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공자(孔子)는 누구인가.
1. 공자의 생애
(1) 공자의 전기적 기록에 대하여
공자의 전기로서 최초의 기록은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BC 145~86)의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다. 또 공자의 제자의 전기는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이다. 그 후 한나라 때의 전문을 정리한 『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책이 있고, 이에 후대 사람들이 재편집한 것이 오늘날 전해진다. 공자의 전기는 이들 자료에 근거한다.
『사기(史記)』는 BC91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니, 공자가 죽은(BC479)후 400년 가까이 지난 후의 작품이므로 공자에 대한 기록에는 분명하지 않은 점과 의문점이 많다. 오늘날 공자의 전기를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시해야 할 자료는 『논어(論語)』이다. 또한 『맹자(孟子)』, 『춘추삼전(春秋三傳)』 그리고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초기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기록이 전하는 공자에 관한 전문이나 설화 등이다.
(2) 공자의 출생과 가계
『사기』의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주(周) 왕조 시대의 중기를 지난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BC552)에 노나라 [현재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평창향추읍(平昌鄕陬邑)에서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노나라 애공(哀公) 16년(BC479)까지 73세의 생애를 살았던 사람이다.
공자의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이며 자는 중니(仲尼)이다. 아버지는 추읍(陬邑)의 대부로 전지에서 무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다. 어머니는 정처가 아니며, 공자는 아버지 만년의 자식인 듯하다. 아버지는 공자가 막 자라기 전에 죽었고 형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공자가 가계를 잇게 되어서 소년시절 어머니와 형의 식구들을 거느리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젊어서 한때는 어느 귀족 가정의 집사로서 회계와 곡물창고지기를 하기도 하였고 목축을 담당하는 일도 하였으며 예절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다 한다. 후에 그는 “가난하였기 때문에 천한 일을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재주를 익히기도 하였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논어 자한편) 고 술회한 일이 있다.
(3) 공자가 태어난 나라.
공자의 조상은 송(宋)나라의 명문가였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송나라는 은(殷)나라가 멸망하자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기 위하여 유민이 모여 이룩한 소후국(小侯國)이다.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의 전통 문화를 계승한 씨족인데 주나라가 건국한 후 어느 시기에 노(魯)나라에 합류되었던 것 같다. 공자의 아버지는 이 노나라에서 무훈을 세우고, 중간 관료로서의 사족(士族)이었었던 듯하며, 공자는 은나라의 전통적인 문화를 이어받은 씨족의 후예였다. 공자가 태어난 시기는 이미 주나라가 건국하여 600년이 지난 시기이고 주나라는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혼란이 거듭되던 춘추시대였다. 이 노(魯)나라는 중국 고대 문명국인 하(夏), 은(殷)의 문화를 이어받은 나라이며 특히 주나라의 건국 창건자인 주공(周公) 단(旦)의 아들이 영주로 봉해진 나라로서 중국 고대 문화의 정수를 비교적 온전하게 계승 보존한 소국이었다.
(4) 공자의 면학
공자는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이었으나, 심신이 강건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면학에 성실한 노력가였다. 당시 취직을 위한 기본 소양이었던 육예(六藝) 곧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충분히 습득하였었다. 그 위에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 15세부터는 고급관료의 필수 교양인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연구하고 국가 사회의 바람직한 존재 양상과 지도자로서의 군자의 생활 태도를 추구함으로써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주나라 건국의 위인인 주공을 존경하고 정치와 도덕과 문화의 본질을 철저히 추구하였다.
마침내 30이 되어서 독자의 입장을 정립한 학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공자세가(孔子世家)』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공자는 신장이 9척 6촌의 거구였으며, 『‘순자(筍子-非相篇)』에는 “중니면여몽기(仲尼面如蒙倛)”라 하였으니 귀신을 쫓기 위하여 만들어진 험상궂은 모습을 한 탈과 비슷하였었던 듯하다. 제자 중에 무용을 떨친 자로(子路)는 공자보다 9세가 연하인데, 당시 거리에서 활개치고 다니던 소위 깡패였으나 공자의 남자다운 점에 감동하여 입문하였다 한다.
공자의 학문적 입장은 위정자로서 좋은 정치를 실천하고, 교양인이면서 인격자인 군자로서 개인의 생활을 실천하는 학자로서 정치, 문화, 도덕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정부의 요직에 취직하여 위정자로서 성공하고 싶었으나, 뿌리 깊은 봉건적 신분제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30세 후반부터 제(齊)나라에 유학하여 견문을 넓히고 노나라에 귀국하였으나, 때를 얻지 못하여 제자를 가르치는 데 전념하다가 51세가 되어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벼슬하게 되었다.
(5) 공자의 출세와 망명
공자 51세 때(BC501년)에 벼슬하고, 중도(中都)의 재(宰=지방장관)로 처음 부임하였는데, 중도 고을을 다스린 지 1년 만에 치안질서가 바로잡혀서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점차 인격과 학식과 수완을 발휘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정공 10년(BC500) 공자 52세 때에는 특히 제나라와의 외교 교섭인 ‘협곡(峽谷)의 회맹(會盟)’에서 주임보좌로서 외교에 성공을 거두어 이전에 제나라에 빼앗겼던 3고을을 도로 찾았다. 이런 공로가 있어서 다음해 53세(BC499년)에는 사공(司空=건설부장관)이 되고 55세(BC497년)에는 대사구(大司寇=사법장관)가 되었다. 이때부터 하대부(下大夫=장관급)로서 계씨(季氏) 정부의 국정에 참가하게 되어 현직으로서 생애의 영광을 누리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지배계급 사이에 하극상과 부패가 만연하고 대외적으로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 개혁을 위하여 힘썼으나 공자의 학식과 견식 그리고 수완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어서 직을 사퇴하고 망명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가 공자 55세쯤의 일이다.
(6)공자의 망명 생활
공자는 그로부터 14년간 위(衛)로부터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섭(葉), 초(楚) 등 여러 나라를 인고에 찬 주유천하를 결행했다. 그는 받아드리는 곳에서 그의 이상에 맞는 모범지구를 만들고, 인(仁)의 정치의 기반을 닦고자 하였다. 그는 이미 노나라만이 아니라 전 중국 천하와 인류를 위한 일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그의 뜻은 실현되지 아니하였고, 적어도 세 번은 큰 위난에 처하기도 하였다[광(匡)의 난(難), 송(宋)의 난, 진채(陳蔡)의 난 등]. 이 시기를 통하여 인생의 경험은 점점 풍부해졌고, 인격은 점점 완성되었으며, 견식은 닦여지고, 사상은 원숙해졌다. 이는 말년의 교육과 문화 사업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에서 발상하여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하는 인간으로 육성되었다.
(7) 공자의 귀국과 교육 문화 사업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것은 그가 68, 9세 때이다. 그의 귀국의 이유는 첫째로 당초의 이상 실현은 가망이 없고, 이 이상 주유천하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둘째는 그도 나이가 들었으니 자신이 실현시키지 못한 일들을 후대에라도 실현시키게 하려면 후진 양성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국 후 노나라에 남겨두었던 제자를 규합하고 새로 입문하는 제자들을 모아 교육과 문화 사업에 몰두하였다.
(8) 공자의 업적과 죽음
그가 노나라에 귀국하자 그에게는 신구 제자가 운집하였고, 노나라는 학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일생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도덕적 실천의 본을 이루었고, 시, 서 ,예, 악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갖추어 전통 문화의 고전인 시, 서, 예, 악의 정리와 보존의 문화 사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외아들 이(鯉)가 죽고 공문십철의 제자들 중에 이미 민자건(閔子騫)이나 민손(閔損)이 세상을 떴고, 애제자 안회(顔回)가 가고 이어서 자로(子路)가 비참하게 세상을 뜨게 되자 충격 속에 공자 자신은 의기소침하여지고 몸도 쇠약해졌다. 마침내 공자는 노나라 애공(哀公) 16년(BC479)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공자는 중국에 있어서 학문의 개산이고, 도덕의 개발자이며, 정치학의 아버지이며, 학교의 창시자이면서 고대 중국 전통 문화를 집대성하여 미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기무라 에이이치). 그는 오늘날에도 추앙 받아야 할 인류의 사표이며 세계의 공자이다.
2, 공자의 제자들
공자의 제자는 3천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전설일 뿐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77명이라 하였고,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72명의 이름이 거명된다. 그러나 『사기』의 77명 중 35명에 대하여는 성명, 연령, 출생지, 업적 등을 들고 나서 42명에 대해서는 이름만을 들고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하고 있으며, 35명중에서도 6명에 대해서는 성명과 연령만 알 뿐 사적은 적혀있지 아니하므로 최소 29명이 확실한 공자의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논어에 나오는 제자의 수는 28명으로 제자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아니한 3명 [진항(陳亢=학이편10, 계씨편13, 자장편25), 신정(申棖)(공야장편10), 유비(孺悲)(양화편20)]을 합하면 31명으로 『사기』의 내용과 어느 정도 합치된다. 인명약해는 ‘四. 논어에 나오는 제자’ 항을 참조하기 바란다.
(1)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의 제자로서 덕행, 언어, 정사, 문학의 4과에 뛰어난 제자들 열 사람을 들고 있는데(선진편) 이 들을 공문십철이라고 한다.
1) 덕행에 뛰어나다는 제자는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이다.
2) 언어에 뛰어나다는 제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이다.
3) 정사에 뛰어나다는 제자는 염유(冉有), 자로(子路)이다.
4) 문학에 뛰어나다는 제자는 자유(子遊), 자하(子夏)이다.
'유가의 고전 > 논어의 명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위정편의 명언 (0) | 2015.07.04 |
---|---|
三. 논어의 명언1, 학이편의 명언 (0) | 2015.07.04 |
一. 논어에 대하여 (0) | 2015.07.04 |
차례 (0) | 2015.07.04 |
일러두기 (0) | 2015.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