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雪後(산중설후)
고려-이제현/李齊賢
-산중에 눈 온 뒤에-
얇은 이불 차갑고 등불은 어두운데
사미는 온밤 내내 종을 치지 않는다.
아마 나그네가 일찍 문을 연다 성내었는가보다.
부디 앞뜰의 눈이 소나무를 누르는 것 보라.
紙被生寒佛灯暗(지피생한불정암)
沙彌一夜不鳴鍾(사미일야불명종)
應嗔宿客開門早(응진숙객개문조)
要看庭前雪壓松(요간정전설압송)
*지피(紙被)-얇은 이불. *사미(沙彌)-수행이 덜 된 작은 중. *응진(應嗔)-성내다. *지(紙)-종이. *피(被)-입다. *정(灯)-등불. *암(暗)-어둡다. *사(沙)-모래. *미(彌)-두루. *명(鳴)-울다. *진(嗔)-성내다. *간(看)-보다. *압(壓)-누르다.
작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
고려의 문신, 문인.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역翁), 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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