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의 ⅓을 사망하게 한 <흑사병>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노동력 부족으로 사회는 붕괴, 그래도 무서운 역병에 <은혜>가 있었다.
순식간에 세계를 크게 변하게 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우리들의 생활이나 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크게 변화시킨 펜데믹을 인류가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 가장 큰 것은 중세의 <흑사병>이다.
역사상 흑사병의 큰 펜데믹은 3번 있었다. 1665년의 영국 런던이나 19세기-20세기에 걸쳐서도 맹위를 떨쳤으나 사상 최악의 규모였던 것은 1347년에서 1351년에 걸쳐 유럽을 엄습한 흑사병이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적리, 인플루엔자. 마진, 그리고 매우 무서운 한센 병 등 많은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장 공포를 준 것은 흑사병이다. 피크였던 수년 간 흑사병은 전후에 없는 속도로 퍼져서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흑사병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이나 의식을 일변시켰다. 농민이나 왕자도 같은 흑사병으로 죽어갔다. 그래서 당시 문헌에는 흑사병 앞에서는 신분의 차 등은 의미가 없다는 사상이 반복 등장하였다.
맹 속도로 퍼져서 방대한 사자를 낳게 한 역병,
흑사병이 그 정도로 빨리 넓은 지역으로 퍼진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학자도 과학자도 불가시의였다.
그 정체가 아시아와 유럽에서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선(腺)페스트였다는 것은 거의 역사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선페스트>는 페스트균이 일으키는 3개의 병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에 지나지 않다.
제2병형인 <패혈증성 페스트>는 페스트균이 혈액 중에 들어간 것으로 피부 아래 검은 반점이 나타나서 <흑사병>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폐페스트>에서는 호흡기에서 일어나 환자는 심하게 기침을 하고 비말로 감염하기 쉽다. 중세기에는 패혈증성 페스트와 폐페스트의 치사율은 100%였다고 한다.
<이 정도로 빠르게 퍼진 것은 비말로 감염하였기 때문이고 주가 되는 병형은 선페스트가 아니라 폐페스트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폐페스트는 서서히 퍼진다. 환자는 곧 죽음에 이르러서 많은 사람에게 퍼지게 할 정도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태반의 증거는 중세의 흑사병의 주된 병형(病型)은 선(腺)페스트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해상무역이 확대하던 시대여서 식료나 일용품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선박으로 장거리를 운반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병원균도 1일에 38km라는 예가 없는 속도로 퍼졌다.
쥐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보다 빠른 속도로 퍼진 이유는
페스트균은 쥐로 인하여 확산되었다고 오랜 동안 믿어왔다. 까뮤의 소설 <페스트>에서도 모두부터 쥐가 이것을 가져오는 재앙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범인은 따로 있다는 연구결과가 과학지 <미국 아카데미기요(PNAS)>에 2018년에 발표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범인>은 쥐가 아니라 인간이다. 실은 페스트균을 직접 매개하는 것은 벼룩이나 이이다. 그것을 쥐나 인간이 운반함으로써 병은 빠른 속도로 퍼진다.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는 선(腺)페스트의 유행에서는 쥐나 그 밖의 설치류가 그 벼룩을 옮기는 때문에 균을 확산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더해서 중세의 페스트 희생자의 유전자를 조사한 연구결과에서 많은 전문가가 중세의 세계 유행도 쥐로 인하여 가져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흑사병이 퍼진 경로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었다. 근거의 하나는 신종 코로나 감염증을 제외하고 흑사병이 현대의 어떤 전염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유럽에 퍼진 것이다. 또 현대의 대유행 전에는 쥐의 대량사가 종종 확인되고 있는데 중세에서처럼 쥐가 대량사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면 흑사병은 어떻게 해서 펴진 것일까. 이전부터 벼룩이나 이를 운반한 것은 쥐가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생각하는 학자가 있었다. 감염된 인간에게서 피를 흡입한 벼룩이나 이가 페스트균도 함께 흡입하여 바로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인간에게 옮으면 그 인간도 감염된다.
그래서 논문의 저자로 노르웨이 국립수의학연구소에 속하는 캬틀린 틴 (Catlin Dine) 씨의 팀은 쥐와 인간의 경우의 각각의 감염확대모델을 작성하여 통계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자 의외로 조사대상인 9개 도시의 7개에서 인간의 모델 쪽이 사망기록과 일치하였다.
단지 딘씨 등은 다시 많은 실험 데이터를 모아서 모델을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하고 있다. 또 이 연구가 역병연구자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페스트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하지만 딘 씨 등은 자신들은 객관적인 입장에 있다고 하고 있다.
인구가 줄고 각지에서 사회가 붕괴하고 그 덕분에--
범인이 누구이건 교역로를 매개로 하여 최초에 감염이 확대된 곳은 큰 상업도시였다. 거기서 인접한 마을로 방산되고 다시 시골로 퍼졌다. 중세의 주된 순례로도 흑사병을 운반하여 각지의 성지는 지역 내에서 국내에서 국가 간에 점염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스트균이 가정으로 침입되면 16-23일 후에 겨우 증상이 나타나고 3-5일 후에는 환자는 죽었다. 지역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다시 그 1주 후이다. 그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페스트균은 환자의 림프절에 이행하고 붓게 한다. 환자는 구토 두통 고열로 떨리고 망연한 상태가 되고 만다.
당시 마을에서는 <곧 도망쳐라, 서둘러서 멀리 가라. 돌아오는 것은 뒤에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었다. 이 조언을 따라서 피난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많이 시골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비참한 결과가 되었다. 피난한 사람도 이미 감염되어 있는데 감염자와 함께 이동하였기 때문에 청정했던 시골에 병을 옮기게 되었다.
흑사병 희생자는 방대한 수였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구체적인 숫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펜데믹 전의 유럽 인구는 약 7500만 명이었는데 1347년에서 1351년 사이에 격감하여 5000만 명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사망률은 더 높았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인구가 격감한 것은 흑사병에 걸린 사람이 사망한 것만이 아니라 시골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이나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광범위로 사회가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의 펜데믹이 끝난 후에도 소규모의 유행은 계속되어서 유럽의 인구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간신히 인구의 증가가 궤도에 오른 것은 16세기 무렵이었다.
대재해의 영향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 미쳤다. 펜데믹 후 수십 년 간은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이 폭등해지고 일찍이 비옥했던 농지가 목장으로 변하거나 버려졌다.
영국만으로 1000개 가까운 마을이 사라졌다. 그런데 나쁜 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방에서 도시로 대규모의 이주가 있었기 때문에 도시는 비교적 빠르게 회복되고 상업이 활기를 되찾았다. 시골에 남은 농민은 넓은 유휴지를 얻어 토지를 가진 농민이 권력을 잡고 농촌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실제 역사학자들은 흑사병에서 새로운 기회나 창조성이나 부가 생겨나서 거기서 문예부흥의 예술이나 문화나 개념이 개화하고 근대 유럽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번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펜데믹으로 과연 새로운 가치나 시회가 생겨날 것인가.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는 이제부터 살아갈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일본어원문=人口の1/3が死んだ「黒死病」はいかに社会を変えたか
출처=https://news.yahoo.co.jp/articles/0533dc53e30e92b93bd7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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