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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고전/공자 이야기

공자의 가족들 이야기

간천(澗泉) naganchun 2013. 10. 12. 14:25

 

공자의 가족들 이야기

 

 

공자의 집안과 출생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의하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시씨(施氏)와 혼인하여 아홉 딸을 두었으나 아들이 절실하게 그리워서 첩을 얻어 맹피(孟皮)라는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리 병이 있는 불구자였다. 불안한 그는 72세 때에 18세인 안징재(顔徵在)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當中則記載叔梁紇的元配施氏爲孔紇一連添了九個女兒,孔紇望子心切,於是續娶一妾,雖然生了一個兒子名爲孟皮,卻腳有殘疾。所以孔紇在72歲時三娶18歲的顏徵在,生孔丘仲尼。)(孔子家語·本姓解)

공자는 기원 전 552년 산동성 노(魯) 나라 창평향(昌平鄕)의 추읍(鄒邑)이라는 자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곧 공구(孔丘)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흘(紇)은 안씨(顔氏)라는 여자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하고 <징재(徵在)는 니산(尼山)에 있는 사당의 무녀(巫女)이다.>라 하였다.

그 어머니는 사당을 지키는 일을 맡은 무녀로서 남녀관계는 금지된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 여자가 아이를 낳았으니 그것은 하나의 야합이라서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백안시하고 공씨 가문에서 인지한 후에도 세상의 편견은 면하지 못하였다.

공자는 3세 때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어머니 밑에서 극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무녀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는 제기로 쓰이는 조두(俎豆)를 장난감 삼아서 자랐고 자라서는 장례예식을 익히며 성장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스스로를 독립시킬 수 있는 학문에 뜻을 세우고 살기 위해서는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마다하지 않고 했다.

<논어> 헌문편에 <나는 어릴 때에 비천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천한 일들을 잘하게 된 것이다.(吾少也賤故多能鄙事.)>고 하였는데 천한 일을 하고 무슨 일이든지 해가면서 자신의 입지를 위한 학문에 눈 뜨게 되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공씨 가문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그 아버지의 무덤도 몰랐었다. 공자 17세 때에 어머니가 죽자 곧 오보지구(五父之衢)에 빈소를 차렸는데, 이는 아마도 부모를 합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무덤을 모르므로 망설이다가 다행히 추읍 사람 만보(輓父=장의차를 끄는 사람)의 어머니가 공자 아버지의 묘소를 알려주어 그 후에야 비로소 방산(防山)에 합장하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의하면 공자는 19세 때에 송(宋) 나라 사람인 견관씨(幵官氏)와 결혼하였다.

공자는 54세 때부터 14년 간 주유천하하고 각국을 유세하여 돌아다녔으므로 68세가 되어서 고국인 노나라에 돌아오기까지는 그 아내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는데 귀국 직전에 그 아내는 공자보다 앞서 공자 68세에 사망했다.

 

공자의 아들과 그 자손들

 

아들로 공리(孔鯉)와 딸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손자인 백리의 아들 자사(子思)가 있었다. 아마도 공자는 아들 손자와 삼대가 함께 살지는 못하였다.

공자는 가족이나 가정에는 행복하지 못하였다. 20세 무렵 공자는 하급 관리로서 노(魯) 나라의 소공(昭公)을 섬기고 있었다. 아들 공리가 태어나자 소공은 “아들이 태어났으므로 선물로 이것을 주마.” 하고 잉어(鯉) 한 마리를 주었다. 마침 아내는 그 아들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자는 그 아내의 뜻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주군인 소공이 선물한 잉어 한 마리에 인연을 두고 아들의 이름을 리(鯉)라 정했다 한다. 그 아들은 공자 69세 때에 공자에 앞서 사망하였고 혈육으로는 자사(子思)를 두었다.

<논어>에는 공자의 언동 의식주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열심히 모아 적어내려 노력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어려서 사망한 부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 가문의 사람은 단 아들 리(鯉) 하나인데, 백리(伯鯉)는 공자의 외아들이다. 성은 공(孔)이고 이름은 리(鯉)이며 백리(伯鯉)는 자이다.

공자가 그 아들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논어> 계씨편에

“진항이 백어에게 질문 하였다. “거대는 (선생님의 아들인데 배움에 있어서 특별히 우리와)다르게 가르침을 들은 바가 있는가?” (陳亢問於伯鯉曰子亦異聞乎) 하고 물었더니

“백어가 대답하되 “그런 것은 없다. 다만 예전에(아버지가 마당에) 혼자 서계실 때에 내가 그 앞을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는데 ‘시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셨다.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돌아와 시를 공부하였다.”

(對曰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다른 날에 혼자 (마당에)서계실 때에 내가 총총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가는데 ‘예를 배웠느냐?’(고 물어보셨다.) ‘아직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 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돌아와 예를 공부했다.”(他日, 又獨立, 鯉趨而過庭, 曰學禮乎, 對曰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고 하였다.

이를 보면 공자는 <예>와 <시>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고 또 아들을 직접 가르친 것이 아니고 다른 선생한테서 가르침을 받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맹자(孟子)> 이루상편에는 <옛 사람은 아들을 바꾸어 가르쳤다,(古者易子而敎之)>라는 말이 이는 공자의 아들 가르침을 말한 말일 것이다.

<공자세기>에 따르면 공자의 자손은 이러하다.

공자의 아들은 이(鯉)이다.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伋)을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宋)나라에서 고생을 하였고, 『중용(中庸)』을 지었다.

자사는 백(白)을 낳았는데, 백의 자는 자상(子上)이고, 47세에 죽었다. 자상은 구(求)를 낳았는데, 구의 자는 자가(子家)이고, 45세까지 살았다. 자가는 기(箕)를 낳았는데, 기의 자는 자경(子京)이고, 46세까지 살았다. 자경은 천(穿)을 낳았는데, 천의 자는 자고(子高)이고, 51세까지 살았다. 자고는 자신(子愼)을 낳았는데, 자신은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자신은 부(鮒)를 낳았는데 부는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진왕(陳王) 섭(涉)의 박사(博士)가 되었고, 진(陳)에서 죽었다.

부의 아우 자양(子襄)은 57세까지 살았는데, 일찍이 효혜황제(孝惠皇帝)의 박사가 되었다가 장사(長沙)의 태수로 옮겨갔다. 키가 9척 6촌이었다.

자양은 충(忠)을 낳았는데, 충은 57세까지 살았다. 충은 무(武)를 낳았고, 무는 연년(延年)과 안국(安國)을 낳았다. 안국은 지금의 황제의 박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임회(臨淮) 태수에까지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안국은 앙(卬)을 낳았고, 앙은 환(驩)을 낳았다.

 

사위 삼기

 

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제자인 공야장에게 시집보냈다.

논어 공야장편에

선생님이 공야장에 대하여 말하셨다. "사위로 맞을 만하다. 비록 포승줄에 묶여 옥 중에 있었지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고 하였다.

공자가 그 딸을 시집보내기 위하여 사윗감을 고르는데 제자인 공야장을 골라 그가 사윗감으로 훌륭하다. 그가 옥중에 가두어졌던 일이 있지만 그것은 오해로 인한 일이었다. 곧 공야장은 새의 말을 알아듣는 재주가 있었는데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듣고 시체가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에 한 때 옥중이 가두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카사위 삼기

 

공자에게는 배다른 형이 있었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과 그 정처인 시씨(施氏) 사이에는 9명의 딸이 있었다. 그리고 측실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 그 장남인 맹피(孟皮)는 다리가 불편한 사람으로 일찍이 사망하여서 그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형의 딸인 조카사위로 뽑힌 사람은 공자의 제자인 남용(南容 /南宮括이라고도 함)이었다.

남용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논어 헌문편에는 남궁괄이 공자에게 질문하였다. “예(羿=궁술의 명인)는 활쏘기를 잘하였고 오(奡)는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닐 정도로 힘이 셌는데 제명에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禹)와 직(稷)은 몸소 농사를 짓고도 천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렇게 흥하고 망하는 이치는 무엇입니까?)”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궁괄이 나가자 선생님이 말씀하였다. “군자로다. 이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이 사람은.” 하고 남용을 칭찬하였다.

공자의 제자들은 거의 신분이 낮아서 결코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의 자제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귀족 출신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사마우(司馬牛)와 남궁괄(南宮括/南容) 정도였다. 과연 남용은 군자로구나 하고 칭찬하였다.

특히 남궁괄에 대해서는 논어 공야장편에서는

<선생님은 남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형벌을 받는 일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셨다.>고 하였다.

(子謂南容, 邦有道不廢, 邦無道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또한 논어 선진편에서

<남용(남궁괄)이 백규(白圭)라는 시를 (하루에)세 번씩 반복하여 외웠는데 공자가 형의 딸을 그 아내로 삼게 하였다.>(南容, 三復白圭, 孔子以其兄之子妻之.)고 하였다.

백규란 시경대아편(詩經大雅篇)의 구로서 “백옥 구슬의 흠은 갈면 되지만 내가 한 말의 흠은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란 시구를 반복하여 외운 것이었다. 아마도 남용은 말을 삼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곧 남용은 과묵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서 말로인한 과실을 범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형의 딸을 시집보내어 조카사위를 삼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