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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 부인 이야기

큐리 부인 이야기 3 3, 방사능과 신원소

간천(澗泉) naganchun 2011. 11. 17. 04:01

 

위대한 여성과학자

큐리 부인 이야기 3

 

 

3, 방사능과 신원소

 

방사능

 

글라시에르(Glacière)거리의 아파트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마리는 EPCI 에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살림도 하였다. 재봉은 전부터 잘했었으나 요리도 점점 잘하게 되었다. 수입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고 중고등교육 교수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1897년 9월 12일에는 장녀 이렌 조리오(Irène Joliot-Curie、1897년9월12일~1956년3월17일=프랑스 노벨 물리학상 수상) 를 낳았다. 그 출산과 육아는 의사인 시아버지 주누 큐리(Junu Curie)가 도와주었다. 동년 말에는 철강의 자화(鐵鋼의 磁化)에 관한 연구논문을 작성했다.

마리는 남편과 의논하여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다음 단계에 나아갈 것을 검토하였다. 두 사람은 여기서 1896년에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큐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년 12월15일~1908년 8월25일=프랑스 물리학자)이 보고한 우란(Uran) 염화물이 방사하는 X선과 닮은 투과력을 가진 광선에 착안하였다. 이것은 인광과는 달리 외부에서의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우란 자체가 자연히 발하고 있음이 나타났는데 그 정체와 원리는 수수께끼인 채로 베큐렐은 연구를 포기하고 있었다.

마리와 피엘은 논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이에 착안하였다.

피엘이 확보한 EPCI 실험장은 창고 겸 기계실을 이용한 난방도 안 되는 열악한 곳으로 방문한 어느 학자는 <감자 창고와 가축우리를 합하여 나눈 것 같다.>고 비유할 정도였다.

거기에 피엘과 그의 형 자크(Jacque)가 15년 전에 발명한 광테코를 이용하는 고정도(高精度)의 상현전압계(象現電壓計)와 피엘이 개발한 수정판(水晶板) 피에소소자(素子)(piezoelectric element) 전기계(電氣計) 등의 기기를 가져서 우란화합물의 주위에서 생기는 전리(電離)를 계측하였다. 그래서 곧 샘플인 방사현상이 실제의 우란함유량에 좌우되어 광과 온도 등 외적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다.

결국 방사는 분자간의 상호작용 등에 따르는 것은 아니고 원자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큐리 부처가 밝힌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음으로 마리는 이 현상이 우란만의 특성인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미 알고 있는 원소 80 이상을 측정하여 토리움(Thorium)도 같은 모양의 방사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결과에서 마리는 이들 방사를 방사능이라 하고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원소를 방사성원소라고 이름 붙였다.

그녀는 발견한 내용을 즉시 발표할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과학에서의 선취권을 가지는 것에 민감했다. 2년 전 베큐렐 (A · H · Becquerel,1852년~1908년) 이 자신의 발견을 과학아카데미에 공표하지 않고 어물어물하여 이튿날로 연기하다가 발명자의 영예도 그리고 노벨상도 시루바나수 톰프슨(Shirubanasu · Thompson) 것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큐리 부처도 그와 같이 재빠른 수단을 취하여 마리는 연구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한 논문을 작성하여 가브리엘 리프만(Jonas Ferdinand Gabriel Lippmann,1845년 8월16일~1921년 7월13일=룩셈부르크 태생의 유태인 물리학자, 발명가)을 통하여 1898년 4월 12일 과학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큐리 부처는 톰프슨처럼 토리움(thorium) 방사능 발견 경쟁에 패하였다. 2개월 전 베를린에서 게아하르트 슈미트(Gerhard · Schmidt) 가 독자로 발견 발표하였었다.

 

연구실의 큐리부인 

 

신원소의 정제와 연구

 

마리의 탐구심은 멈출 줄을 몰라서 다음으로는 EPCI에 있는 여러 가지 광물 샘플의 방사능 평가를 시작하였다. 이윽고 2종류의 우란광석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토르베르나이트(Torbernite)(인동우란광)의 전리가 우란 단체(單體)보다 2배나 있고 피츠블렌드(pitchblende、역청우란광)에서는 4배에 상당하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것들은 토리움을 함유하고 있지 않았다. 측정이 바르다면 이들 광석에는 우란보다 훨씬 활발히 방사하는 어떤 물질이 소량씩 함유한다고 그녀는 고찰하였다. 마리는 <가능한 빨리 이 가설을 확인하고 싶은 열렬한 소망을 가졌다.>고 후에 말하고 있다.

1898년 4월 14일 큐리 부처는 피츠블렌드 분석에 당하였다. 100g의 시료를 유봉(乳棒)과 유발(乳鉢)로 갈아 부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피엘은 마리의 고찰이 바르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윽고 하고 있던 결정(結晶)에 관한 연구를 중단하고 마리의 일에 당하였다. 1898년 7월 큐리 부처는 연명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폴로니움(polonium=원자번호 84의 원소, 원소기호는 Po)이라고 이름 붙인 신원소 발견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12월 26일에는 격한 방사선을 발하는 라듐(radium=원자번호 88의 원소, 원소기호는 Ra) 이라고 명명한 신원소의 존재에 관하여 발표하였다.

큐리 부처의 발표에 학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물리학자는 신원소의 방사선이 어떤 현상에서 생기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찬동하기 어렵고, 화학자는 신원소라면 원자량이 분명하지 않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런 때문에 순수한 신원소의 덩어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마리는 그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피츠블렌드는 매우 고가라서 그것을 입수할 자금이 없었다. 생각한 끝에 유리를 제조할 때 착색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우란염을 추출한 후의 폐기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그리하여 주생산지인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 상트 요아힘스탈 (Bohemia, St, Joachimsthal) 광산에 문의하였더니 무상으로 제공해주기로 되었다. 그러나 운송비는 큐리 부처가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가계를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정제하는 데에 필요한 넓은 장소였다. 피엘이 EPCI와 교섭한 결과 건물은 빌 수가 있었는데, 이전에는 의학부의 해부실로 사용하던 책상도 없는 작은 집이었으나 여기가 큐리 부처가 여러 가지의 업적을 낳는 무대가 되었다.

피츠블렌드는 복잡한 화학조성을 가진 혼합광물이고 분리 정제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큐리 부처는 라듐 염을 특수한 결정화(분별결정법)하여 추출한다는 방법에 도전하였으나 그것은 과혹한 육체노동을 요구하였다. 수 킬로 단위의 광석 부스러기를 큰 가마나 항아리에서 비등, 교반, 용해나 침전, 여과 등의 방법으로 분리하여 용액을 분리하여 결정시키는 일을 몇 단계나 반복한다. 건물에는 연돌도 없어서 큰 불을 쓰는 작업은 집 밖에서 했다. 평행하여 방사능 연구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윽고 큐리 부처 간에는 작업이 분담되어 세세한 연구는 피엘이 하고 정제 작업은 마리가 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입수한 1톤을 처리하여도 부족하였다. 부처는 신원소의 함유율을 백분의 1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는 10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고 유의한 양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광석량은 몇 톤이나 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큐리 부처는 시간이 부족하였다. 실험에 드는 경비의 부담,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아버지와의 동거로 가족이 늘어서 이사한 집의 집세 등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두 사람이 모두 교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엘은 수입을 올리려고 소르본(Sorbonne)대학 교수직이 비어서 응모했는데 사범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낙선하였다. 그럴 때에 1900년 스위스 제네바(Geneva)대학에서 큐리 부처에게 좋은 조건의 교수직이 있었으나 실험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이를 사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수학자 앙리 포앙카레(Jules-Henri Poincaré、1854년4월29일~1912년7월17일=프랑스 수학자)는 우수한 두뇌의 국외 유출을 막기 위하여 애를 써서 피엘을 소르본대학 의학부의 물리, 화학, 박물학과정 교수로 초빙하였다. 또 마리도 세블(Sable)의 여자고등사범학교의 임시교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수입은 조금 늘었으나 실험에는 새발의 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