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자랑하는 천하제일의 미인
오이치(市)(1547~1583)(1/2)
오이치노가다의 상
당대의 빼어난 미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나가마사와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을 하지만, 후에 노부나가가 이 동맹을 깨면서 전쟁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오다 가로 되돌아 온 오이치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했다. 노부나가 사후 그의 후계 문제로 히데요시와 대립하다 결국 패배, 남편과 함께 자결했으니 그녀 나이 37세였다.
오이치에 대하여
총명한 데다 절세의 미인이라 하던 오이치(市)는 1546년 오타노부나가(織田信長)의 13세 어린 누이로 오와리노 구니(尾張國=현 아이치현 서부)에서 태어났다. 오이치는 키가 크고 살갗이 희며 날씬한 몸매에 눈 꼬리가 째진 듯한 눈에 작은 입을 가진 미모의 주인공이었다.
1567년 오이치는 21세로 당시 기타오우미(北近江=현 사가현) 영주인 22세의 영웅 아사이-나가마사(浅井長政)와 결혼하였다.
이것은 천하를 노리는 오타-노부나가가 미노(美濃=현재 기후현)를 치거나 상경할 때에 배후의 걱정을 없애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한편 아사이가(浅井家)의 주인인 나가마사로서도 오타가(織田家)와의 동맹을 맺고자 하는 생각으로 한 결혼이었다. 정략결혼이기는 하지만 나가마사와 오이치의 부부관계는 주위가 부러워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장남 맘부쿠마루(萬福丸), 장녀 차차(茶茶), 이녀 오하쓰(初), 삼녀 오에(江), 이남 만쥬마루(萬壽丸)을 낳았다.
오이치의 평온한 생활은 겨우 수년이었다. 이윽고 1570년(24세) 4월 오타-노부나가는 아사이-나가마사의 양해도 없이 아사이의 동맹자인 에츠젠(越前=후쿠이현)의 아사쿠라-요시가게(朝倉義景)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서약이 있어서 결혼하게 되었었다.
그것은 오타가와 아사쿠라가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아사이가는 대대로 이웃나라인 아사쿠라가와 친교를 맺어서 서로 돕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이가에서는 결혼할 때 두 나라의 관계를 잘 이해시키고 오타-노부나가도 아사쿠라가를 공격하지 않으며 부득이 공격할 때는 미리 알린다고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약속을 깨고 오타-노부나가는 아사쿠라씨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분노한 아사이-나가마사는 원래 기가 강한 무장이었으므로 행군 중의 노부나가군을 아사쿠라와 합동해서 협공을 가하였다. 이에 오타-노부나가는 간신히 퇴각하여 목숨만을 구하여 오우미(近江)로 탈출하여 교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가마사는 오타-노부나가의 누이동생인 오이치와는 이혼은 하지 않았다.
이때 오이치는 아사이-나가마사가 배신한다는 것을 알고 오빠인 오타-노부나가에게 이를 알리기 위하여 팥(小豆)을 주머니에 넣어서 오타의 진중에 위로로 보냈다. 이를 받은 오타-노부나가는 <팥은 오타군이고, 주머니는 아사쿠라와 아사이군이라서 마치 주머니 속의 팥처럼 오타-노부나가군이 아사쿠라와 아시이군에게 포위당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알고 위기를 탈출하였다. 이때 아사이-나가마사가 배신함을 오타-노부나가는 허용할 수가 없어서 1573년(27세) 오타-노부나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아사쿠라-요시가게를 패망시키자 곧바로 아사이-나가마사의 성(오다니죠/小谷城)을 포위하고 몇 번이나 항복을 권했으나 아사이-나가마사는 거절하다가 최후에는 아사이-나가마사는 자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오이치도 같이 자결하려하였으나 나가마사가 이를 말리고 나가마사는 오타노부나가에게 오이치와 그 아이들의 목숨을 탄원하였다. 오타-노부나가는 이를 수락하고 오이치와 그 딸들 차차, 오하쓰, 오에는 살려주고 아들 둘은 후의 도요토미-헤데요시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자결하였다.
살아남은 오이치와 그 딸들은 오타-노부나가의 보호하에 평온하게 9년을 지냈다. 1582년(36세) 혼노지(本能寺)에서 오타-노부나가가 죽자 오타-노부나가의 삼남인 오타-노부다카(織田信孝)의 권함을 받아 오타가의 가신인 무장 시바다-가쓰이에(柴田勝家)와 재혼하였다.
후의 도요도미히데요시(秀吉)도 오이치를 맡으려 하였으나 오이치의 아들들을 처형한 것이라든지 신분상 천한 신분으로 출세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고 싫어하여 오타의 충신인 시바다에 의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1583년(37세) 오타가의 내분으로 시바다가 헤데요시에게 패하자 자신이 오타가의 재흥을 바라고 시바다-가쓰이에에게 재혼하였는데 이제는 그 꿈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가쓰이에하고 함께라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다 하여 히데요시가 포위한 성안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히데요시(하시바-히데요시/羽柴秀吉)의 군세는 점차 포위망을 좁혀 격렬한 전투 끝에 본관에까지 쳐들어왔다. 가쓰이에는 처인 오이치에게 “가쓰이에의 소망은 없다. 그대를 맞아들인 것은 참으로 짧은 기간이었다. 주군 오타-노부나가의 누이이니 히데요시에게로 가서 의지하라.”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니 이에 대하여 오이치는 “작년 가을 기후(岐阜)에서 여기로 와서 오늘 날까지 따뜻한 정을 받았습니다만 전생의 옅은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아사이(浅井) 밑에서 죽어야 할 몸 이제 다시 이렇게 당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히데요시에게 의지한다 해도 좋은 날은 없을 것입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백년의 맺음으로 생각하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가시는 길에 함께 데려가 주세요. 단 세 사람의 딸들은 살려서 부모를 조상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은 굳게 맺어져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이치는 그 딸들을 성에서 빠져 나가도록 주선하고 가쓰이에(62세)와 그 가신과 함께 성내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37세였다.
사세의 노래로 <그렇지 않아도 짧은 여름밤은 누우면 곧 밝아버리는데 이별을 재촉하는 뻐꾸기인가.>하고 노래를 남겼다.
세 사람의 딸들은 히데요시의 비호를 받아 각각 제 인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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