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론>을 낳은 천재 노이만은 경제학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폰 노이만은 스마트 폰의 기초가 되는 컴퓨터의 구조를 개발하고 원자폭탄 개발에도 중심적인 지도자로서 참가하는 한편 경제학의 근본적인 대개혁도 성취시키고 있다.
<프로그램 내장방식>을 정식화
원자폭탄 투하를 목전에 두고 로스알라모스의 업무에 바쁜 가운데에도 노이만은 일하는 사이에 컴퓨터의 <논리구조>를 고찰하고 있어서 손으로 적은 메모를 골드스타인(Herman Heine Goldstine、1913-2004=미국 수학자. 계산기과학자)에게 보냈다.
1945년 골드스타인은 그들의 메모를 <제1초고(First Draft of a Report on the EDVAC)>라고 제목을 붙인 101쪽의 타이프 원고로 정리하였다. 물론 그 저자명은 <존 폰 노이만>으로 되어 있다.
<EDVAC(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omputer)>은 <ENIAC>의 후속기로서 개발되는 컴퓨터의 명칭이다. 여기서 노이만은 <입력(Input)→중앙처리장치(CPU: Central Processing Unit)→출력(Output)>이라는 현대의 컴퓨터의 근본이 되는 <노이만형 아키텍챠(architecture=영어로 ‘건축학’ ‘건축술’ ‘구조’를 의미하는 말이다.)를 설계하였다.
<중앙처리장치>는 <제어장치(CU: Control Unit)>, <산술논리연산장치(ALU: Arithmetic and Logic Unit)>, <기억장치(MU: Memory Unit)>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장치>가 <프로그램 내장방식(Stored Program Method)>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인류사상 존재하였던 기계의 대부분은 각각 특정한 목적을 다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예를 들면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 계산하는 <계산기>,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사용한다.
복잡한 탄도계산이 가능한 <미분해석기>나 암호해독을 행하는 <콜로사스(Colossus)=본래는 로도스도의 거상의 이름이다.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암호통신을 읽기 위하여 암호해독기로 영국에서 사용 된 전용계산기이다.)도 어떤 특정한 목적을 다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는 의미로는 같다.
그에 대하여 현대의 <스마트폰>에는 <전화>의 기능은 물론 <시계> <계산기> <카메라>를 더해서 <메일> <카렌더> <게임> 등 다수의 소프트웨어가 짜여 있어서 단추 하나만 누르면 한 대의 기계가 다채로운 목적을 다하는 기계로 빨리 변한다.
요컨대 같은 하드(기계)를 사용하면서 소프트(프로그램)을 변환하면 다목적으로 대응할 수가 있다. 그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개념을 사상 최초로 명확하게 정식화(定式化)한 것이 노이만이었다.
<설계의 공적은 우리들에게 있다.>
골드스타인은 노이만의 <제1초고>를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군부와 정부의 관계자나 미국 각지의 연구자에게 배포하였다. 이 초고가 순식간에 유럽에 전파되고 그 후 컴퓨터 개발의 <바이블>이 된 셈이다. 그런데 에커트(Pres Eckert=존 아담 프레스바 에커트(John Adam Presper Eckert Jr.、1919-1995=미국 전기공학자이고 컴퓨터의 선구자이다.)와 모클리(John William Mauchly、1907-1980=미국 물리학자. 에커트와 함께 세계 처음의 사용 컴퓨터인 범용 전자계산기인 ENIAC나 EDVAC、BINAC를 설계 제조했다.)는 <제1초고>에 자신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불공평>하다고 격노하였다. 그들은 <노이만은 우리가 공학적으로 조립한 전자회로를 수학적인 언어로 바꾸어 적은 것뿐으로 설계의 공적은 우리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확실히 그들이 공학적인 설계에 많은 공부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체상을 전혀 참신한 개념으로 정식화한 것은 노이만이다. 그의 천재적 발상이 없었다면 <노이만형 아키텍쳐>는 완성하지 못하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실은 에커트와 모클리는 컴퓨터 특허권을 취득하여 거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펜실베니아대학의 프로젝트는 육군의 자금 원조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골드스타인 중위는 육군 고문인 노이만에게 조언을 구했다.
글드스타인이 <제1초고>를 타자한 시점에는 전쟁이 계속 중이었고 원자폭탄 설계에 필요한 새로운 계산기를 개발하기 위하여 노이만의 정식화를 조속히 정리하여 육군에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타자원고에 <제1초고>라는 표제를 쓴 것으로 이어지는 개정판에서는 주요관계자의 공적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할 예정이었다.
아무도 특허권을 주장하지 못한다.
1946년 3월 펜실베니아대학은 <전시하의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에서의 발명특허권을 모든 대학에 양도한다.>고 하는 협정서에 서명하도록 관계 전원에게 요구하였다.
한편 자금 원조를 하고 있던 육군 법무부는 그 자금으로 해서 생긴 결과로서 통상의 수속에 따른 특허를 신청하였다. 이런 이유로 육군과 대학과 회사의 3자가 <EDVAC>의 특허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3자의 대리인 변호사는 몇 번이나 회의를 했지만 사태는 분규 할 뿐이었다.
1947년 4월 8일 육군 병기국장관의 요청에 따라 <EDVAC 특허에 관한 조정>을 목적으로 하는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 육군과 펜실베니아대학의 대표자 노이만, 골드스타인, 에카트, 모클리가 일당에 모였다.
거기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것은 <EDVAC>에 관한 <제1초고>가 1년 반 전에 출판되어서 이미 전 세계에 읽혀지고 있는 <공간물>이라는 사실이다. 곧 <제1초고>의 내용은 이미 법률상 사적인 특정한 특허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에카트와 모클리도 노이만과 골드스타인도 대학도 육군도 <아무도 특허권을 주장할 수 없다.>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다지 주목되지 않지만 이 회의에서의 결정은 과학사상에서도 <획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결정에 따라 전 세계의 누구나 <제1초고>에 표현된 <노이만형 아키텍쳐>를 특허권 등 일체 거리낌 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이만의 쟁탈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세상이 안정되자 노이만의 <제1초고>가 널리 퍼짐에 따라 여러 대학이 노이만을 초빙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들은 프린스톤고등연구소에 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는 <실험실>이 없음을 보아 알기 때문이다.
혹시 세계적인 유명한 노이만을 초빙할 수 있어서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한다면 마침 일석이조이다. 그 선전효과는 절대적이고 다른 대학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들은 노이만을 붙잡기 위하여 <오늘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셈이다.
마사츄세스 공과대학은 노이만을 <학부장 급>의 지위에 영입하여 그가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하여 필요한 <대학이 소유하는 모든 자원을 자유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보증하였다.
컴퓨터개발이라는 관점에서라면 우수한 제어공학과 계산기과학의 인재나 설비를 갖춘 마사츄세스공과대학을 능가할 대학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노이만은 학장과의 최종면접을 끝내고 승낙 바로 전까지 이야기를 진행했다. 연봉은 당시의 대학교수로서는 1만 5000달러이다. 장기에 걸쳐 노이만 초빙에 힘을 쓴 수학자 노버트 위나(Norbert Wiener, 1894-1964=미국 수학자)는 <조니가 단 지금 면접을 끝내고 돌아갔다. 거의 틀림이 없다. 우리들의 성공을 누구나 기뻐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시카고대학은 새롭게 <응용수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노이만에게 인사나 연구방침을 자유 재량껏 할 수 있도록 <소장>의 지위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전후 로스알라모스국립연구소에 있던 많은 연구자들이 시카고대학의 <원자핵연구소>에 자리를 얻고 있었다. 노이만과 뜻이 맞는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1901-1954=이탈리아 로마 출신 물리학자. 통계역학, 양자역학, 원자핵물리학 분야에서 현저한 업적을 남김.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의 이름을 쓴 연구소이다.
만하탄계획을 함께 추진하던 동료들과 함께 연구를 계속한다는 의미에서는 시카고대학에서 연구소장이 되는 것이 최고였다.
하버드대학의 학장 제임스 코난트(James B. Conant, 1893-1978)는 프린스톤고등연구소의 소장 프랑크 에이티롯에게 정중한 서한을 보냈다.
통상의 수단으로는 노이만을 획득할 수 없으므로 코난도는 보스끼리의 이야기에서 함께 노이만을 초빙하려고 하였다.
아인슈타인의 맹반발
한편 노이만은 마음 편한 프린스톤고등연구소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고등연구소는 유럽에서 피난해 온 노이만에게 종신교수직을 제공하고 그 덕분에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하게 된 은혜도 있다.
그래서 노이만은 혹시 고등연구소에서 컴퓨터개발이 가능하다면 다른 유혹은 거절할 생각이었다고 의도적으로 수명의 동료에게 밝혔다.
1945년 8월 25일부로 노이만의 동료 수학자 제임스 알렉산더가 에이티롯소장에게 쓴 편지는 <어떻게 하면 폰 노이만을 머물게 할 수 있을지 하는 문제가 날로 절박해왔다.>고 호소하여 <혹시 그를 잃게 되면 우리들로서는 큰 비극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에이테롯 소장은 <폰 노이만이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은 내가 모을 자신이 있다는 것을 그에게 전해주어서 좋겠다.>고 하는 회신을 썼다.
연구자의 낙원인 고등연구소에서 <컴퓨터> 같은 <기계>가 조립되는 것은 일부 교수진으로부터 맹반발을 불러왔다. 그 필두가 아인슈타인이었는데 에이테롯 소장은 노이만을 묵게 하려고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였다고 한다.
미래를 전망한 편지
당시의 성황을 후에 노이만의 조수로 일했던 공학자 줄리안 비게로우(Julian Bigelow, 1913~2003= 미국의 선구적인 컴퓨터 엔지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거래는 폰 노이만에게는 말하자면 왼쪽 새끼손가락 하나로 해치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교섭 기술과 같은 것이었다. 단지 그의 남은 손가락은 더 중요한 열매가 있는 일을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가을 학기, 고등연구소에서의 컴퓨터개발계획은 정식으로 승인되어 그런 때문에 매년 10만 달러의 자금이 3년간 제공하기로 하였다. 10월 노이만은 자금 제공을 제의한 해군의 루이스 스토로스(Lewis_Strauss, 1896 - 1974) 준장에게 다음과 같은 미래를 전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지금까지의 수학에는 계산속도에 한계가 있었는데 그 속도를 1만 배 이상 빠르게 하는 목표가 섰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하게 된다.
1, 일찍이 한 사람의 수학자가 일생을 걸고 한 계산을 하루에 그것도 오전 중에 마친다.
2, 연구팀이 100배의 일의 양을 100배의 속도로 마친다.
3, 이제까지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게 된다.>
<게임이론(game theory)>을 응용하면
미국의 제2차 대전 전후 폰 노이만이 육군, 화이트하우스, 전쟁성에 직결하는 3기관의 고문을 겸임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1943년에는 해군병기국 상근고문으로서 영국에 출장하여 귀국한 후 <만하탄계획의 원자폭탄설계의 중심적 지도자가 되었다. 프린스톤과 로스알라모스를 왕래하는 기차 안에서는 인류사상 처음으로 컴퓨터의 기초개념을 나타내는 <노이만형 아키텍쳐>의 초고를 썼다.
다시 노이만은 그 맹렬하게 바쁜 시기에 후세의 <경제학>에 대개혁을 가져온 일을 완성시킨 것이다. 당시의 그의 모습을 그의 처 그라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니는 동해안을 남북으로 왔다 갔다 하여 몇 가지 회의를 마친 후 밤에 귀가하는 것이 상례였다. 집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오스카를 전화로 불러내어 두 사람이 집필을 시작하곤 하여 밤늦게까지 작업을 계속하였다.>
노이만 저택에 오는 오스카 모르겐슈테른(Oskar Morgenstern, 1902-1977=독일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 노이만보다 2세 연장인 프린스톤대학 교수인 우수한 경제학자인데, 1935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나치 독일에 의하여 빈대학에서 해고됨)은 독일인이고 모친은 독일제국 황제 프리드리히3세의 서자였는데 유대인 연구자가 많았던 <빈학단>에 소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보였다.
모르겐슈테른은 노이만이 1928년에 발표한 <게임이론>을 경제학에 응용하면 인간의 복잡한 경제활동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식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이주한 직후 1938년에 프린스톤고등연구소의 노이만과 초대면 때에 그는 그의 생각을 열심히 말하였다.
노이만이 저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에서 양자론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식화한 것은 이미 말하였는데 물리학도 같은 방법으로 경제학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식화할 수 있다면 후세에 남는 대사업이 된다.
의욕을 내비친 노이만은 모르겐슈테른과 공저서를 집필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
1940년에 시작한 두 사람의 집필 작업은 노이만에게는 차례차례로 전시 임무가 들어온 때문에 몇 번이나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노이만의 처 그라라에 따르면 노이만은 마치 컴퓨터처럼 항상 진행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수 주간 만나지 못하는 일도 있었으나 조니(노이만)은 언제나 집필에 돌아오는 순간 전회에 끝났던 장면에서 즉시 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회의 작업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했다.>
두 사람의 5년간에 걸친 공동 작업으로서 제2차 대전 중인 1944년에 프린스톤대학 출판국에서 발행된 것이 <게임이론과 경제 활동>이다. 이 영문 640쪽의 <기념비적 저작>에서 노이만과 모르켄슈테른은 <2인영화(제로섬)게임>을 <n인영화게임>으로 확장하여 다시 난해한 <n인비영화게임>의 정식화에 도달하고 있다.
1989년에 발행한 <존 폰 노이만과 현대경제학>이라는 논문집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게네스 아로(Kenneth Joseph Arrow、1921-2017=미국 경제학자)와 폴 사뮤엘손(Paul Anthony Samuelson、1915-2009=미국 경제학자)을 비롯한 11인의 경제학자가 폰 노이만의 <경제 확대 모델>(EEM: Expanding Economy Model)을 테마로 논하고 있다.
그들에게 공통하는 인식은 <폰 노이만은 경제학에서의 분석방법을 근저로부터 바꾸었다.>는 것이다.
사뮤엘손은 그가 인생에서 만난 중에 노이만은 <가장 마음의 움직임이 빠른 천재>라고 인정하고 <비길 류가 없는 존 폰 노이만>이라고 부르고 경의를 표하고 <우리들의 전문분야인데 그는 조금 얼굴을 내놓은 정도로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어원문=ゲーム理論を生み出した天才ノイマンは、経済学も根本的に変えた
출처=https://gendai.ismedia.jp/articles/-/79946
글=다카하시 쇼이치로(高橋 昌一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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