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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월요단상

조카들은 가차 없이 자란다!

간천(澗泉) naganchun 2012. 1. 9. 04:37

 

조카들은 가차 없이 자란다!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가족들을 만난다. 친정 부모님의 근황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서가 첫 번째 만남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다음으로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두 조카와의 시간이다.

물론 동생 내외를 비롯하여 언니네 가족과 고향의 풍광 등이 모두 내 마음의 공간에 담아 와야 할, 꼭 만나야 할 대상이다.

모두 반갑고 고마운 존재들이지만 조카들은 더욱 특별나다.

자매로 자라나는 조카들의 지난 번 헤어질 때 보았던 모습을 그리며 마음이 설렌다.

나를 즐겁게 했던 일을 떠올리고 다시 즐거워질 일로 기대가 커진다.

예전에 만나서 지낼 때 계속 조카들을 쳐다보며 마냥 기쁘고 기분 좋았던 추억이 마음을 더 부풀게 만든다. 어쩜 이렇게 예쁘고 매력적이고 봐도봐도 또 보고 싶은 대상이 있는 것일까? 신기할 정도다.

 

내가 이제는 가지 못할 길을 조카들은 무한한 꿈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어서 부러운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새 하얀 캔버스 도화지를 나는 옆에서 부러워한다. 나는 이미 그려버려서 더 그릴 여백이 없는 도화지. 그들의 것은 아직 가지 않은 길들이다.

 

조카들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본다.

어린 인격에도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다 들어있고, 기분도 있고, 느낌도 있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고. 또 새로운 싹이 움트고 있다. 그런 성향과 성격과 인성 사이사이에서 내비쳐지는 가족의 D N A.

대를 이어 그들을 통해 발현되는 유전적 형질을 찾아내고자 커다란 돋보기를 들이댄다. 묘한 끌림이 있는 탐색이다. 우리 형제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형질들이 보일라치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내, 서로 다른 세계와 세계가 만나서 또 다른 전혀 새로운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기에 다시 이내 조카들의 ‘고모’로 돌아가 그들을 유심히 뜯어본다. 그들은 눈치 못 채겠지만 고모는 그렇게 조카들을 바라보고 바라본다.

 

형제자매의 아이들인 조카들은 가차 없이 자라난다. 두 해 만에 만난 아이들은 이내 자기들의 세계가 후광처럼 함께 하고 있었다. 조카들만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세계까지 함께 같은 공간에 있게 해야 하는 어색함이 있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집중의 방향이 생겨 있었다. 조카들은 그들의 또래문화 안으로 잠시 잠시 들어갔다 나오곤 한다. 서운해진다. 그들 생각 속에 가족이 모든 집중의 대상이었는데. 이미 장성해버린 조카들도 여럿 있지만 나는 조카들이 어릴 적에 나의 온 에너지를 올인해 왔다. 나의 인생의 시기마다 그 대상이 달랐지만 그들은 나의 집중적인 총애를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나는 조카들이 어릴 적에 이미 나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쑥쑥 그들 나름의 방향으로 자라서 어른이라는 곳으로 충만하게 진행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조카들이 시간 지체하지 않고 주변의 여건에 굽힘이 없이 상관없이 나름의 내비게이션에 따라 자라기를 바란다. 주변은 그들의 속도와는 다르게 느리게 가거나 간혹 정체되어 있기도 하고 헤매고 있을 테지만. 조카들은 그들의 인생 스케쥴대로 그렇게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조카들이 이번에도 가차 없이 자라고 있었다.

 

아이는 잉태한 순간부터 언제나 부모들과 조부모에게 감동을 준다. 고모인 나도 조카들을 통해서 이렇게 흐뭇한 마음이 드는데 그의 부모들은 오죽할까.

나도 우리 부모의 자식인데 이런 감동을 드렸을까. 나도 우리 고모 이모 삼촌의 조카인데 그런 기쁨을 드렸던가? 나는 조카들을 보면서 깊이 생각해본다. 나는 심히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것 같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e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