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2/8)
오페라 가수 생활
데뷔 초기
1944년 7년 만에 아버지 요르고스의 편지를 접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3일 아테네에서 솔로 리사이틀 겸 작별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갈 여비를 모았다.
1945년 9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단역을 전전했다. 그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주목받지 못하였고, 95kg의 거구가 지적받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감량에 성공한다. 칼라스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연 오드리 햅번의 미모에 반한 것이 다이어트의 계기가 되었다 한다.
194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단장 에드워드 존슨이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듣고 매료되어 메트로폴리탄의 1946년에서 1947년 시즌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주연 나비부인역을 제의했으나 마리아는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부르는 것이 싫었고, 81Kg의 체중으로 15세의 가냘픈 여자 역할을 하는 게 싫어서였다 한다. 1946년 시카고 오페라단의 단장 바가로치는 이탈리아의 오타비오 스코토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 오페라단을 되살리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세르조 파일로니(Sergio Failoni)의 지휘와 칼라스의 주연으로 투란도트를 연주하려고 기획했으나 1947년 1월 공연을 며칠 남기고 후원사인 시카고 컴퍼니의 파산으로 공연은 무산되었다.
1947년 초 시카고 컴퍼니사의 직원이었던 이탈리아 베이스 가수 니콜라 로시 레미니(Nicola Rossi Lemeni)에게서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인 조반니 체나텔로(Giovanni Zenatello)를 소개받았다.
자나텔로는 칼라스의 노래에 매료되어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1947년 칼라스는 오페라의 꿈을 포기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6월 27일 나폴리에 도착, 《라 조콘다 (La Gioconda)》를 연습하였다.
1947년 7월에 베로나 음악제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8월 3일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일부 소프라노 등에게 붙이는 "라 디비나 (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다가, 1947년 12월 베니스에서 이탈리아어로 상영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에 캐스팅되고,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로 주목을 받아 재계약을 맺게 되었다.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는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후 주로 투란도트를 공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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