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광망
어느 노학자가 밤길을 가다가 죽은 친구를 만났다. 그 학자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무서워하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나는 명부의 관리가 되었다. 이제 명부에 데리고 갈 망자를 연행하는 중인데, 우연히 자네를 만나게 되었군 그래.” 하고 답하였다.
그래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데 한 채의 폐가가 보였다.
그 친구는 “여기는 문사들의 암자일세.”라고 말하였다.
어찌 자네는 그런 것을 아는가? 하고 물으니
“인간은 백주에는 여러 가지 움직임을 하기 때문에 순수한 본성은 감추어져있다. 단지 잠을 잘 때만이 잡념이 없으니까 본래의 정신이 맑아져서 지금까지 읽어서 가슴속에 갈무리해 둔 책들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빛을 발하여 온 몸의 모공에서 빛난다. 그 모양은 비단결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정현(鄭玄 후한의 유학자), 공영달(孔穎達-당나라 유학자) 같은 학자, 굴원(屈原),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 같은 문사들의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은하수까지 비추어서 별이나 달마저도 빛을 다투어 가장 낮은 사람이라도 등불 하나만큼은 빛나서 창에 비추는 것이다. 이 빛은 저승 사람밖에 볼 수 없는데 이 집 위에는 7, 8척 높이까지 광망(光芒)이 보였으니까 문사라는 것을 안 것이다.”
노학자는 자신은 일생 독서를 계속해 왔는데 어떨 것인가 하고 친구에게 묻자 입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제 자네가 가르치는 서당에 가 보았다. 마침 자네는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자네의 가슴속에 보이는 것은 주석이 붙은 <사서>의 일부, 과거답안이 5~ 6백편, 경서의 발췌가 7~ 80편, 수험 작문 참고서가 3~40편, 한 글자씩 검은 연기가 되어서 지붕위로 펴올라 제자들이 책 읽는 소리가 검은 구름이 짙은 안개 속에서 들리는 듯하였다. 광망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네.”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청나라 기균紀畇)이 지은 기괴소설)
'일화 보따리 > 일화 보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가모니와 어느 촌장의 대화 (0) | 2011.11.30 |
---|---|
한 권의 책과 두 제자 (0) | 2011.11.25 |
이상한 모자 (0) | 2011.11.12 |
비파는 나도 탈 수 있다. (0) | 2011.11.05 |
황금을 먹는 왕 (0) | 2011.10.25 |