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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 부인 이야기

큐리 부인 이야기1 1, 어린 시절과 실연

간천(澗泉) naganchun 2011. 11. 3. 04:25

 

위대한 여성과학자

큐리 부인 이야기1

 

 

위대한 여성과학자 「큐리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주 1편씩 7편으로 나누어 실으렵니다.

 

 

 

1, 어린 시절과 실연

2, 면학과 결혼

3, 방사능과 신원소

4, 라듐 원소와 노벨상 수상

5, 시련 속에서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

6, 세계 대전과 세계의 반응

7, 후진 육성과 죽음

 

 

 

 

 

큐리부인 

 

 

 

 

1, 어린 시절과 실연

 

어린 시절

 

큐리 부인(Madame Curie)은 1867년 11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마리아 살로메 스클로도브스카(Maria Salomea Sklodowska 1867년 11월 7일~1934년 7월 4일)였다. 아버지 부와디수카 수쿠오도프스키(Buwadisuka Sukuuodofusuki) 는 하급 귀족계급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에 의하여 연구와 교단에 서는 것을 제한당하기 전까지는 페테르부르크대학(Saint Petersburg State University)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던 과학자로서 그 할아버지 요셉(Józef) 도 물리, 화학 교수이고 루블린(Lublin)에서 젊을 때 보레수와프 푸루프(Boresuwafu Purufu) 에 사사하였다. 어머니 부로니수와바 보기수카(Buronisuwaba Bogusuka)는 하급 귀족계급 출신으로 여학교 교장이었던 교육자였다.

 

 

16세 때의 큐리 부인

 

마리아는 5명의 형제들 중에 막내로서 언니 소피아(1862년생), 브로스니와바(Buronisuwaba 1865년생), 헤라(1866년생), 오빠 유세프(Józef 1863년생)이다. 그중에서도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 때에는 언니의 책을 낭독할 수 있었고 기억력도 뛰어났었다.

그런데 당시 폴란드는 빈회의로 분할되어 바르샤바공국은 폴란드입헌군주국으로서 사실상 제정러시아와 병합된 상태였고 독립국가 체제가 아니었다. 제정 러시아는 지식층을 감시하여 행동에 제약을 주었다.

마리아가 6세 때에 아버지가 은밀하게 강의를 행한 것이 발각되어 직장과 집을 잃었다. 다시 어머니는 건강을 잃었다. 투기에도 실패하여 빈궁해진 일가는 이사한 곳에서 기숙학교를 열었는데, 1874년 학생이 앓은 티푸스가 일가에 전염되어 언니 소피아(Sophia) 가 죽었다. 1878년에는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4세인 마리아는 심각한 우울상태에 빠져서 어머니를 따라 다니던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불가지론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정교사일과 첫사랑의 깨어짐

 

1883년 김나지움(Gymnasium)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성에게는 진학의 길이 열려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마리아를 친척이나 제자가 사는 시골에서 쉬게 하였는데, 그녀는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지냈다.

그 후에 바르샤바(Warsaw)에 돌아와서 가정교사 등으로 일을 했는데 피야세츠카(Pyasetsuka) 라는 여교사의 소개로 비합법적인 바르샤바이동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무렵 언니 부로스니와바(Buronisuwaba)가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저금을 하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일을 해서 언니를 돕기로 결심했다. 1885년부터 마리아는 가정교사로 일하였다. 처음에는 크라크푸(Kraków)의 법률가 일가에서 그 후에는 치에하노프(Ciechanow) 에서 농업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친척인 조라프수키(Zorafusuki)가에서 가정교사가 되었다. 여기서 공부에 들어간 그녀는 바르샤바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던 일가의 장남 카주미에슈 조라프수키(Kajumyeshu Zorafusuki) 에게 반하여 두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쥬미에슈가 결혼할 희망을 양친에게 알렸더니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하여 그녀는 계약 기간인 2년을 마치고 치에하노프(Ciechanów)를 떠나 발틱해(Baltic Sea)연안에 있는 소포트(Sopot)마을에 사는 후크스(fuchs)가에서 다시 1 년간을 가정교사로서 일하였다.

1890년 3월 수 개월 전에 의사 카주미에슈(Kajumyeshu) 와 약혼한 언니 부로스니와바(Burosuniwaba) 가 파리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편지가 마리아에게 왔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언니와 함께 있겠다는 점, 바르샤바의 가정교사 일이 순조롭게 잘되고 있다는 점, 바르샤바대학에서 공부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점, 유학하기에는 아직 충분한 저축이 없다는 점 그리고 카주미에슈 조라프스키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점 등이었다. 그녀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올드타운(Old Town) 근교의 크라크후(Kraków) 교외거리(바르샤바 왕궁 앞 광장에서 남쪽으로 뻗은 거리) 66에 있는 농공박물관 실험실에서 과학연구의 기능 습득에 힘썼다. 이 실험실은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에서 러시아의 저명한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에프(Dmitriy Ivanovich Mendeleev)의 조수로 일한 일이 있는 유세프 보구수키(Yuzefubogusuki) 가 관리하고 있고, 또 로베르토 분센(Robert Wilhelm Bunsen、1811년3월31일~1899년8월16일=독일 화학자) 한테 배운 엔 밀리체르(N Milicer)도 그녀를 지도하였다.

전환의 계기는 1891년 가을에 그녀로서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모양으로 찾아왔다. 결혼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카주미에슈 조라프스키(Kajumyeshu Zorafusuki) 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9월 두 사람은 자코파네(Zakopane)에서 피서여행을 함께 하였다. 곧 24세가 되는 마리아는 교착된 인생에 변화를 기대했는데 그는 우유부단하여 아무것도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때문에 두 사람은 싸워서 결별하고 말았다.

마리아는 스스로 파리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카주미에슈 조라프스키(Kajumyeshu · Zorafusuki) 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수학자로서 이력을 쌓고 또 야규웨대학(Uniwersytet Jagielloński=폴란드 최고의 대학)의 학장, 바르샤바교육청의 장관에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만년에는 1935년에 세워진 마리 큐리의 동상 앞에 꿇어서 무슨 생각에 빠진다. 바르샤바대학 공과대학의 노교수가 된 그의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