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을미년을 생각한다.
올해는 을미년이다. 120년 전 1895년 4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의 계략(일봉정부)에 의하여 한말 고종황제의 황후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아서 되돌아온다고 하는데 120년이 지난 오늘날도 일본은 역사를 망각하고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일본인들에게 타국의 왕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무뢰한의 역사를 남긴 나라임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일본 작가 쓰노다후사코(角田房子)의 논픽션소설 <민비암살>에서 명성황후의 최후를 적은 부분을 소개한다. |
새벽의 참극
광화문은 왕궁의 남쪽 정면에 있고 목표로 하는 왕 부처의 편전인 건청궁은 최북부에 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궁전이 있고 각각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어서 통로는 극히 복잡하다.
대원군의 가마를 지키는 일행이 5, 60미터 나아가 제2문을 지나려 할 때 돌연 후방에서 총소리가 났다. 광화문 밖에 있던 일부의 일본 수비대와 홍계훈의 일단과의 사이에 총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없어 총소리는 멎었다.
침입대는 제2의 중문을 지나 거대한 근정전의 옆을 통하여 그 북측에 있는 강녕전 옆에 대원군의 가마를 내렸다. 이것은 대원군의 강한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는 여기서 “국왕의 윤허를 기다린다.”고 주장하여 양보하지 아니하였다. 국왕의 허락 없이 폭도와 함께 왕에게 접근하는 것은 유교국의 왕족인 대원군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일본 측으로서는 형편을 좋게 하는 것이었다. 명성황후 살해라는 목표를 다할 때까지 대원군은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게 된다. 일부의 일본병이 대원군 호위를 위하여 남고 타 장병은 왕궁 안을 목표로 나아간다.
왕 부처의 편전인 건청궁으로 가는 길은 좌우 두 길이 있다. 좌측의 본 도로 나아간 일본 수비대와 훈련대는 시위대의 저항을 맞아 혼전 상태가 되었다. 시위대는 당직병으로 수가 적었기 때문에 ‘광화문에 폭도 내습’의 보를 받아도 병력을 분산시키지 아니하고 궁 안의 전각을 수호하는 데 집중할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부대가 주력이 되어서 침입한 일단에게는 저항할 수가 없어서 얼마 없어 산산이 도망쳐 전투는 끝났다. 일본 부대의 장병은 궁 안의 전각을 목표로 나아간다.
좌측의 본도를 간 수비대와는 별도로 우측의 간도를 택한 일단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아니하고 왕궁 내의 지리에 밝은 하기와라 경부를 선두로 앞뒤생각 없이 궁 안의 전각을 향하여 돌진했다. 그들은 본 도에서 시위대의 저항을 받은 일본 부대보다 먼저 건청궁에 도착하였다.
일본인 집단이 경복궁 침입으로부터 명성황후 암살까지의 한일 양국 자료를 읽어 비교해 보면 “명성황후는 일본인에 의하여 살해되어 유체는 정원에서 소각되었다.”고 하는 기본에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의문을 끼어 넣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바야가와 등 실행대에 참가한 일본인의 수기에는 후년의 것도 오히려 미우라안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 그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기분이 강하고, 또 하수인을 뽑아내는 일에 연결되는 기술은 피하려는 배려도 있어서 조선 측의 조사나 목격자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 이외에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민간인 일대는 건청궁을 둘러싼 울타리의 중앙 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돌아 두 개의 작은 문을 지나 건청궁의 앞뜰에 나왔다. 여기에 위병의 모습은 없고 궁인들은 제 빛을 잃고 당황하여 서두를 뿐 궁 안의 전각은 이미 무방비 상태였다.
국왕은 문을 열어 둔 채로 방의 중앙에 서서 그 주위에 모시는 신하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일본인들을 손으로 제지하고 “국왕 폐하이시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리고 있었다. 고바야가와는 “지사는 그이가 국왕임을 알고 경의를 표하고 일부러 전 내로 들어가는 자는 없었다.”고 적고 있으나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조선 측의 자료에 의하면 몇 사람의 일본인이 왕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거칠게 다루고 후에 왕에게로 온 왕태자도 머리에 쓴 것이 찢기는 등 난폭한 행위를 받고 있다. 일본 측에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어 그 중에는 하기와라 경부가 “왕과 왕태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마라. 대원군과의 약속이 있다.”고 큰 소리로 타일렀다고 적고 있는 것도 있다.
7일 밤부터 8일 아침까지에 걸친 시간을 왕과 왕비는 어떻게 지냈는가. 7일 밤 왕궁에는 민영준의 영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한다. 이날 밤 숙직으로 왕궁에 있었던 농상공부 협변 정병하(鄭秉夏)는 “8일 오전 2시경 국왕에게 배알할 때는 국왕, 왕비, 왕태자의 세분이 함께 장안당의 북쪽에 계셨다.”고 후에 우치다 영사에게 말하고 있다.
왕은 “일본 수비대에 평상시와 다른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 보고를 받은 자리에 정병하가 왔으므로 그에 대하여 그에게 물었다. 정병하는 “걱정 없습니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그것을 안심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명성황후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아니하였다.
또 수 시간 후 정병하가 건청궁 방향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신녕각의 왕에게로 달려가니 왕비는 궁녀들을 데리고 중앙 정원에서 물러서는 때였다고 말하고 있다. 장안당도 신녕각도 건청궁 내의 건물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것은 오전 7시경일 것이다. 명성황후는 밤을 새운 연회를 좋아해서 해가 떠서야 침소에 드는 일이 많았다고 전해지지만 이날 밤에도 연회가 끝난 후에는 왕과 함께 그 여운을 즐기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은 불면증인 명성황후의 형편에 맞는 취침 시간이 올 때까지 마음씨 좋게 대하는 습관이었다고 한다. 어떻든 왕 부처는 침입자가 건청궁에 접근할 때까지 몸에 다가오는 위기를 전혀 예측하지는 아니하였다.
‘권재형(權在衡)보고서’는 미우라 고로의 하수인인 정병하가 명성황후가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책략으로 “걱정 없다.”고 대답했다고 그를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박종근(朴宗根)(쓰루문과대학 강사)는 저서 《일청전쟁과 조선》에 “결과로 말하면 그렇지만, 정병하는 미우라의 책략에 끼워졌을 뿐 미우라와 결탁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말하고 있다.
고바야가와는 건청궁에 침입한 일본인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칼을 뺀 민간인은 일본병과 두루 섞여 왕비라고 생각되는 여성을 찾아 종횡으로 뛰어 다녔다. 그런데 어디에도 왕비와 같은 모습은 없다. 그런 사이에 누구인지도 모르게 ‘왕비는 도망쳤다.’고 하는 소리가 있어 남자들은 한층 애가 타서 즐비한 방의 문고리를 개머리판으로 부수고 가구와 살림살이를 눕히고 툇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우왕좌왕 어떻든 혈안이 되어 광분했다.
그들은 손에 닿는 대로 붙잡힌 궁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어당기고 ‘왕비는 어디 있느냐 ! 왕비가 있는 곳을 말하라 !’하고 목덜미에 칼을 대고 노호했다. 일본어가 통하지 아니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아니할 정도로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각처에서 비명이 오르고 건청궁 일대는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까지의 고바야가와의 기술은 목격자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다. 시위대의 교관 윌리암 마퀴 다이(제네랄 다이)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두 사람은 건청궁의 앞뜰에 서서 일본인 집단의 폭행을 목격하고 있었다.
고바야가와는 “이 두 사람은 국왕의 거실로부터 겨우 3, 40간 (약 6, 70미터)의 장소에 광대한 양관을 짓고 살고 있었으므로 곧 나와서 이 분쟁을 실지로 목격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은 후일 국제간의 분쟁에 유력한 재료가 되었다.”고 적었다.
대 혼란 중에 일본 사관 한 사람이 제네랄 다이에 신경이 쓰여 호리구치 구마이치에게 “뜰에 외국인이 있다. 이 자리를 떠나달라고 말해다오.”하고 말했다. 호리구치가 그것을 프랑스어로 제제랄 다이에게 전하였으나 미국의 퇴역장군에게 프랑스어는 통하지 아니하였다. 새로 다른 사람이 영어로 그것을 전하자 다이는 “나는 미국인이다. 일본인의 지시에 내가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대답했는데 거스르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는지 일시 그 장소를 떠났다. 그러나 얼마 없어 그는 다시 뜰에 나타나 폭행의 현장을 계속하여 목격했다.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하여 고바야가와는 “국왕이 있는 방 오른 쪽은 명성황후의 거실로 수명의 부인이 실내에 섞였고, 궁내대신 이경식(李耕植)도 또 그 안에 있어서 왕을 옹호하고 있으나 왕비는 이 방에서 예리한 칼날에 시해된 듯하다. 이경식은 실외로 달려 나가.”라고 적고 있으나 이 기술에는 많은 생략이 있다. 구체적으로 적는다면 하수인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지사들 가운데 섞여 들어온 조선인이 했다는 풍설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고바야가와의 결론과 연결이 되지 아니한다.
조선 측 조사 자료, 히로시마 재판의 기록, 우치다 영사의 보고서 등을 서로 맞추어보면---.
국왕의 방에 끼어 든 일본인 수명은 왕의 제지를 물리치고 안의 오른 쪽 왕비의 방으로 난입했다. 이것을 막으려고 한 궁내부대신 이경식은 그들과 서로 비비대면서 왕비의 방에 들어간 때 권총으로 맞아 그는 비틀거리며 뜰에 면한 복도에 빠져나갔으나 또 어깨를 치이어 지면에 굴러 떨어져 절명했다.
건청궁의 신녕각에는 다수의 궁녀가 공포에 쓰러져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겹쳐지듯 몸을 붙여 떨고 있었다. 폭도들은 그것을 거칠게 끌어 일으켜 용모, 복장이 아름다운 두 사람을 참살하였다. 또 한 사람의 머리채를 붙잡고 이웃 방인 옥호루로 끌어내어 여기서 살해했다. 그러나 아무도 명성황후의 얼굴을 모르고, 또 세 구의 유체는 40대 중간이라는데 명성황후로서는 너무나 젊었다.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왕비는 어디 있느냐!” 노호하는 소리, 굉장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궁인이나 궁녀들은 물론이고, 제네랄 다이나 사바틴까지도 왕비의 소재를 질문 받았고, 폭도의 한 사람에게 붙잡힌 시위대 연대장 현흥택(玄興澤)은 때리고 발로 차이는 폭행을 당하면서 심문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이 장소를 빠져나가 후에 증인의 한 사람이 된다.
건청궁의 동쪽 끝에 있던 일본인들은 세 구의 유체 중에 혹시 명성황후가 하고 생각하여 궁녀와 왕태자를 데리고 와서 직접 보여 본인 여부를 알아내게 하였다. 그 결과 옥호루에서 살해된 최후의 한 사람이 명성황후라고 확인되었다.
우치다 영사의 보고서에는 “차례차례로 궁녀를 붙잡고 왕비의 소재와 용모의 특징을 묻는 도중 ‘왕비의 관자놀이에 극히 엷은 마마자국이 있다.’는 증언을 듣고 세 구의 유체를 조사한 결과 그 하나에 마마자국이 있고 궁녀를 연행하여 명성황후임을 확인했다.”고 적혀 있다.
고바야가와는 “나는 실내에 들어가 그 쓰러진 부인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상체에는 짧고 흰 속옷을 입었을 뿐이고 허리로부터 아래는 흰 바지를 입고 있는데 무릎 아래는 맨몸이다. 반듯이 누운 채 숨이 끊겨 쓰러져 둘레에 피가 흐르고 있다. 잘 보니까 작고 마른 색깔이 흰 아무리 보아도 25, 6세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의, 죽었다고 하기보다 인형을 눕혔다고 할 모습으로 아름답게 영구히 잠 속에 들어 있다. 연약한 손으로 팔도를 움직이고 호걸들을 조종한 명성황후 그 사람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영웅의 혼은 가서 돌아오지 아니한다. 방안에 한 사람도 유해를 지킬 사람 없이 참으로 극히 처참한 광경이었다.”
또 고바야가와는 “이 부인은 침상에서 곧 나온 것처럼”이라고 명성황후의 복장에 대하여 적고 있으나 그녀는 임오군란 때와 같이 궁녀의 의복과 바꿔 입었을 것이라고 나는 상상된다. 이 호사를 좋아하는 왕비가 잠옷이라고는 하지만 궁녀들과 같은 것을 평소에 입고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명성황후에게는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있었으나 그 후에 도망칠 시간도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운을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침입자의 거친 발소리를 들은 그녀의 뇌리에 홍계훈의 모습이 떠오르지는 아니하였을까. 임오군란 때 반란군이 점령한 창덕궁의 혼란 속을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업고 탈출시킨 것은 그였다. 그 후 명성황후의 뒷받침으로 특별한 출세를 하여 지금은 이것도 명성황후의 덕으로 친일적인 훈련대의 연대장이다. 홍계훈이 살리러 올 것이라고 기대를 명성황후가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아니하다.
홍계훈은 최후까지 명성황후의 충신이었다. 훈련대의 불온한 움직임을 저지하려고 경복궁에 달려온 그는 광화문에서 일본 수비대와 조우하여 총격전이 되었다. 홍계훈이 이끄는 적은 병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은 없다. 그는 가슴에 총탄을 맞고 낙마하여 또 칼에 찔려 죽었다. 54세였다. 이때 칼을 뺀 폭도들은 건청궁을 목표로 앞을 다투어 돌진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홍계훈이 왕궁의 문전까지 와있었음도 이 사변의 최초의 희생자로서 죽은 것도 몰랐다.
고바야가와도 적고 있는 바와 같이 40대라고는 보이지 않은 명성황후의 젊음은 유체 확인으로 비상한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후에 사건의 심리를 맡은 히로시마지방재판소의 쿠사노 검사정으로부터 사법대신 호가와(芳川顯正)에게로의 11월 9일부 전보의 일부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여자의 얼굴은 젊지만 젖을 조사한바 나이를 먹은 자라는 것”
이 나라의 습관으로 외국 사신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조차 없었던 명성황후가 사후에는 이국의 남자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았다.
또 명성황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 중에 동포로서 나에게는 적기 어려운 행위가 있었던 것이 보고되고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으로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츠카 에이소(石塚英藏)는 법제국 장관 수에마츠 겐쇼(末松謙澄)에게로의 보고서 중에 “참으로 이것을 붓으로 적기에 참을 수 없으나.”라고 전제하고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은 누구인가.
히로시마지방재판소의 판결은 전원 기소가 면제되었으므로 여기서 답은 얻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설이 섞여서 하수인을 한 사람으로 좁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대강의 짐작은 된다.
먼저 문제인 것은 우치다 영사의 11월 5일부 장문의 보고서이다. “왕비는 우리 육군 사관의 손으로 잘려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우치다는 11월 9일부에서 자세하게 “왕비는 처음 우리 육군 사관 때문에 잘리고 다음에 나카무라도 손을 대었는데 그때 나카무라는 잘못하여 그 사관의 칼끝으로 바른 손에 부상”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많은 증언에 의하여 왕의 방에서 왕비의 방으로 난입한 것은 민간인만이 아니라 장교도 있었음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치다의 보고도 “하수인은 육군 사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관과는 무관한 민간인의 이름도 몇 거명되고 있다.
명성황후 암살의 하수인이 육군 사관이라고 하면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 한층 괴로운 입장이 된다. 이것만은 반드시 비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정부로서는 형편이 좋은 쪽으로 민간인 중에는 “내가 하수인이다.” 하고 이름을 내는 사람이 수명 있었다. 재판 기록에는 민간인과 육군 사관과의 얽힘은 나오지 아니한다. 예심 판사가 여기에 대하여 심문을 고의로 생략한 것일까.
기타 여러 설중에서 주된 인물을 들면 먼저 우치다 보고서에 나오는 “잡화상 나카무라”, 나카무라가 신녕각에 숨어있는 명성황후를 보고 끌어 눕히고 제일도를 갈기고, 거기에 달려온 후지가츠 겡(藤勝顯)이 제이도로 절명시켰다는 설이 있다.
다음으로 육군성 법관 이노우에 요시유키(井上義行) 이사의 보고에 있는 “왕비 살해의 하수자로 보는 데라사키”가 있다. 데라사키 다이기치는 별명을 다카하시 겐지(高橋源次)라고 하고 히로시마 재판에서도 쿠사노 검사정으로부터 사법대신 호가와에게 범인(데라사키)이 자백했다는 전보를 쳐 이것을 본 호가와는 구로타(黑田) 추밀원 의장에게 “범인이 자백한 이상 예심도 의외로 빨리 진행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고 보고하고 있다.
데라사키(다가하시)의 직업은 ‘매약상’이라고 적혀 있고 제3자의 증언 중에 “남대문 약방의 다가하시”라고 있으므로 당시 그는 약방을 경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그의 이름을 본 것은 사건 1년 전에 조선 정부가 일본인 고문관등 약 40명을 채용한 때의 자료이다. 데라사키 다이기치는 법률고문부용서기생(法律顧問部傭書記生)이라 되어 있고 조선의 국장급과 거의 동액의 ‘월봉 백 엥’을 자급 받는 신분이었다. 그는 늘 두 개의 이름을 써서 이유는 모르나 서기생의 직을 버리고 매약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데라사키는 사건 직후에 이것도 실행대의 한 사람인 스스키 시게모토(鈴木重元)에게 “나는 한 사람의 미인을 죽였는데 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명성황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어 보냈다.
또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카무라, 후지쇼겡, 나의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릅쓰고 안의 왕비의 방으로 나아갔다. 거기에 많이 모여 있는 2, 30명의 궁녀를 한 사람 한 사람 냅다 던지고, 이불 속을 보니 복장은 그들 궁녀와 같으나 조용하여 덤비지 않고 귀인의 풍이 갖추어 있어 이것이 명성황후라고 눈치 챘다. 머리채를 붙잡고 끌어내었는데 그 태도는 과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나는 한 칼을 내리쳤다. 나카무라가 머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그 손을 조금 잘랐다. 두부를 치니 일격에 쓰러졌다. 다른 것은 ‘데라사키는 난폭하다. 명성황후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베어버렸다.’고 비난했는데 후에 그것이 역시 명성황후라고 아니 나도 나도 하고 내가 했다고 이름을 대었다.” 나의 공을 가로채려는 자식들이 하고 분개한 구조이다. 그는 그 방에 없었던 자까지가 하수인이라고 이름을 대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담화가 꽤 후의 것인 만큼 내용에는 데라사키의 정리 후가 엿보인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명성황후다.’고 분간하여 벤 것이 아니고 스스키에게 보낸 편지처럼 사건 직후에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데라사키의 담화에 의하면 왕비의 방에 난입한 것은 그와 후지가츠, 나카무라의 세 사람인데 재판 기록에는 이 밖에 이에이리(家入嘉吉), 기와키(木脇祐則), 히라야마(平山岩彦)도 난입하였다는 증언이 많다. 히라야마는 명성황후와 궁내대신 이경식과 양쪽의 하수인으로 가장 되어 있다.
이외에 다나카(田中賢道)가 하수인이라는 설과 우치다보고서의 “사카에 마시타로, 요코오 유타로 순경의 의복에 핏자국이 있고---. 요코오는 어느 부인을 살해한 것을 소관에게 털어놓았다.” 등 의심을 가지게 한 사람은 많다.
명성황후 살해의 하수인에 대하여 왜 이 정도로 많은 설이 있어 한 사람으로 좁혀지지 아니하는가. 많은 이유가 있으나 먼저 그들의 증언이 약속이나 의혹이나 개인의 공명심. 그리고 대 혼란 중 흥분 상태였기 때문에 견문이 불확실하여 잡을 것이 없는 때문일 것이다. 명성황후를 둘러싸고 있는 궁녀의 수를 예로 들어도 데라사키는 2, 30명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7, 8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마저 이런 정도의 차가 있다.
다음으로 피해자는 명성황후만이 아니라 전후하여 궁녀 두 사람(일설에는 세 사람)도 살해되었다. 한층 혼란을 크게 하였던 듯하다. 어느 경우도 가해자는 “이것이 명성황후다.”고 확신을 가지고 죽인 것이 아니고 얼마 동안 지나서 유체 확인에서 그 중의 한 사람이 명성황후라고 판명된 것이다. 판명되기까지 유체의 위치가 움직여진 것도 있고 모두가 같은 의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녀를 자른 자 마저도 자신의 손이 간 것이 명성황후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내가 했다.”고 이름을 들고 나온 것은 공명심 때문인데 또 이런 사정까지 잠겨 있었다. 또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행한 범행이므로 한 사람의 살해에 대하여 두 사람, 세 사람의 하수인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하수인일 가능성이 가장 강한 자는 데라사키 다이기치라고 보고 있었던 듯하나 그 라고 판정하는 것도 무리이다. 어떻든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죽인 것은 확실해서 나는 하수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그리 중요성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일본인은 모두 명성황후에 살의를 품고 경복궁에 난입한 것이므로 명성황후와 만난 자는 주저하지 않고 베었을 것이다. 전원이 하수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음은 누가 명성황후와 부닥쳤는가 하는 우연뿐이 아닌가.
미우라 공사가 고종이 부름으로 스기무라 서기관과 함께 왕궁으로 향한 것은 오전 8시경이었다. 왕궁이 일본 수비대와 훈련대에 경호되고 있는 현상으로는 왕은 일본 공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곧 알현이 시작되었는데 미우라 공사는 오카모토 류노츠케나 하기와라 경부의 요청에 응해서 명성황후 암살의 사후 처리에 당했다. 그는 먼저 명성황후의 유체를 확인하고 하기와라에게 지급 유체를 소각하도록 명하고 알현실로 돌아왔다.
문 널판에 올려놓고 실크 이불을 덮은 명성황후의 유체를 하기와라 경부는 건청궁의 동쪽 녹원이라 부르는 뜰로 운반하게 하여 높이 쌓아 올린 장작 위에 올려놓아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일, 청, 로 삼국의 가지가지 의혹과 권모술수의 와중인 조선 왕조 궁정에 군림하여 자기 내심의 마음대로 살아온 명성황후의 육체는 재로 화했다. 유골은 그 가까운 곳에 묻혔다고도 하고 지금도 남아있는 향원지에 내 던졌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내가 읽은 일본 측의 명성황후 암살 현장의 자료는 모두 “아무도 명성황후의 얼굴을 몰랐다.”고 하는 전제로 적혀 있다. 그런데 신기수(辛基秀 오사카거주)가 지은 《영상이 말하는 한일병합사》(1987년, 노동경제사)에는 일본 정부는 이미 왕실의 촉탁 사진사로서 무라카미 덴싱(村上天眞)을 보내어 명성황후와 왕궁 관계자의 사진을 찍어 일본 수비대에 전해주어 사진을 근거로 명성황후의 용자를 기억시킨 것이었다.
왕궁의 많은 궁녀들 가운데 명성황후라 생각되는 여성을 적확하게 잡은 것은 사진에 의해서였다.(한국사진사 강상규(姜相圭) 형설출판사 참조)고 말했다.
《한국사진사》는 1987년에 발행된 것으로 그 속에 이사베라 버드 바숍의 “명성황후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다. 이것에 의하여 명성황후의 사진은 수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왜 한 장 밖에 남지 않았는가. “암살 사건 후에 일본 측은 명성황후의 기록을 많이 파기했다.”고 하는 설이 생각난다.
명성황후의 두 장 째의 사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초상화를 촬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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