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34세인 노이만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개전은 피할 수 없고 그러면 미국은 참전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미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놀라운 행동을 보였다.

노이만은 미국 육군 병기국 예비역사관시험을 보았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사관 채용시험을 준비하고 19383월에 실시된 <육군조직시험>에 만점, <육군규율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아 여름에 행해질 예정인 최종시험에 합격하면 채용 리스트의 최상위로 육군 사관에 임명될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개전준비에 쫓긴 육군에서는 문제작성에 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그 해에 한해서 최종시험은 반년 연기되었다. 19391월 겨우 실시된 <사관채용최종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아 합격한 노이만은 <다음 장군이 될는지 모른다.>하고 처인 그라라에게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육군사관 임용에는 35세 미만이라는 연령제한이 있어서 노이만은 전년 193812월로 35세에 달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청은 각하되고 말았다.

혹시 최종시험이 예정대로 전년 여름에 시행되었다면 노이만은 미국 참전 때에는 육군사관으로서 유럽 임지로 부임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원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아닌 도쿄에 떨어트릴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컴퓨터와 원폭의 개발

 

19409월 노이만은 육군병기국탄도학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 취임하였다. 사관 채용은 되지 않았지만 시험성적은 최우수하였기 때문에 우대를 받은 셈이다. 

노이만이 탄도학연구소에 제출한 기밀논문 <축차차분(逐次差分)의 발생확률오차의 평가>에서는 표적에 탄환을 맞추지 못한 경우 다음에 어떤 목표를 붙이면 좋을 것인지 확률 계산하는 방법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전투기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은 지상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노릴 만큼의 정도가 높지만 그 방법도 컴퓨터자동제어이론도 노이만의 끌어낸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권에서는 나치스 독일,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이 진격하고 연합군 측의 전국은 악화하기만 했다. 1941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미일 개전 후 프린스톤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는 미국의 <국가비상사태관리국>에 전면 협력하기로 되었다.

노이만은 전쟁성에서 <과학연구개발청>의 공식조사관에 임명되어 폭발연구의 과학 기술면의 최고책임자기 되었다. 이에 따라 노이만은 육군. 화이트하우스. 전쟁성에 직결하는 3개의 기관의 중요관계자가 된 것이다.

1942년이 되자 해군병기국의 고문으로 취임한 노이만은 기뢰전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출발하여 충격파의 연구를 하게 되었다.

기뢰의 충격파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비선형의 충격면의 상태를 기술하는 편미분방정식이 필요하고 그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방대한 계산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 때문에 노이만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것이 컴퓨터의 개발이었다.

한편 동년 946세인 레슬리 그로우스준장(Leslie Richard Groves, 1896-1970=최종계급 중장이 원자폭탄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그는 38세의 캘리포니아공과대학 교수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미국 이론물리학자)를 로스알라모스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LANL의 초대소장으로 임명했다.

오펜 하이머는 미국 각지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을 돌면서 톱클래스의 수학자와 물리학자를 모아 <만하탄계획>을 개시하였다. 거기에 노이만, 위그너(Eugene Paul Wigner, 1902-1995), 실라드(Leo Szilard 1898~1964), 텔라(Hungarian: Teller Ede; 19082003) 4명의 천재 헝가리계 과학자가 집결한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고도의 지능에서 <화성인>이라 불린 그들이 없었다면 원폭개발은 단기간에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노이만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한 것이 <폭축형(爆縮型)>원폭의 설계이다. 이것은 노이만이 발견한 중요한 이론의 하나인데 원폭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하기 위해서는 낙하 후에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공에서 플로토늄에 점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거기서 노이만이 생각해낸 것은 임계점에 달하지 않은 플로토늄의 주위에 32면체형에 폭약을 배치하여 일정한 고도에서 폭약에 점화하고 그 폭발의 충격으로 플로토늄을 임계량으로 전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들은 이 일련의 과정을 정확하게 제어하기 위한 복잡한 수치계산을 반년에 걸쳐서 행하고 그 설계는 1944년 말에 완성되었다.

1945716일 뉴멕시코주 소고로의 남동 48Km지점인 사막에서 인류사상 최초의 핵실험이 행해졌다. 관계자 다수는 그 위력에 반신반의했다. 텔라는 TNT45000톤 정도로 강기였는데 오펜 하이머는 TNT30톤 정도로 견적하고 있었다.

결과는 TNT2만톤 가까운 파괴력으로 <인구 30-40만 명의 도시를 불 들판으로 만드는 위력>이라고 표현되었다.

노이만은 핵실험 준비가 잘 되는 시점에서 만족하여 미리 프린스톤에 돌아와서 컴퓨터 개발에 당하고 있었다.

 

교토에 원폭 투하를 강력히 주장하다

 

당시 일본 군부는 한 목소리로 <일억 옥쇄><일인십살>를 부르짖었다. 하리 트루만 대통령(Harry S. Truman1884-1972<비인도적 무기>의 사용을 주저하였지만 최종적으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하였다. 510일 로스 알라모스에서 열린 <표적위원회>에서는 노이만은 과학자를 대표하여 원폭의 폭발 고도를 선정한다는 중요한 입장에서 출석하였다.

공군의 목표 리스트로는 <황거(皇居), 요코하마(横浜), 니가타(新潟), 교토(京都), 히로시마(広島), 고쿠라(小倉)>를 제안하였다. 여기서 노이만은 황거 투하를 강하게 반대하고 혹시 공군이 어디까지나 황거에 투하할 것을 주장하는 경우는 <우리들에게 되돌리라.>고 적은 메모를 남기고 있다.

노이만은 전후의 점령 통치까지 예견하여 황거에 투하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어서 사실 그 덕분에 일본은 명령계통을 잃어버리지 않고 3개월 후에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이만은 무모한 <일억옥쇄>에서 일본을 구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한편 노이만이 강력히 주장한 것은 교토에 원폭을 투하한다는 것이었다. 노이만은 일본인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만큼 교토에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대하여 핸리 스팀손Henry Lewis Stimson,1867-1950육군장관이 <그러면 전후 로마나 아테네를 파괴한 것처럼 세계에서의 비난을 받게 된다.>고 강경하게 반대한 때문에 교토도 각하되었다.

이미 통상 폭격으로 파괴되고 있던 요코하마가 각하되고 정보부족으로 나가타가 제외되었다. 최종적으로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순으로 2발의 원폭을 투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557월 노이만은 왼쪽 어깨에 강렬한 통증으로 돌연 쓰러졌다. 진단 결과 좌견쇄골에 종창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다른 부분에서 생긴 암이 혈액 순환에 따라 뼈에 전이된 것을 알았다. 몇 번이나 입회한 핵실험에서 받은 방사선이 암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래도 노이만은 아픔을 견디며 대통령과학고문으로 근무했다. 구급차를 타고 원자력위원회에 출석한 일도 있다. 19562<합중국자유훈장>을 받을 때에는 휠체어로 수상식에 출석했다. 트와이트 아이젠하어Dwight David Eisenhower1890-1969대통령은 노이만의 옷깃에 훈장을 달아주며 <우리들에게는 자네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동년 10월 헝가리 동란이 발생했다. 당시 소련은 전차로 군사개입하고 봉기한 부다페스트 시민 수천 명을 살해했다. 탄생지를 유린당한 노이만은 일각이라도 빨리 미국이 소련에 대하여 선제 핵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스타린 규부릭감독의 영화 <박사의 이상한 애정/ 다시 나는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수폭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에서는 휠체어에 타는 대통령과학고문 스트렌지라브 박사가 등장하는 그 모델은 노이만이라고 말한다.

전신에 암이 전이된 노이만은 워싱턴의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의 병실은 대통령의 병실과 같은 병동에 있는 특별실이었다.

그 관경을 루이스 스토로스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은 <원래 이민이었던 50대의 남자의 병상 주위를 국방장관, 국방부장관, 육해공군장관, 참모장관이 둘러앉은 놀라운 구도>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노이만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진통제에 의하여 실없는 말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군의 비밀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감시가 붙어있었다. 195728일 노이만은 서거했다.*

 

출처=https://gendai.ismedia.jp/articles/-/79538

일본어원문=コンピュータ原子爆弾開発フォン・ノイマンの天才

= 다카하시 쇼이치로(高橋 昌一郎)

1959년생. 미시칸대학대학원철학연구과수료. 국학원대학 교수. 전문은 논리학. 과학철학. 주요저서 이성의 한계/理性限界』『지성의 한계/知性限界』『감성의 한계/感性限界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