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自我)’가 집을 나갔습니다!
어른들의 분실물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자아(自我)’가 아닐까?
분실물센터에는 물건이 넘쳐난다. 영혼의 분실물센터엔 이 사람의 ‘자아(自我)’, 저 사람이 분실한 ‘자아(自我)’가 여기 저기 보인다.
슬그머니 나온 ‘자아(自我)’들이 가만히 있다. 꿈쩍도 하지 않고. 아주 담대하다.
‘자아(自我)’들은 이 ‘자아(自我)’분실물센터에서 잠시 머물기도 하고 아예 영영 그곳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자아(自我)’의 속성은 주인이 잘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 집을 나서 버린다는 것이다. 일단 그 집을 나선 ‘자아(自我)’는 그 주인이 누구 인지 알지만 주인이 찾기 전까지 절대 스스로 집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인은 그 ‘자아(自我)’라는 녀석이 언제 집을 나갔는지 모른다. 어쩌다 ‘자아(自我)’를 생각할 때면 이미 그 ‘자아(自我)’는 저 멀리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후다. 그때야 주인은 자기에게 ‘자아(自我)’라는 중요한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아(自我)’는 무색이다. 무향이다. ‘자아(自我)’를 찾을 실마리는 없다.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그 ‘자아(自我)’에 맞는 자기가 있을 뿐이다. 그 둘이 합체 로봇처럼 일체가 되는 때가 있긴 한데, 그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일단 분실한 경우, ‘자아(自我)’를 찾아 나선다면 해 줄 수 있는 위안은 바로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때를 가지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게 단서다. 그게 철칙이다.
자기와 ‘자아(自我)’ 사이에, 그 틈에 이물질이 섞이게 될 때 ‘자아(自我)’는 집을 나가는 것이다.
어떤 주인들은 ‘자아(自我)’를 찾아 나서서는, 자기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자아(自我)’를 자기 것으로 우기고 가지고 왔다가 더 곤혹을 치르게 된다. 돌이킬 수 없이 자기의 ‘자아(自我)’를 찾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분실물센터 소장은 말한다. 그렇다고 ‘자아(自我)’보고 네 주인 찾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안타깝다고 호소한다.
즐겁게 잘 산다고 느꼈던 어떤 사람이 매일 매일이 짜증의 연속이고 하던 일도 잘 안되고 왠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걸음하듯이 버거움을 느끼게 되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얼마 전 본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주인공은 아우성친다.
이 맥아리 없이 촥촥 쳐지는 이유가 바로 ‘자아(自我)’때문인가 하고 의문을 던지게 된다. ‘자아(自我)’를 상실했다고 세상을 행해서 고함을 친다. 누가 자기 ‘자아(自我)’를 빼앗아 간 것처럼 탓을 해 댄다. 그리고는 ‘자아(自我)’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그냥 마냥 ‘자아(自我)’가 있음직한 곳으로 왔다 갔다 한다. 인간이 ‘자아(自我)’ 때문에 생각하고 고민하고 시간을 잠시 멈추거나 되돌리듯이 자기 속의 물건을 꺼내보는 시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나 소설이나 드라마나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의 중심에는 이 ‘자아(自我)’가 관여하고 있다. 빅브라더가 바로 ‘자아(自我)’다. 개인의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 그것이 ‘자아(自我)’이다. 그런 ‘자아(自我)’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거나 무심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혹독한 대가, 곤혹의 대가를 치르는 과정은 방황이고 아픔이고 고통이겠지만 그 결과는 성장이다.
그래서 일부러 가끔씩 자기 ‘자아(自我)’를 잃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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