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창신 溫故創新 ongochangsin

상식

영국 4지역 대강의 역사

간천(澗泉) naganchun 2016. 6. 30. 04:18



영국 4지역 대강의 역사


    

영국은 다음과 같이 4 개의 홈 네이션스로 이루어졌다. 

 

명 칭

ISO

면적/km²

인구(06)

수 도

의 회

연합연도

잉글랜드

(England)

ENG

130,395

4,914

런던

(London)

×

927

웨일스

(Wales)

WAL

20,779

290

카디프

(Cardiff)

1282

스코틀랜드

(Scotland)

SCO

78,772

506

에딘바라

(Edinburgh)

1707

북아일랜드

(North Ireland)

NIR

13,843

169

벨파스토

(Belfast)

1922


 

잉글랜드

 

잉글랜드(England)는 영국의 홈 네이션스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섬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북쪽으로 스코틀랜드, 서쪽으로 웨일스와 아일랜드 해, 남쪽으로 영국 해협, 동쪽으로 북해와 접한다.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며 면적은 130,410.이다.

잉글랜드는 영국 전체 인구 4/5 이상인 49,138,831 (2001년 기준)을 보유하고 있으며, 잉글랜드에 위치한 런던은 영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잉글랜드는 영국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영국이라는 명칭 또한 잉글랜드(英蘭)에서 유래했다. 잉글랜드 왕국의 독자적인 역사는 1707년 합병령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하면서 사라졌다.

 

웨일스

 

웨일스(영어: Wales, 웨일스어: Cymru 컴리 [ˈkəmɹi])는 영국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스 중 하나이며, 그레이트브리튼 섬 서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잉글랜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아일랜드 해에 접한다. 웨일스의 인구는 2011년 기준 3,063,456명이며 총 면적은 20,779 km²이다. 지리적으로 북온대 지대에 위치하여 변화무쌍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웨일스 해안길의 전체 길이는 1,200km가 넘고 웨일스 전역에는 산악지대가 널리 분포하며, 영국 중북부 지역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스노우돈 산이 위치하고 있다.

웨일스의 국가적 정체성은 5세기 경 로마인이 그레이트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이후 켈트계 브리튼인으로부터 수립되었으며 웨일스는 현대 켈트계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된다. 1282년 르웰린 압 그리피드가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하였고, 15세기 초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스의 독립을 단기간 회복한 바 있다. 1536년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가 제정한 웨일스 법(1535-1542)에 의해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의해 영국으로 완전히 합병되었고 사법체계도 잉글랜드 중앙정부 치하에 통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와 차별화된 웨일스의 정치가 발달하게 된다. 20세기 초, 로이드 조지가 웨일스 진보주의를 제창하였고, 이는 사회주의의 신장과 노동당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웨일스인들의 국민적 감정이 1세기가 넘게 성장하며 1925년에는 웨일스당, 1962년에는 웨일스어 위원회가 창설된다. 1998년에는 웨일스 정부 법에 의해 웨일스 국회가 설립되어 현재 다양한 위임 책무에 대한 권한을 수행하고 있다.

산업 혁명 초기, 웨일스에서는 광업과 금속가공업이 발달하면서 농경사회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남부 웨일스의 탄전 개발로 인해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현재 전체 인구의 가 남부 웨일스에 분포하며 주민들은 주로 수도인 카디프, 스완지, 뉴포트 및 근접 산업 지구에 거주한다.

현재 웨일스의 채광 산업과 중공업은 몰락했거나 사양산업이며 웨일스 경제는 주로 공공 부문, 경공업, 서비스업, 관광업에 의존한다. 2010년 기준 웨일스의 총 부가가치(GVA)455억 파운드, 1인당 15,145 파운드이다. 이는 영국 전체 평균 수치의 74%로서, 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영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웨일스는 영국의 다른 지역과 정치적, 사회적 역사를 밀접하게 공유하고 있다. 웨일스는 공식적으로 이중 언어 체제이며 토착 언어는 웨일스어이고 공용어는 영어이다. 대부분의 주민이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웨일스는 여전히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 웨일스 내에는 560,000 명 이상이 웨일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이들은 주로 웨일스의 북부와 서부에 거주하며, 전세계적으로는 웨일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70만 명 정도가 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노래, , 시 낭송, 문학, 악기, 작곡, 뮤지컬, 연극 등을 겨루는 대회인 이스테드보드를 통해, 웨일스는 '노래의 나라'의 이미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스테드보드는 1176년에 최초 대회가 개최되어 현재에 이르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FIFA 월드컵, 럭비 월드컵, 영연방 경기 대회에서 웨일스는 독자적인 스포츠 팀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럭비는 웨일스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에서는 영국의 다른 홈 네이션스와 마찬가지로 웨일스도 영국의 일부로 출전한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의 역사는 영국의 홈 네이션스 중 하나인 스코틀랜드의 역사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약 10,000년 전부터 인류 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들이 남겨졌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로마 제국 시기에 이르러 브리튼 제도에 대한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기록은 대부분 지금의 잉글랜드와 웨일스지역에 있었던 로마 속주인 브리타니아에 대한 것이다. 브리튼 섬 중 지금의 스코틀랜드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브리타니아 이북의 지역은 칼레도니아라고 불렸으며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이 지역에 거주하였던 민족은 픽트족이었다. 당시 기록 가운데 스코틀랜드에 대한 것은 매우 제한적이나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해상 무역로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발트해 인근 왕국들과 아일랜드, 프랑스 및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중요 해상 무역로였기에 이들과 깊은 관련을 맺어 왔다.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잉글랜드와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으며, 이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산업 혁명이 일어나 유럽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산업 발전의 퇴조가 있기도 하였으나, 전후 북해 유전 개발과 금융의 발전으로 산업과 문화의 부흥기를 맞았다. 1999, 합병으로 폐회되었던 스코틀랜드 의회가 다시 설치되었다.

 

북아일랜드

 

20세기까지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아일랜드 역사의 일부였다.

그러나 5, 6세기부터 켈트어로 울라이드(얼스터)라 알려진, 뚜렷이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북부지역에서 발달되었다. 얼스터의 역사에 대해 문서화된 가장 초기의 기록은 7세기의 것이다. 8세기에 이르러 섬의 씨족들이 무리를 지어 5개의 지역을 형성했는데, 그중 오닐 왕조 밑의 얼스터가 11세기까지 주도세력이었다.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사우스웨일스, 유럽 대륙으로부터 온 노르만족이 아일랜드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205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존 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얼스터 백작을 탄생시켰다. 16, 17세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주자들이 개신교 신앙을 갖고 아일랜드, 특히 얼스터에 정착했다. 얼스터의 개신교 인구는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위그노들이 18세기에 이 지역을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더욱 늘어났다.

이민자들의 상공업 기술은 리넨 제조업의 발달에 기여했으며, 이 리넨 제조업은 19세기 벨파스트·래건밸리의 산업화에 토대가 되었다.

1801년 합동법에 따라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라는 이름아래 영국 본토(Great Britain)와 아일랜드의 법률상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40년대의 대기근을 포함한 19세기의 많은 위기로 인해 아일랜드 지방자치(제한적 자치정부)를 성취하려는 세력이 생겼다.

최초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1886, 2번째는 1893, 3번째와 마지막 것은 191214년에 각각 상정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법령의 발효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기되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는 2개의 자치제 설립을 규정했는데, 1개는 얼스터의 9개주 가운데 6개주(지금의 북아일랜드)로 구성되고, 다른 1개는 얼스터의 나머지 3개주와 함께 남아일랜드의 23개 주(지금의 아일랜드 공화국)로 구성되었다.

남아일랜드는 1916년의 부활절 봉기에 의해 과격화되어 완전독립을 요구하면서 아일랜드 지방자치를 전면 거부한 반면, 얼스터의 6개 주는 영국 본토와의 합병을 더 선호했지만 지방자치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92140년 북아일랜드는 공공연한 종파주의 국가로서,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도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를 지배했다. 소수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차별로 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시골로부터 섬유업과 조선업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벨파스트 같은 공업중심지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중반 위태롭게 지속되던 북아일랜드의 안정이 깨지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당시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고무된 로마 가톨릭교도 들이 벨파스트와 런던데리를 중심으로 시민권 확보 투쟁을 벌임으로써 신·구교 세력 간 종파주의 갈등이 폭력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공식적·비공식적 공격에 대한 가톨릭교도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게릴라들인 프로보스(Provos)의 출현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활동을 재개했다. 프로보스의 정치적 주장은 영국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신교도에 의한 국가지배의 종식이었다.

이에 맞서 신교 세력은 자체적인 준()군사조직을 만들었다. 1970년대초 영국군이 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북아일랜드에 진주했지만 얼마 안되어 이들은 가톨릭교도들에게 달갑지 않은 외부세력의 대변자로 비쳐지게 되었다. 영국군의 철수를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통일의 사전단계로 간주한 IRA는 이를 위해 테러 시위를 계속했다.

19723월 영국 총리인 에드워드 히스는 북아일랜드의 헌법과 의회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내각 관료인 북아일랜드 장관을 임명해 이 지역 문제를 맡겼다.

197176년 최악으로 치달았던 상황은 1980년대에는 다소 호전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1년에 50100명이 정치적 학살과 암살로 숨지는 등 1990년대 중반까지 분쟁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무려 3,100명이 넘었다.

1980년대 이루어진 화해의 시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985년 체결된 영국-아일랜드협정으로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 문제에 처음 공식적 자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990년대에는 북아일랜드의 주요 합법 정당들이 모여 평화회담을 열었는데 IRA의 과격파 정치조직인 신페인당은 IRA가 연합론자(북아일랜드와 영국의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군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계속 테러를 자행한다는 이유로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평화회담의 골자는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북아일랜드 국민의 다수가 동의할 경우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영국 정부가 인정하며, 북아일랜드의 정치가 안정될 경우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등에 대한 헌법상의 주장을 포기한다는 것 등이었다.

1994IRA와 연합론자 군사조직 간의 휴전이 이루어지고 종파 갈등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영국 정부와 IRA의 공식 대화가 시작됨에 따라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는 듯했으나, 19962IRA의 폭탄 테러를 시발로 휴전은 파국을 맞았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영국 총리에 당선되고 활발히 평화협상을 벌인 결과 19984월 영국과 아일랜드 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